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제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터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계속 옆에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다못해 메뉴판을 보고 디저트가 복숭아 셔벗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진겸이 먹기 전에 말릴 수 있었을 거다.
어제오늘 벌어진 모든 일이 제 잘못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진우가 천천히 손을 뻗어 붉어진 진겸의 손목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원범에게 잡혀 난 손자국이었다.
평소였다면 원범에게 쏘아붙였을 테지만, 이번엔 그도 긁는 걸 말리기 위해 쥐었다는 걸 알기에 그저 쓰린 속을 감내해야 했다.
진겸은 피부가 약해 손톱으로 그어도 붉은 줄이 나고 부풀어 오른다. 금세 가라앉기는 해도 쉽게 자국이 남는 피부였다.
“나 오늘 당직이니까. 진겸이 일어나면 바로 연락해.”
“……응. 고마워, 형.”
“고마우면 잘 좀 챙겨. 쟤 병원에 실려 올 때마다 내 심박수가 최고치를 경신해.”
훈일이 과장스럽게 제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진우가 쓴웃음을 짓자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먼지를 털어 내듯 과격하게 흔들었다.
“일어나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옆에서 떨어지기 싫으면 그 상태로라도 좀 쉬어.”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훈일이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시커먼 사내놈 둘이 소파에 앉아 있자 공기가 달랐다. 뒤쪽은 애절한 가족물인데 앞은 누아르다.
“너네도 고생 많았다. 근데 왜 같이 있던 거야?”
“저녁 먹고 있었어.”
“아…… 그래서 복숭아 먹은 거였어?”
수혁이 대답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에어컨이 나오는 병실은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더웠다. 넥타이를 살짝 아래로 당겨 단추를 풀었다. 조금 시원해졌다.
“저녁은 왜 먹었는데?”
“같이 먹으면 안 돼?”
“응.”
즉각 나온 대답에 수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우리 애들한테 접근하지 마. 이 악의 무리야.”
“……요즘 영화 많이 봐?”
“아니. 판타지 소설. 요즘 읽고 있는 게 퇴마하는 내용인데 거기에 나오는 악마들이 딱 너네 같아. 아주 가증스러워.”
“이상한 거에 우리 이입시키지 마.”
훈일이 검지를 교차시켜 십자가를 만들자 수혁의 눈이 찌푸려졌다.
똑똑한 머리를 너무 썼더니 미치기라도 한 걸까.
하긴 금훈일은 원래부터가 저런 사람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괴짜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나마 저 형제 앞에서는 정상인인 척하는 것 같은데, 오래 알아 온 수혁의 눈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간다. 너희 계속 있을 거면 진우 좀 챙겨 줘. 쟤 종일 저러고 있을까 봐 겁난다.”
수혁이 손을 휘적이자 훈일이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병실을 나갔다.
* * *
진겸이 눈을 뜬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알레르기 여파로 두 눈덩이가 부어 뜨는 게 힘겨웠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천장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일어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손가락을 살짝 까딱이자, 숙이고 있던 진우의 얼굴이 빠르게 올라왔다.
“형?”
“…….”
“정신이 들어? 나 보여?”
자리에서 일어나 진겸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붙이고 눈을 바라봤다.
진겸이 힘겹게 눈을 깜빡거리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마. 목이 부어서 아플 거야.”
진겸은 눈을 한 번 끔뻑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괜찮다고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촉촉한 눈이 진우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아프기도 했고 전혀 괜찮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아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지러운 것도 심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점차 붓기 시작한 목에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긁고 싶은데 손이 잡혀 꼼짝달싹 못 하니 무기력함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아파.’
아직도 아팠다. 목도, 손도.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복숭아가 사람 잡네.’
복숭아 알레르기는 흔한 질병으로 치부된다. 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심한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게 자신일 줄은 몰랐다.
백진겸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악역 조연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진겸이 정신을 차리는 동안 진우는 훈일을 호출했다. 다시 온 그는 서둘러 진겸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을 뜨기는 했어도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닌 듯했다. 그나마 눈을 깜빡거리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해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시름 놓은 훈일이 진우를 향해 눈짓했다. 밖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진겸의 상태에 관해서 해 줄 말이 있었다. 당사자 앞에서 해도 괜찮지만 이제 막 깨어난 진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형, 잠깐만 기다려.”
