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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9)화 (9/92)

9화

백진겸이 악역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플 필요는 없었을 텐데…….

수술한 건 어릴 때라고 했다.

성인도 아픈데,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흉터를 가리기 위해 목이 파인 옷은 입지 않는다고 서술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옷은 대부분 목이 답답할 정도로 위로 올라왔다고.

지금 갈아입을 옷도 그랬다. 목에 달라붙는 라운드 티와 얇은 조끼였다.

조심스레 흉터를 쓸어내렸다. 오돌토돌한 느낌이 너무 생소했다. 거울 속에 있는 진겸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살펴본 핸드폰에는 랜덤 채팅 앱이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과 나눈 메시지를 보고 나서 느낀 게 있었다.

외로웠구나.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건강한 진우를 보며 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꼈기에, 더욱 그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고 제 병원비와 생활비 전부를 그가 감당하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게 정당하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까.

충분히 빛날 수 있었을 사람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기서 계속 거울을 보고 있다간 감정의 늪에 빠질 것 같아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훈일은 진겸이 옷을 갈아입는 틈에 진우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뭘?”

“뭐긴 뭐야, 심리 치료! 얘기 안 해 봤어?”

“했어. 진겸이가 하기 싫대.”

치료를 거부한다는 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건만, 진우가 웃으며 말하자 훈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상한 생각인 것 같은데……. 어쩐지 진우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훈일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걸 지우곤 다시 물었다.

“어쩌려고?”

“우선 지켜봐야지.”

“……생각 바뀌면 연락해. 상담 잡아 놓을게. 그리고…… 웬만하면 설득해 봐.”

“진겸이가 싫다는데 강요할 생각 없어. 한다고 하면 그때 할게.”

훈일은 무언가 찝찝하기는 해도 본인이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는 권하지 않았다.

이제 막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어린애도 아니니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 진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돌아갔다.

진우는 문 앞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진겸이 치료를 원한다면 기꺼이 받을 수 있게 최선을 다했을 거다. 이건 어디까지나 진겸이 하지 않겠다고 한 거지. 자신이 강요한 게 아니었다.

어쩐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 눈빛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병실 문을 열자 옷을 갈아입은 진겸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형, 우리 집에 가자.”

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 * *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진겸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빙의했다고 해서 바뀐 건 없었다. 자신이 살던 곳과 똑같았다.

딱 붙어 밖을 구경하는 모습에 진우가 슬쩍 웃었다. 전에는 같이 있을 때 이렇게 웃음이 나온 적이 없었다. 고작 하루인데, 한 달 동안 웃을 걸 다 웃은 듯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렸는데도 진겸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세대 주택과 신축 오피스텔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 건너편에 사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만큼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형.”

진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이쪽이야.”

진우가 어서 오라며 대문을 열었다.

절반이 녹슬어 버린 대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 페인트칠이 벗겨질 정도였다. 그 때문에 조금 음산한 느낌도 들었다.

도착한 곳은 다세대 주택 옥상이었다. 작은 크기의 옥탑방. 이곳이 바로 백진우, 백진겸의 집이었다.

“와…….”

택시를 타고 올 때도 오르막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지대가 높았다. 주변에 있는 집들이랑 비슷한 높이였지만 아래로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진겸이 연신 감탄하자 진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딴 것도 집이냐며 매번 짜증을 냈던 진겸이 유일하게 좋아하던 것도 탁 트인 전망이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같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진겸이 방긋 웃으며 진우의 옆에 섰다.

“왜 안 열어?”

“구경하길래 나도 보고 있었어.”

“근데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회사 가야 하잖아.”

“……아.”

진우의 입에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병원에서 아침밥을 나눠 먹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한 날이었다. 더구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연차였기에 종일 진겸과 있을 계획이었다.

오전에 울린 전화벨 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급격히 다운된 기분에 억지로 웃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진겸의 눈에 낡은 열쇠고리가 보였다.

예전에 유행했던 네 잎 클로버가 안에 든 모양의 아크릴 소재 열쇠고리였는데, 저 정도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갈라지고 스크래치가 가득했다.

문을 연 진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비켜났다. 겉으로만 봐도 얼마나 허름한지 알 수 있는 집이었다. 그래도 형제의 유일한 보금자리임은 맞았다.

진우의 옆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 여섯 켤레를 가지런히 놓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현관이었다. 옆에 낡은 신발장이 존재했지만 그 안도 꽉 찬 건지 주변에 신발과 신발 상자가 가득했다.

