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진겸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보고 있자 진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드시고 계세요.”
진겸과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급히 나갔다.
원범은 굳었던 진우의 표정에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대충 눈치챘다. 언제나 그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에는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진우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디저트가 나왔다. 한 스쿱밖에 되지 않는 적은 양의 복숭아 셔벗이었다.
셔벗을 바라보는 진겸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어차피 많이 먹질 못하니 욕심부리지 않고 스푼을 쥐었다.
조심스레 퍼서 입에 넣자 차가운 셔벗이 온기를 가득 머금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진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몬이 살짝 섞인 건지 새콤했고, 복숭아 특유의 단맛이 느껴지면서 셔벗 속에 숨겨졌던 과육이 씹혔다. 자잘하게 다져진 과육은 금세 셔벗과 같이 녹아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절로 눈이 찡그려질 정도의 차가움과 상큼함에 진겸은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다가 활짝 웃었다. 너무 맛있었다.
연신 입을 움직이며 볼을 복숭앗빛으로 발그레 물들이자, 수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전염됐다. 전에는 이런 모습 본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사람이 너무 변해서 그런가?
진우도 그렇지만, 진겸도 참 흥미로웠다.
수혁이 제 앞에 있던 셔벗을 쭉 밀었다.
“더 먹어.”
“감사합니다!”
그러자 원범도 제 앞에 놓인 셔벗을 진겸의 앞으로 옮겼다.
“먹어.”
“……감사합니다.”
눈치를 보던 진겸은 셔벗 그릇을 전부 제 앞에 놓았다.
진우의 것으로 나온 것이 녹아 가고 있어 그가 빨리 오길 바랐다. 원래 이런 건 시원할 때, 씹힐 때 먹어야 하는 거다.
진겸이 제 몫으로 나온 셔벗을 다 먹고 나서도 진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새 그릇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겸이 팔을 긁었다. 처음엔 가볍게 긁더니 점차 세게 긁기 시작했다. 긁는 소리가 원범과 수혁의 귀에도 들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긁으면서도 녹아 가는 셔벗을 먹었다. 자꾸만 긁자 원범의 시선이 진겸을 향했다. 그러다가 긁어서 붉어진 자국과 함께 피부에 일어난 오돌토돌한 것들이 보이자 원범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혁도 그걸 보고는 턱을 괸 채 물었다.
“알레르기 있어?”
“저한테요?”
“아…… 기억이 없지. 뭐 들은 거 없어? 계속 긁고 있잖아.”
수혁의 지적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한 진겸이 긁던 걸 멈췄다. 그래도 여전히 간지러워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더욱 심해지자 긁는 강도도 점차 올라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원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과 진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원범은 진겸의 옆으로 가더니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
“적당히 긁어.”
놀란 진겸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올려다보기만 했다.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손목을 잡는 건지.
원범을 보는 수혁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타인과의 접촉을 완전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백진겸과 닿으려고 하지 않았던 원범의 행동은 정말 의외였다.
그 와중에도 진겸은 온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긁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간지러운 게 다였는데, 점차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가빠지는 숨에 수혁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겸의 상태를 살폈다.
“진짜 알레르기 있나 본데?”
“하……, 하악.”
점차 호흡이 가빠졌다. 목이 부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숨쉬기가 버거웠다.
진겸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몸을 비틀었다. 하찮은 힘으로 바둥거리자 원범이 힘을 줬다.
“아파, 요!”
“…….”
“흐…… 학.”
점차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떨리는 속눈썹과 뒤로 꺾인 목이 두 사람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벌어진 입에서 거친 숨이 나오다가 말았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심장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수혁이 서둘러 차 키를 집고는 진겸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업을게.”
원범은 이제는 허리를 튕기며 몸을 떨어 대는 진겸을 수혁의 등에 업혔다. 계속 몸을 비틀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진겸의 등을 꾹 눌렀다.
막 나가려는 순간 진우가 들어왔다. 통화는 끝났지만 굳어진 표정을 풀기 위해 잠시 시간을 두고 들어온 거였다.
“……형?”
진우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수혁의 등에 업힌 진겸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드러난 피부에 보이는 것들에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입을 움찔거리고 있자 수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비켜.”