진우는 진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고는 훈일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진우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연신 고개를 돌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겼다.
병실에 온 후부터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원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수혁이 묻자 원범이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여긴 내가 지키지, 뭐.”
딱히 누군가가 병실에 있을 필요는 없었으나, 수혁은 진겸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원범까지 밖으로 나가자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진겸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리저리 움직이려다가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진겸이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던 수혁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진겸의 눈이 그를 향했다.
“개구리 같아.”
“…….”
“사진 찍어 줄까?”
“…….”
“잠깐만.”
찍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카메라를 들이밀더니 진겸의 얼굴을 찍었다. 그러고는 화면을 그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 속 진겸은 살짝 부은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그래도 예쁜 얼굴은 굴욕적이지 않았다.
수혁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낄낄거렸다. 진겸은 사진을 지우라고 하고 싶은데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 불만 가득한 눈으로 그를 봤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수혁이 웃음기를 지우며 물었다.
“맛있게 먹던데,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줄…… 정말 몰랐어?”
알았으면 먹었겠어요?
진겸은 목소리가 나오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떠보는 말인 걸 알면서도 서운하고 억울한 감정이 퐁퐁 샘솟았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건 알지만, 어떤 또라이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런 짓을 하겠어?
물론 수혁에게 백진겸은 이런 짓도 가능한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진짜 백진겸이 아니다.
부어서 제대로 찌푸려지지도 않는 눈을 구겼다. 눈썹이 꿈틀거리자 수혁은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
“억지로 말하지 마. 목 상할라.”
진겸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본인이 말 걸어 놓고 말하지 말란다. 불만이 그득그득 담긴 눈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수혁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진우가 장시간 앉아 있어서 의자는 따뜻했다. 옆에서 보는 진겸의 얼굴은 핼쑥했다. 제대로 못 먹은 사람처럼 볼이 쏙 들어가 있다.
확실히 말랐다. 업었을 때 느껴졌던 무게는 성인 남자보다는 어린애를 업은 듯했다. 물론 비유일 뿐이지 그래도 적당히 무게는 나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를 제 등에 업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그를.
“고맙단 말은 안 해?”
수혁이 검지로 진겸의 볼을 쿡 찔렀다. 그러자 진겸이 고개를 획 돌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래 봤자 눈이 부어 티는 안 났다.
“……고, 마.”
“아, 됐어. 말하지 마.”
수혁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진겸은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 고맙단 말을 하라고 하더니, 하려고 하니까 하지 말란다.
아니,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 뭐 이런……!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조금 나왔다.
진겸이 일어나려 하자 수혁이 어깨를 꾹 눌렀다.
“누워 있어. 아까 경련 일어난 거 때문에 근육통처럼 아플 거래.”
진겸은 일어나는 걸 포기하고 편히 누웠다. 어쩐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했다.
수혁은 침대에 기대 턱을 괴고는 진겸의 얼굴을 찬찬히 감상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 왔지만, 확실히 백진겸은 예쁜 편에 속했다.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이 칭찬의 의미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백진겸을 지칭하는 말로는 제격이었다.
그를 뮤즈로 삼아 디자인한다면 꽤 많은 작품이 만들어질 것 같다는 시답잖은 생각도 했다. 예전 진우에게 하는 것 보면 모난 면도 있는 듯한데, 저 얼굴로 성격조차 커버할 게 뻔했다.
본인 외모를 잘 이용하면 연예인이 되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수월할 텐데 왜 이렇게 사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수혁은 궁금한 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살아?”
“……뭐, 가요?”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였다. 진겸은 걸걸한 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궁금해졌어. 왜 이렇게 사는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첫날 독기 빠진 눈을 보고 대충 믿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이번 일로 확신이 섰다.
백진겸은 확실히 기억을 잃었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잃은 진겸의 생각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헤실헤실 웃기만 해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순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