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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8)화 (8/92)

8화

빤히 보고 있자 진겸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안녕.”

이제 막 깨어나 멍한 와중에도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진우는 가슴이 울렁여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떨리는 눈이 가늘어지자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왜 울어?”

“……안 울어.”

“아닌데. 우는데…….”

잠이 덜 깬 진겸이 웅얼거리면서 진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자 힘을 줘 당긴다. 졸지에 허리가 굽혀진 진우가 진겸과 가까워졌다.

괜찮은 거리라고 생각했는지 잡았던 손을 진우의 뺨으로 옮겼다.

“……울지 마.”

“……응. 그럴게.”

진겸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오더니 어느새 굳게 닫혔다.

진우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감고 싶은데, 진겸의 풀린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라 눈을 뗄 수 없었다.

뺨에 닿은 진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너무도 작고 마른 손이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 한참 동안 쥐고 있었다.

진겸이 일어난 건 병원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가 도착하고 나서였다. 더 자려고 하던 걸 진우가 깨웠다.

반쯤 졸면서 밥을 먹던 진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만 먹어?”

“원래 병원 밥은 환자 것만 나와.”

“그럼 보호자는 뭐 먹어?”

“나가서 사 먹거나 도시락 먹어.”

진겸은 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먹던 부분을 젓가락으로 잘라 내 밥뚜껑에 옮겨 담았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 필요한 거 있어?”

“아니. 화장실 좀.”

젓가락을 손에 쥔 채로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서 젓가락을 꼼꼼하게 닦은 후 묻은 것이 있나 없나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깨끗했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진우는 금세 나온 진겸을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자 진겸이 활짝 웃으며 진우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진우는 물 묻은 젓가락을 보면서 눈을 껌뻑거렸다.

“같이 먹자.”

“……어?”

백진겸은 혼자서 밥 먹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같이 먹지는 않아도 밥을 먹는 동안 그의 시야에 들어와 있어야 했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먹는 걸 보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같이 먹자고 할 줄은 몰랐다.

진우가 젓가락만 보고 있자 진겸이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나 많이 못 먹는다면서. 진우가 먹기엔 양이 부족할 거 같은데…… 그래도 남기는 것보단 낫지!”

웃으며 말하던 진겸이 슬쩍 문 쪽을 흘겨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이거 맛없어…….”

아무래도 병원 밥에는 약간의 간만 되어 있을 테니 진겸의 입맛에 맞지 않았으리라. 그래서인지 항상 맛없다고 밖에서 사 오라고 했고 남는 병원 밥은 진우가 먹고 반납하는 일도 많았다.

음식을 남길지언정 같이 먹자고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진우는 그의 변화가 좋은 반면 무섭기도 했다.

언제 기억이 돌아와 변할지 모르니까.

진우는 자신을 위해 젓가락을 닦아 온 정성을 보인 진겸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던 진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먹던 거라 싫어?”

“어? 그런 거 아니야. 난 남은 거 먹어도 돼.”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텐데 같이 먹어. 음식 남기는 거 아니야.”

진우는 젓가락을 꽉 쥐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억을 잃은 진겸은 이전 같지 않았다.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방금도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말, 예전 같았다면 ‘내 돈 주고 먹는 거 남기면 어때?’라고 했을 거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는 몰라도 그 전까지는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가 걱정되긴 했지만 자신에게 친절한 모습에 더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세를 바르게 한 진우가 젓가락을 제대로 쥐었다.

“내가 반찬 올려 줄게.”

“응? 아니야. 나 먹을 수 있어. 이거 봐.”

숟가락 끝에 반찬을 걸치듯 들어 올려 재빨리 입에 넣은 진겸이 오물오물 씹으며 웃자 진우도 덩달아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먹던 것에 비해 양은 적지만 마음만큼은 풍족했다.

식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양 비서였다.

진우는 고민하다가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에 받았다.

“여보세요?”

― 백 비서! 나 좀 살려 줘!

연결되자마자 양 비서의 큰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새어 나왔다. 다짜고짜 살려 달라고 하는 통에 옆에 있던 진겸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우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세요?”

― 탁 이사……님이 백 비서 없으면 회의에 참석 안 하시겠다고 난리야. 오늘 임원 회의라 꼭 참석해야 하는데…….

“……저 오늘 연차인 거 알고 계시죠?”

― ……아무렴. 내가 모를까.

