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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2)화 (12/92)

12화

음식이 차례로 들어와 앞에 놓일 때마다 진겸은 냉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아직 고기는 나오지 않았는데, 앞에 나온 것들만으로도 배가 찰 것 같았다.

열심히 먹는 진겸을 옆에서 보고 있던 진우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제 손으로 만드는 음식을 먹이려는 이유가 식단 조절을 해야 해서였다.

병원에 다녀와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 같았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게 내심 걸려서 그나마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을 풀어 줄 심산으로 따라온 거였다.

무엇보다 ‘고기’라는 소리에 눈을 반짝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재수술을 앞둬,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먹게 하지 않았을 거다.

“맛있어?”

“응! 너도 얼른 먹어.”

해맑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린 채 양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어 씹는데, 그게 참 귀여워 보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너무도 행복해하는 진겸의 모습에 차마 그만 먹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은 괜찮아?”

“응?”

“계속 먹어서 배부르지 않아? 더 나오니까 천천히 먹어.”

“……아.”

진겸이 작게 소리를 냈다. 그제야 위가 작다는 게 생각났다. 아직 음식이 남기는 했지만 스테이크를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

자신에게 이런 식욕이 있었나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기는 좋아하지만 무언가 먹는 걸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은 너무 맛있었다.

확실히 최고의 조미료는 공복인 모양이다.

세 사람 앞에도 진겸의 것과 같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줄어든 건 별로 없었다.

특히 진우의 앞에 있는 접시는 처음 나올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속 진겸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제 막 퇴원했기에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원범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나마 수혁이 입에 넣고 있긴 했다. 그렇다고 맛있게 먹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음식이 입에 있으니 의식적으로 턱을 움직이는 듯했다.

진겸은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먹었다. 볼살도 별로 없어 씹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나타났다.

계속 먹으면 배부르다고 했는데도 맛있어서 포크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온 음식량이 적었다.

그러다 정수리가 따가운 듯해 진겸이 눈만 슬쩍 들어 올렸다. 마주 앉은 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시선이 얽혔다.

속눈썹이 펄럭일 정도로 빠르게 눈을 깜빡인 진겸이 눈동자만 옆으로 옮겼다.

“히끅!”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원범과 눈이 마주치자 놀라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에 몸을 움츠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원범의 오른쪽 눈이 움찔 떨렸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딸꾹질하게 만들어 버렸다.

옆에 있던 진우가 서둘러 진겸의 손에 물컵을 쥐여 줬다.

“괜찮아?”

진겸은 몇 번 더 딸꾹질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걸 알렸다.

가슴을 통통 치며 물을 마셨다. 맛있게 먹은 음식이 괜히 얹힌 느낌이었다. 진우가 챙겨 준 냅킨으로 입 주변에 묻은 물을 닦아 냈다.

진우가 진겸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딸꾹질은 금세 멈췄다. 더는 몸을 들썩이지 않았다. 그건 다행인데 괜히 몸에 무리가 갔을까 봐 걱정이었다.

“워치는?”

“어? ……어라?”

진겸은 허전한 제 왼 손목을 봤다가 오른 손목도 살폈다. 휑했다. 그러다가 아까 집 정리하면서 걸리적거려서 잠시 벗어 놨던 게 떠올랐다.

오전에 병원에서 나오기 전, 진우가 왼 손목에 워치를 채워 줬었다. 심장박동수를 측정하기 위해서 계속 차고 있으라며 신신당부했었다.

“아까 벗어 놓고 안 찼나 봐.”

“형…… 워치는 꼭 차야 해. 심장이 빨리 뛰거나 머리 어지럽고……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알겠지?”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 놀라서 그래.”

“……정말이지? 두근거리거나 어지러운 거 전혀 없어?”

“응. 진짜 없어.”

진우는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진 못했다.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진겸이 알아서 제 몸을 챙겼을 테지만, 지금 그는 자기가 아픈 것도 전부 잊어버려서 사소한 것조차 조심해야 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수혁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는 턱을 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저쪽이 형이고, 이쪽이 동생인 거 아니야?”

병원에서 실수가 일어나 두 사람이 바뀐 게 아니냐는 투였다.

겉으로 보기에도 진우가 형 같기는 했다. 하는 행동도 그랬다.

“신기하네. 기억은 없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건가? 보살핌 받는 게 굉장히 익숙해 보여.”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긴 했다. 진우야 원래부터 그랬으니 자연스럽게 행동한 거였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것치고는 진겸도 그의 챙김을 익숙하게 받고 있었다. 수혁은 그 점을 지적한 거였다.

