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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1)화 (11/92)

11화

두 사람 뒤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5시인데도 대낮처럼 환했다.

어제는 흐릿한 구름이었는데, 오늘은 뭉게구름이다. 폭신폭신해 보이는 새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옥상이라 그늘이 없어서인지, 따가운 여름 햇볕이 머리 위로 고스란히 내리쬐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세 사람은 살짝씩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수혁은 자신을 보는 진겸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보네.”

“안녕하세요.”

진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원범을 보다가 어깨를 흠칫 떨고는 진우의 뒤로 숨었다.

원범은 자신을 보자마자 꼬리를 말고 숨어 버린 진겸의 행동에 눈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한 게 없건만 어제부터 겁을 먹고 있다. 어제는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도 저러니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라지만 안 그러던 백진겸이 저러니 더 기분이 이상했다.

수혁에게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으면서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진우 뒤로 숨은 것도 언짢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거슬렸다.

진우는 등을 바짝 세워서 진겸을 완전히 숨겼다. 재킷 허리춤을 잡은 하얀 손과 밑에 보이는 다리만이 진겸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렸다.

원범이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기억도 잃었다면서 날 왜 무서워하는 거지?”

그 물음에 답은 수혁에게서 나왔다.

“네가 무섭게 생겼잖아. 보자마자 인상 쓰는데 안 무섭겠어?”

수혁의 말이 사실인지라 원범은 이해했다는 듯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들이 제 앞에 서면 누구 할 것 없이 쭈그러들었다. 오히려 기죽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는 진우가 특이한 거였다.

원범의 눈빛이 변하자 진우가 팔을 뒤로 뻗어 진겸을 잡았다. 본능적이었다.

손에 잡히는 얇은 팔로 진겸이 뒤에 있다는 게 느껴졌다. 기억을 잃은 후로 겁이 많아진 듯했다.

깊이 고민하기에 앞서, 두 남자를 치우는 게 먼저였다.

퇴근 직전에 찾아온 선 이사는 진겸이 괜찮은지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꽤 진심인 양 굴었다.

귀찮은 걸 달고 오고 싶지 않아 거절하고 퇴근하려던 참에 이사실에서 나온 원범 또한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들이 궁금해하든 말든 칼같이 잘라 냈으나 이어진 원범의 말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내가 후원하는 환자도 직접 못 보나? 괜찮은지 확인을 해야 후원자로서 안심하지 않겠어?]

정말 싫었지만 그놈의 후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온 거였다.

“이제 보셨으니 가시죠.”

“어제부터 못 쫓아내서 안달이네.”

무표정한 얼굴로 진겸을 보던 원범이 시선을 진우에게 옮겼다.

원래 백진우의 성격은 살갑지 않다. 그가 유해지는 건 백진겸에게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독설을 날리는 냉정한 성정을 가졌다.

그런 진우의 성정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아무리 고용주여도 집까지 찾아온 불청객에게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진우는 삐딱한 투로 물었다.

“뭐, 냉수라도 드릴까요?”

“좋지.”

“……진짜 드신다고요?”

“어. 나 냉수 좋아해.”

말을 마친 원범이 진우를 지나쳐 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머리를 까딱거리며 문을 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설마 진짜 달라고 할 줄은 몰랐던 진우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수혁도 안쪽으로 들어와 문 옆에 섰다. 문이랑 키가 비슷한 남자 둘이 서자 집이 더 작아 보였다.

진우의 뒤에서 귀만 활짝 연 채 대화를 듣고 있던 진겸은 제 뒤쪽으로 이동한 두 사람을 보다가 쥐고 있던 옷을 당겼다.

“집에 물도 없던데?”

“아…… 형은 차가운 거 안 좋아해서 항상 밖에 놔. 화장실 문 옆 선반에 있는데 못 봤어?”

진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의 눈이 찌푸려졌다.

“나 가고 나서 먹은 게 있긴 해?”

“……아니.”

뭘 안 먹은 게 잘못한 것은 아닌데 혼나는 기분이었다.

진겸이 입술을 모으더니 점점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래서 지금 사러 가려고 한 건데……. 웅얼거리는 말에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고는 두 사람을 봤다.

“냉수는 다음에 드릴게요.”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지.”

“……괜찮습니다.”

원범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 같은 거절이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진겸에게 향했다.

“저쪽은 배고파 보이는데.”

다들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진겸의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이미 몇 차례 울렸다.

어제부터 자꾸만 민망한 상황을 만드는 배를 움켜쥔 진겸이 진우의 등에 머리를 콕 박았다.

‘……쪽팔려.’

