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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6)화 (16/92)

16화

익숙한 피아노 알람 소리가 병실을 울리자 진우와 진겸이 동시에 깨어났다.

진우는 출근하기 싫다는 걸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검사 결과는 괜찮았지만 언제 나빠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반차나 연차를 내서라도 곁에 있으려 했다. 하지만 진겸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병실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실랑이는 계속 벌어졌다.

“퇴원 수속 어떻게 하는지 모르잖아.”

“의사 선생님께 여쭤볼게.”

“집 주소도 모르잖아.”

“메시지로 알려 줘. 택시 타고 갈게.”

“……형, 아프잖아.”

“안 아파. 이러다가 늦어!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해!”

어제 집에 갔던 시간을 생각하면 서둘러 나가야 했다. 더구나 출근 시간이라 그때보다 차가 더 막힐 터였다.

진겸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진우의 팔을 꾹 밀었다.

“우리 얘기는 이따가 하면 되니까. 빨리 가. 응?”

“……알겠어.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 주소 보내 놓을 테니까, 택시 타고. 형 옷에 지갑 있어. 거기에 체크 카드 있으니까 그거 써. 알겠지?”

“걱정하지 마. 나도 어른이야!”

어른이라고 말하는 모양새가 전혀 어른 같지 않았다. 진겸이 너무 걱정되어 진우는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그렇게 진우를 보낸 진겸은 병원에서 나오는 아침밥을 먹고 훈일의 도움으로 무사히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훈일은 정문까지 데려다주면서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티를 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알레르기는 복숭아만 있으니까 다른 건 가리지 말고 잘 먹어. 너무 자극적인 건 먹지 말고. 카페인도 안 돼.”

“네. 명심할게요.”

“병원에 더 있다 가지. 어차피 탁 이사가 내는 건데.”

진우도 병원에 더 있길 바랐지만, 진겸은 답답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병원이 싫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연이어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날씨도 좋아서 잠시 걷고 싶기도 했다.

“핸드폰에 내 번호 저장되어 있으니까 어디 아프다 싶으면 고민, 생각, 검색!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한테 전화 먼저 해. 심하다 싶으면 바로 병원으로 오고.”

“네…….”

거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훈일은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동료들이 인사하면 손만 흔들고는 계속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진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다가 이제는 제 몸이라는 생각에 귀담아들었다.

훈일의 진심이 가득 담긴 잔소리는 진우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전화와 메시지가 많이 오는 통에 무음으로 해 놨었다가 진우가 소리로 해 놓으라고 해서 오는 족족 차단하면서 바꾼 거였다.

“여보세요.”

― 형, 퇴원했어?

“응. 지금 정문이야. 의사 선생님이랑 같이 있어.”

진겸이 슬쩍 훈일을 보며 말했다.

― 주소 메시지로 보냈어. 택시 타고 가. 병원 앞으로 택시 불러 줄까?

“괜찮아. 주소도 확인했고, 집 잘 찾아갈 수 있어. 병원 앞에 택시 되게 많아.”

― 그래도 콜택시가 편하잖아.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훈일이 픽 웃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진겸을 잘 좀 봐 달라고 메시지 남겨 놓더니, 이제는 전화로 확인까지 한다.

전이랑 달랐다. 물론 지금은 진겸의 기억이 없기에 이러는 거겠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여기 택시 줄 서 있어서 바로 탈 수 있어.”

― ……알겠어. 택시 타면 안에 택시 정보 있을 거야. 그거 찍어서 보내 주고, 내가 전화 안 받으면 메시지라도 남겨 줘. 내릴 때도 연락하고 집에 도착해도 연락해 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에 진겸은 어쩐지 간질거려 가슴과 배를 벅벅 긁었다.

“……전에도 이랬어?”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진우랑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봤었다. 거기서는 백진겸의 일방적인 명령 같은 말들만 적혀 있었다.

뭐가 먹고 싶다, 사 와라. 이거 갖고 싶다, 사 줘라. 돈 다 썼다, 보내 달라.

진우의 걱정 어린 말이 담긴 메시지에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항상 진우만 안달 난 관계였다는 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우에게 더 잘해 주고 싶었다.

진겸의 물음에 전화기 너머 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진우야?”

― ……아니. 근데…… 지금 형 기억이 없잖아. ……걱정돼.

“응.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너 일하고 있다며, 일해. 전화 말고 메시지 보낼게.”

―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통화를 끝낸 진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훈일을 향해 헤실, 웃어 보였다.

훈일이 손을 뻗었다. 나오기 전에 감아 아직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툭 눌렸다.