“왜, 왜 이래요?”
너무 떨려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겸이 아파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는 했어도 그때와는 달랐다.
“몰라. 저거 때문인 거 같은데. 얘 알레르기 있어?”
수혁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말했다. 진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진겸이 떨어지지 않게 지탱하며 그의 옆을 따라 달렸다.
“복숭아…….”
작은 소리였지만 수혁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런 건 미리 말해 줘야 얘도 조심할 거 아니야!”
“……복숭아 먹었어요?”
진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업혀 있던 진겸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아까는 움직일 힘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축 늘어져 있다. 간지럽고 괴롭고,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확 다가왔다.
그리고 진우의 다급한 소리와 함께 눈이 뒤로 까집어지면서 정신을 놓았다.
* * *
훈일은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진겸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연달아 검사하는 게 결코 좋은 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진우는 좀처럼 진정하질 못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했다.
진겸의 팔에는 또다시 두꺼운 링거 주사가 들어갔다. 수액과 함께 진정제가 투입되어, 부었던 목과 심하게 일어났던 피부는 점차 가라앉았다.
제일 걱정했던 심장 또한 다행히도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심박수가 느리긴 했으나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병실로 옮겨진 진겸의 옆에 힘없이 주저앉은 진우는 덜덜 떨리는 양손을 꽉 쥐었다.
아까는 정말 진겸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후 링거 바늘이 꽂힌 곳만 소매를 걷어 놓았는데, 드러난 피부에는 당시에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 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얇은 팔에 꽂힌 주사가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였다.
“하아…….”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을 준 진우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심장병에 대해 말해 주면서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고 알려 줬어야 했는데…….
당시에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빠트리고 말았다. 본인이 옆에 있을 테니 복숭아를 먹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더구나 알레르기가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다. 간간이 두드러기가 날 정도에 그쳤고, 알레르기 약을 먹으면 금방 가라앉을 정도로 증세가 약했다.
진우가 진겸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동안, 곁을 지킨 사람은 더 있었다.
원범과 수혁.
수혁은 차까지 진겸을 업었고, 뒷좌석에 태우자마자 바로 훈일이 있는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액셀과 브레이크를 거칠게 밟아 가며 운전해 본 적이 없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정말 꽉 막혔다. 작은 틈조차 주지 않는 차들 사이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난폭 운전이었다.
사고가 나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백진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훈일이 있는 병원이 멀지 않아서 고민할 것도 없이 이곳으로 온 거였다.
뒷자리에서 연신 진겸의 몸을 주무르면서 훈일과 통화를 하는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기억에 남은 건 없었다.
수혁이 팔꿈치로 원범의 팔을 툭 쳤다.
“넥타이 삐뚤어졌어.”
“…….”
가만히 침대 쪽을 응시하던 원범은 넥타이를 보지도 않은 채 손으로 몇 번 움직였다.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항상 반듯한 차림이던 원범의 흐트러진 모습에 수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대체 쟤가 뭐라고. 이렇게 여러 사람 넋을 빼놓는 건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수혁은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가 풀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오랜만에 긴장했더니 진이 빠졌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고개만 꺾었다.
진우는 침대에 두 손을 모은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 건지, 계속 몸을 떨어 댔다.
항상 탁 이사에게 쓴소리도 서슴지 않게 내뱉고 숙이는 기색을 좀처럼 보인 적 없는 진우의 약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깔짝깔짝하는 게 자꾸만 거슬렸다.
그게 진우에 대한 것인지, 진겸에 대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저 형제를 보고 있으면 그랬다.
원범도 소파로 와서 앉자 병실에는 기계 소리만 울렸다. 간간이 들리는 진우의 억누른 신음만이 허공으로 스며들 뿐이었다.
그런 고요함이 깨진 건 훈일이 병실로 들어오고 나서였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게 있어서 들른 거였다.
“진우야.”
“……응.”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진우의 약한 모습을 본 훈일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알레르기 반응이 심했던 거야. 심장에 무리가 갔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는데 괜찮았어. 이대로 충분히 쉬면 돼.”
“…….”
“네가 더 환자 같다. 가서 좀 누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파리해진 진겸의 얼굴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