진우도 그 소리를 들었기에 두 사람을 얼른 보내고 저녁을 할 생각이었다.

“따로 먹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고기 사 줄게. 너 고기 좋아하잖아.”

원범의 말에 반응한 건 진겸이었다. 묻었던 얼굴을 퍼뜩 들더니 반짝거리는 눈으로 원범을 바라봤다.

너무 즉각적인 반응에 원범의 오른쪽 눈이 움찔거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수혁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보는지 어쩐지는 상관 않고 진겸은 원범의 입에서 나온 ‘고기’라는 단어에 꽂혀 반짝이는 눈빛으로 정말 사 주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어제오늘, 눈만 마주치면 바로 고개를 돌리던 진겸이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자 원범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진우를 꼬시려 했던 건데, 이상한 게 걸렸다. 그래도 같이 올 테니 나쁜 건 아니었다.

“가지.”

* * *

차가 없는 원범을 대신해 운전을 한 건 수혁이었다. 그는 옆에 원범을 태우고 뒤에는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을 폴폴 풍기는 진우와 고기라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 눈을 반짝이는 진겸을 태웠다.

가는 동안 차 안에는 라디오 소리만 흘러나왔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도착한 곳은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이었다.

아직 저녁 시간이 아니어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예약석이었다.

예약은 하지 않았으나 수혁을 알아본 지배인이 능숙하게 안내했다.

고기 먹는다길래 고깃집에 갈 줄 알았던 진겸은 레스토랑에 오자 진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우는 제 곁에 착 붙어서 움직이는 진겸을 잘 이끌고 뒤를 따랐다.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받은 뒤, 자리에 앉은 진겸은 비장한 얼굴로 메뉴판을 쫙 펼쳤다.

‘비, 비싸…….’

고깃집은 1인분에 2만 원 정도면 나름 비싸게 먹는 건데, 여긴 그 몇 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차마 고를 수가 없어서 눈치를 살피는데 원범과 수혁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았다.

진우도 원범에게 강제로 몇 번 끌려와 봐서인지 메뉴판을 보고 있는 진겸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졸지에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번에 받게 된 진겸이 조심스레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고기를 먹고 싶긴 했는데 이렇게 비싼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너무 낯설었다. 잠시 저 두 사람이 회사 임원이자 재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삼겹살을 먹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고기 먹자면서 이렇게 비싼 곳으로 오다니.

“뭐 먹을래?”

수혁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겸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없어? 아깐 되게 먹고 싶어 하더니.”

“……아저씨는 뭐 드실 건데요?”

“……뭐?”

수혁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뭐 드실 거냐고요.”

“아니, 그 앞에.”

“아저씨요?”

“……내가 아저씨로 보여? 이 얼굴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하는 수혁은 정말 당황한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원범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옆모습이 보여 올라간 입꼬리가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진우도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매를 꾹 닫았다.

진겸만 영문을 몰랐다. 《그레이》를 봤기에 주인공들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나이 차이면 아저씨가 제대로 된 호칭이라고 생각해서 그리 부른 거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형이라는 좋은 단어를 놔두고 왜 아저씨가 튀어나왔을까?”

“그러기엔 우리 나이 차이가…….”

수혁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튀어나온 진겸의 말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항상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수혁이 당황하는 모습은 원범도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주변에서 치켜세우는 말만 듣던 녀석에게 진겸이 이런 식으로 한 방 먹일 줄이야.

더 심한 말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던 수혁이 이리 반응하는 것도 새로웠다.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아주 조금씩 믿음이 갔다.

“우리 나이 차이가 왜? 여덟 살 차이면 많지도 않은데.”

“많지 않다뇨? 많죠. 제가 태어날 때 아저씨는 초등학생이었잖아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차이가 나긴 한데…….”

“아저씨가 성인 됐을 때 전 초등학생이었고요.”

진겸은 악의 없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한 거지만, 수혁에게는 확인 사살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타격은 옆에 있던 원범에게도 갔다.

진우와의 나이 차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레 뒤통수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졸지에 아저씨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입이 꾹 다물렸다.

조용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킨 건 주문을 받기 위해 들어온 지배인이었다.

수혁은 당황했던 모습을 지운 채 오늘의 추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어차피 메뉴는 똑같으니, 추천 코스로 하는 편이 새로운 걸 먹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배인이 나가고 나서도 방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진겸은 그런 분위기에서도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살폈다.

마주 앉아 있는 수혁, 그 옆에서 진우를 응시하고 있는 원범, 자신을 향해 살짝 몸을 틀어 앉은 진우까지.

병실에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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