“진우 걱정하니까 바로 택시 타고 가.”

진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훈일과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진겸은 천천히 걸으면서 아까 왔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집은 병원에서 꽤 거리가 있었다. 지도 앱으로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면 된다. 오르막길을 올라가지 않아도 마을버스를 타면 집 근처까지 갈 수 있으니 그렇게 갈 생각이었다.

가는 길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닌지라 돈 아깝게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원래라면 정차해서는 안 되는 버스 정차 구간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차에 닿았다. 진겸은 차가 선 것은 알았지만 관심은 없어서 전광판을 봤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니, 7분 후 도착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진겸!”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는 얼굴은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관심을 끄려는데 다시 들렸다.

“어이, 백진겸!”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사람들이 전부 차를 보고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로 시선을 옮겼다. 보조석 창문이 전부 내려가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얼핏 보이는 실루엣이 익숙했다.

‘설마…….’

진겸이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이자 보이는 건 수혁이었다. 그는 빨리 타라며 손짓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벌금 물어.”

“……?”

“타라니까?”

“어…… 네.”

갑자기 수혁이 왜 왔는지 몰라도 여기에 계속 세워 둘 순 없으니 얼른 차에 올라탔다. 진겸이 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안전띠 매.”

안전띠를 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혁을 빤히 바라봤다.

“병원 가니까 벌써 퇴원했다고 하더라고. 허탕 친 줄 알았네.”

“오늘은 왜 오셨는데요?”

“왜? 내가 못 올 데 왔어? 어제 병원까지 데려다줬는데 되게 쌀쌀맞네.”

“……그렇게 느끼셨다면 미안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바로 사과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도 그냥 궁금해서 왔어.”

신호에 걸려 차가 잠깐 정차하자 수혁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진겸을 응시했다.

“어제 집에 가서도 네가 생각나더라고.”

내 생각이 왜 나지? 원래 다른 사람한테 별 관심 없지 않았나? 쓰러진 것 때문에 그런가…….

찰나의 순간, 진겸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직접 묻고, 답을 듣는 게 나았다.

“……제가요?”

진겸은 의아하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수혁은 앞을 보면서도 힐끗 진겸을 살폈다.

“응. 확실히 요즘 재밌는 일이 없었는데…… 네가 확 끼어드니까 흥미롭더라고. 그래서 확인 좀 해 볼 겸 왔어.”

“무슨 확인이요?”

“너 아까부터 질문만 하는 거 알아?”

“아…….”

“싫은 건 아니야. 계속 조잘대 봐. 전에는 몰랐는데 네 목소리 좋네.”

그렇게 말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어느 정도 주행 후 진겸이 입을 열었다. 내비게이션이 켜져 있어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는 있었는데 최종 목적지가 달랐다.

“저기…… 우리 지금 어디 가요?”

“백화점.”

“거긴 왜요?”

“백화점에 왜 가겠어.”

“……뭐 사러?”

“잘 아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왜 자신이 같이 백화점에 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진겸의 얼굴엔 계속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입술을 쭉 내민 채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수혁이 실소를 머금었다. 어제 숨을 헐떡이며 버둥거리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확실히 이쪽이 보기 좋았다.

먹는 양도 적은 것 같던데. 그래서 살이 안 붙는 모양이다.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왔는데 드러난 팔에는 알레르기의 흔적이 보였다.

오돌토돌하게 일어난 건 가라앉았지만 긁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피부가 하얗다 보니 붉게 긁힌 자국이 유난히 튀었다.

더 고민하게 두려고 했는데 점차 꺾이는 고개가 심상치 않았다. 저렇게 가다간 창문에 부딪힐 기세였다.

수혁이 픽 웃으며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나 혼자 쇼핑하는 거 싫어서, 같이해 달라고.”

“친구 없어요?”

“……와. 너 은근히 말로 때린다.”

“……진짜 없어요? 미안해요! 친구 많을 줄 알았어요…….”

“두 번 때리네.”

“아…….”

당황한 진겸은 어떻게 이걸 수습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여기서 말을 했다간 세 번 때린다고 할 것 같았다. 딱히 상처 주려고 한 말이 아닌데…….

수혁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미안하면 나랑 같이 쇼핑하자. 너 옷 잘 입잖아. 기억은 없어도 그 센스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그 말에 진겸은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주차하고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수혁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사람이 달라져서 그 센스, 없어졌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고르는 눈이 나쁘지 않았다.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며 따로 고른 옷들도 같이 놓고 보면 꽤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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