양 비서의 목소리에는 탁 이사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건 양 비서의 잘못이 아닌 탁 이사의 억지라는 걸 알기에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가 회의에 참석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었다. 그거 좀 빠졌다고 그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건 아니니까.

문제는 불참석한 이유가 ‘비서가 없어서’라고 한다면 뒷수습은 비서들이 해야 한다는 거였다.

진우는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회의 2시였죠?”

― 응. 2시!

“1시 30분까지 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 진짜지? 나 진짜 백 비서 온다고 말씀드린다?

“……예.”

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것도 아닌데 병실이 조용한 탓에 전부 들렸다. 한숨을 푹 내쉬는 진우의 팔을 톡 건드린 진겸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할까?”

“어?”

“이거 상사 갑질이잖아! 엄연히 쉬는 날인데!”

“아…….”

진우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보기만 하자 진겸은 당장 연락해야 한다며 고용노동부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연차를 쓴 이유는 백진겸의 병원 진료 때문이었다. 연차가 생긴 이후, 쉬고 싶어서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그를 위해 사용했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진겸의 반응이 새로워 어안이 벙벙했다. 꼭 백진겸의 탈을 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이제 막 찾은 전화번호를 가렸다.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음만이라도 고맙다고 말한 진우는 뚱해 보이는 진겸의 표정에 멈칫거렸다. 혹시 자신이 핸드폰 화면을 가려서 그런 건가 싶어 서둘러 손을 거뒀다.

“미안.”

“뭐가?”

“핸드폰 가린 거…….”

정말 미안해하며 눈치를 보는 진우의 모습에 진겸의 표정이 더 뚱하게 변해 갔다. 그에 진우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진겸은 그런 진우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아무리 백진겸에게 당하고 살았다지만 반응이 너무 심상치 않았다. 확실히 저자세였다.

만약 계속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어쩌면 백진겸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백진겸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건 아니다. 상대방이 저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낮잡아 보는 건 옳지 않은 거니까.

정확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면 진우가 땅 파고 들어갈 것 같아서 이내 말을 이었다.

“화면 가린 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하루 이틀도 아니라는 말이 기분 나빠서 그런 거야. 아무리 비서라지만 쉬는 날에는 쉬게 해 줘야지! 요즘 같은 세상에 직원 막 부려 먹으면 안 돼!”

말을 하면서 감정 이입이 된 진겸은 주먹을 꽉 쥐고 이불을 퍽 내리쳤다. 하찮은 힘에 이불이 구겨졌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더 내리치다가 혼자 흥분한 것 같아 살포시 손을 거뒀다.

괜스레 민망해져 헛기침하고는 눈동자만 굴려 진우를 살폈다. 그의 왼쪽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왜?”

“……좋아서.”

나지막이 말한 진우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활짝 웃는 것도 아니고 살짝 웃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행복해 보였다.

진우가 웃자 진겸도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힘들면 고용노동부에 꼭 신고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신고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겸은 어제 핸드폰 잠금을 풀고 나서부터는 이것저것 알아본다며 손에서 놓질 않았다. 패턴이 아닌 지문이라서 큰 무리 없이 풀 수 있었다. 깔린 앱도 확인하고, 누군가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확인했다. 진겸은 바빴다.

그런 진겸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은 봄날의 햇살처럼 너무도 따스했다.

잠결에 자신에게 울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마 기억이 돌아와 원래의 백진겸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거다.

방금도 제게 짜증을 낸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화를 낸 것이라는 사실에 또 가슴이 몰랑몰랑해졌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백진겸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가끔씩 보이는 친절이 한줄기 단비 같았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 * *

오전 진료를 끝낸 훈일이 병실로 찾아왔다. 진겸을 한 번 더 살펴본 후 퇴원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병원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왔다 갔다 하면서라도 볼 텐데 기어코 퇴원하겠다고 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거였다.

진겸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끼리인데도 괜스레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제 몸이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화장실로 들어와 병원복 상의를 벗다가 무심코 본 흉터에 진겸의 움직임이 멈췄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보이는 흉터는 꽤 길었다.

세면대 앞으로 가 거울을 통해 본 몸은 말라깽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가슴 중앙에 길게 있는 붉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수술 자국.”

어제 진우에게 들었다. 수술했다고.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흉터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몸에 유일한 붉은 곳이었다. 게다가 재수술이라니.

진겸의 눈썹 끝이 아래로 처졌다.

“아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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