이 좁은 집에, 그것도 두 사람만 사는 곳인데 왜 이렇게 신발이 많나 싶어 보니. 몇 켤레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사이즈가 작았다. 딱 봐도 누구 건지 알 수 있었다.

백진겸.

진우의 것으로 보이는 건 낡은 운동화와 구두 두 켤레가 다였다.

진겸이 신발 더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 진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안 들어가?”

“……이거 다 내 거야?”

“응. 왜?”

“……네 건 몇 켤레 안 보여서. 나 신발 장사해?”

너무 뜬금없는 질문에 진우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항상 미소만 짓던 진우가 큰 소리로 웃자 진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터진 걸까?

진우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니. 그냥 취미야.”

“취미가 참 사치스럽네.”

돈이 많다면 모를까. 집안 사정 빤히 아는데도 이렇게 생활했다는 건 정말 철없는 행동이었다.

진겸은 짧게 혀를 차고는 신발을 벗었다. 이미 가득해서 놓을 곳이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올려놨다. 나중에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집 안은 깔끔했다. 옥탑방이라서 곰팡이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싱크대 주변도 깨끗했다.

꽤 신경 써서 관리한 티가 났다.

“방은 어디야?”

“거기가 형 방이야.”

“……내 방?”

불투명한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기준으로 거실과 방이 나뉜 모양이었다. 열려 있는 틈 사이로 보이는 방은 정신없고 지저분했다. 그래서 창고인 줄 알았다.

약간 삐걱거리는 문을 옆으로 밀자 침대 위만 깨끗하고 발 디딜 틈 없이 물건이 가득 쌓인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방이구나. 내가 청소를 싫어했나 봐.”

“짐이 많아서 그래. 나름대로 잘 정리한 거야.”

진우는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지만, 진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잘 정리했다는 건지.

진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방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리 저기서 같이 자?”

아무리 봐도 잘 곳은 침대뿐이다.

소설 속에서도 진우가 집에 갔다는 내용은 있어도 자세한 묘사는 없었다. 대부분 탁원범과 부딪치다 보니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이 주를 이뤘다. 가끔 선수혁과 백진겸이 등장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옥탑방에 산다는 것도 나와 있었을 테지만 그냥 스치듯 읽어서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진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난 여기서 자.”

“어디?”

“여기.”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좁디좁은 거실 겸 주방이 진우의 방이었다.

한쪽에 접힌 상과 이불, 책장도 없이 쌓인 책과 노트도 보였다. 나무로 만든 낡아 빠진 연필꽂이가 제일 위에서 책 더미를 누르고 있었다.

좁은 집이다. 그 속에서 문 하나를 두고 빈부격차를 느끼게 될 줄이야. 백진우는 백진겸에게 이렇게까지 해 줘야 했나? 지금은 제 몸이 되었으니 이런 불합리한 일은 절대 안 된다.

어디까지나 이 집의 가장은 진우다. 그가 편히 쉬어야 하는 공간이건만 진우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결코 편한 삶을 살지 못한 거였다.

진겸은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0분.

지금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진우를 빨리 내보내고 그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진겸이 비장한 얼굴로 진우를 올려다봤다.

“출근해야지?”

“……어?”

진겸은 방 안으로 들어가 이중으로 되어 있는 행거를 살폈다. 화려한 옷들 사이에서 정장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딱 봐도 백진겸의 옷만 걸려 있었다.

“진우야. 옷 어디 있어?”

“옷 갈아입게? 거기 있는 거 다 형 거야.”

“아니, 내 거 말고. 출근하려면 정장 입어야 하잖아.”

정말 출근시킬 작정인지 옷을 살피는 손이 빨랐다.

멍하니 서 있던 진우가 거실 한쪽에 있는 비닐로 된 접이식 옷장을 힐끗 봤다. 저 안에 있다는 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안에서 찾지 못한 진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거야?”

“……응.”

열어 보니 진우의 옷이 걸려 있었다. 역시나 안쪽에 있는 백진겸의 옷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양이 적었다.

방 안의 행거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기세로 가득가득 차 있는 데다가 걸지 못한 옷도 많았다. 그에 비해 거실의 비닐 옷장은 너무도 휑했다. 단벌 신사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진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짧게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뒤에서 진겸이 하는 걸 지켜보던 진우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집 이곳저곳을 살피는 진겸의 얼굴에서 못마땅함을 읽어서였다.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라도 진겸이 여기서 살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호텔이라도 예약해야 하나?

진우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옷을 다 살펴본 진겸이 물었다.

“저 안에 있는 거 전부 백진겸 거야?”

“……응. 형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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