그렇다고 하루 만에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기엔 진겸이 변한 건 아니었다. 어제와 같이 조금 어벙한 모습이었다.

수혁은 제 말에 잠시 멈칫한 진우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유심히 진우를 보다가 무언가 께름칙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느끼고 있었네.”

속으로 생각해도 될 말을 굳이 밖으로 내뱉었다.

진우의 고개가 수혁을 향해 돌아갔다.

“…….”

대답은 하지 않았다. 수혁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진겸은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성격도 바뀌었다. 항상 세상에 불만이 많던 전이랑은 달랐다. 밝아졌다. 그리고 원범에 한해서 겁도 많아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룸에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진우가 잘 챙겨 주긴 하죠.”

진겸은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딱히 칭찬은 아니었는데, 진겸이 너무 해맑게 웃고 있어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근데…… 다들 안 드세요?”

먹은 흔적이 있는 제 접시와는 다르게 세 사람의 것은 대부분 깔끔했다.

“먹는 걸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말, 이해 못 했는데…… 조금은 알 것 같네. 이런 거구나.”

“안 먹는데 어떻게 배가 불러요? 그거 헛배예요. 헛배!”

“헛배?”

“가짜로 부른 배라고요. 뭐든 먹어야 배가 차죠.”

그거 좋은 거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수혁이 실소했다. 말이 자꾸 통통 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무척이나 재밌었다.

수혁과 진겸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원범은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보다가 잘 구워진 양송이를 콕 찍어 먹었다. 씹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얼마 후 스테이크가 나왔다. 진겸이 열심히 자르는 동안, 진우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를 바꿔 주었다. 고기를 뒤덮은 소스는 칼로 긁어 옆으로 옮겼다.

“소스는 많이 찍지 말고 먹어. 오늘 자극적인 거 너무 많이 먹었어.”

진겸은 난도질당한 고기가 반듯하게 잘린 것과 바뀌자 멋쩍은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름 잘 자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이가 너무 심했다.

식단 조절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다른 대꾸는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슬쩍 시선을 옮겼다.

수혁과 원범의 스테이크는 나온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까 나온 것도 안 먹더니, 이럴 거면 왜 온 건지. 그래도 제 배는 불러 오고 있어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배부르면 억지로 먹지 마.”

“응.”

배불러도 고기니까 먹을 생각이었던 진겸은 괜히 찔렸다.

미디엄 레어로 구워 달라고 했더니 너무 부드러웠다.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천천히 씹다가 사르르 녹아 버린 스테이크에 이내 하나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숙성이 제대로 된 건지, 소스를 찍지 않아도 간이 맞았다. 게다가 굽기는 또 얼마나 잘 구웠는지 씹으니 안에 갇혀 있던 육즙이 주르륵 흘렀다.

자신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스테이크가 식기 전에 먹어야 했다.

아까 진우 말대로 덜 먹을 걸 그랬나 보다. 아직 반도 안 먹었는데 배에서는 더 넣지 말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속도가 느려지자 진우가 슬쩍 웃었다. 스테이크를 바라보는 진겸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형.”

“……응.”

진우가 뭘 말할지 눈치챈 진겸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수혁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왜? 더 안 먹어?”

접시에 반이나 남은 고기를 보며 묻자 진겸이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배불러서요…….”

“……그거 먹고?”

아무리 코스 요리라지만 성인 남성이 먹기에 넉넉하진 않았다. 더구나 진겸이 먹었던 접시의 음식이 많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원래 많이 못 먹어요.”

빙의된 지 이틀째라서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반 정도 먹으면 배불렀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양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배부르기 전에 디저트 달라고 해야겠네.”

다들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디저트를 주문했다.

수혁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형제끼리 우애가 좋으면 충분히 서로를 챙길 순 있다.

더구나 백진겸의 몸이 약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건강한 진우가 챙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가족이어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꽤 많다. 하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두 사람의 관계는 불명확했다.

백진겸의 태도만 보면 사이가 좋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진우를 보면 그건 아니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성이 적은 것도 아닌지라 놀랍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면 확실히 재밌긴 했다.

더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 않는 원범까지 저 사이에 끼어 있어, 수혁의 관심을 끌기엔 너무 최적의 조건이었다.

디저트 먹을 생각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진겸이 입꼬리를 올린 채 룸 이곳저곳을 살피는 동안, 진우의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진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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