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넓어진 침대에 진겸이 다리를 쭉 뻗었다. 작게 나온 배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자 정리를 끝낸 진우가 병원 로고가 새겨진 봉투를 들고 와서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형.”
“네? 아니, 응?”
“……할 말이 있는데.”
말하라는 듯 진겸이 그를 응시했다. 진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봉투를 진겸의 다리 위에 올렸다.
“기억은 안 나겠지만…… 형 몸이 좀 약해.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지레 겁을 먹을까 봐 서둘러 말을 붙였다. 하지만 관리를 하지 않으면 모든 병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몸이 약한 백진겸은 더욱더.
“아…… 이거 말고 우리 얘기 먼저 해 줄까? 그게 낫겠다.”
“좋아요!”
진겸은 좋아하는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우를 봤다. 우리 얘기라니.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 흥미진진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우린 쌍둥이야. 이란성이라서 형이랑 나랑 다른 부분이 많아. 체격 차이도 좀…… 심하고. 형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어. 지금도 좋진 않은데, 그래도 많이 좋아져서 생활하는 덴 문제없어.”
진겸은 진우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족은 형이랑 나, 둘이야.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어. 나는 비서로 일하고 있고, 아까 봤던 이사님이 형 병원비를 지원해 주고 계셔. ……고마운 분이지.”
고맙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었다. 진겸은 모르는 척하며 웃었다.
“우리 생일은 12월 3일이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태어났어. 어릴 땐 형이랑 나랑 떨어지질 않아서 많이 힘드셨대.”
진우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 줬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주인공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행복했던 시절뿐이었다. 진겸이 알고 있는 과거는 말하지 않았다.
진우의 과거는 《그레이》에서도 짧게 언급됐다. 아픈 형에 가려져 부모의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며 자랐고, 집안 빚을 갚느라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삶은 결코 진우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불행하다 할지언정 진우 본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겸도 그걸 알기에 의아하기는 했어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워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웃으며 말하던 진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그에 진겸도 올렸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초등학교 때 형이 폐렴에 걸린 적이 있었어. 그때 좀 많이 안 좋아져서…….”
두 사람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백진겸이 처음으로 쓰러졌다.
검사 결과는 선천성 심장병.
이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통증을 느끼면서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백진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야 했고, 밖에서 노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모의 관리 아래 철저히 고립되어 갔다.
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백진겸보단 자유로웠다. 그런 진우에게 백진겸이 같이 놀자고 했지만, 그는 나가서 노는 걸 택했다.
점차 두 아이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 독감이 유행일 때 진우가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같은 집에 있었던 백진겸도 덩달아 걸렸는데 몸이 약하다 보니 그게 심해져 폐렴으로까지 이어졌다.
심장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심각한 상황까지 갔고, 상태를 지켜보느라 미루고 있던 심장 수술을 앞당겨서 겨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진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수술……했어.”
당시에 자신이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면 백진겸이 폐렴까지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을 탓하던 부모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윙윙거렸다.
목이 턱 막혔지만 제일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심장 수술인데.”
“아…… 심장.”
“응. ……그래서 좀 조심해야 해. 완치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진겸이 무릎을 당겨 안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상관없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진우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가 백진겸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던 백진우가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진겸이 천천히 손을 뻗어 진우의 머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아래를 보고 있던 진우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팔이 짧네…….”
머쓱하게 웃으며 몸을 더 앞으로 숙여 진우의 머리 앞쪽을 살살 쓰다듬었다.
“무리하지 말고 건강하게 살면 되는 거네. 그치?”
“……응.”
진겸이 말간 눈으로 바라보자 진우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문득 진겸이 기억을 찾으면 저 웃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겸은 자기 몸이 약한 이유가 백진우 탓이라고 말하곤 했다. 배 속에 있을 때 그가 영양분을 다 가져가 제 몸이 약한 것이고, 감기에 걸려 와서 자신이 폐렴에 걸려 심장 수술을 앞당기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모두 백진우 탓이라고 말했다.
또 그런 말을 들을까 봐, 차마 진실을 전부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겸아.’
속으로만 수만 번 불러 본 백진겸의 애칭.
언젠간 그와 마주 보고 웃으며 불러 봤으면 싶었다.
예전처럼.
진우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더 힘을 줬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여기 안에 주의해야 할 점들이 적혀 있어. 내가 옆에서 알려 주겠지만 그래도 읽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진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가 크길래 안에 책이라도 들은 줄 알았는데 종이 몇 장이 다였다.
“……대동맥판막 협착증?”
너무 생소한 병명이었다.
백진겸에게 심장병이 있고, 몸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작에서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심장이 아프면 그냥 다 심장병인 줄 알았는데 안내지에 적힌 정확한 병명을 보고 나자 그제야 심각성이 와닿았다.
입술을 쭉 내밀고 주의 사항을 읽어 내린 진겸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제 몸이 되었으니, 아프다니까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여기서 잘 살아 보겠다고 했던 생각이 조금 바뀌는 순간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속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에 적힌 것만 잘 지키면 돼?”
“어렵진 않을 거야. 지금껏 잘해 왔으니까…….”
“이 정도야, 뭐.”
식단 조절은 종이에 나와 있는 음식들을 최대한 안 먹으면 되는 거였고, 적절한 운동을 꾸준히 하면 되었다. 예시로는 30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나와 있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조심해야 할 게 은근 많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몇 개만 주의하면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었다.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어서 겉면을 툭툭 쳤다. 고개를 드니, 진우가 아직도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
“……사실 재수술이 얼마 안 남았어.”
“……어?”
오늘 빙의했는데 수술이라니?
진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당황한 그의 얼굴을 본 진우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급한 게 아니라면 진겸이 적응할 수 있게 차근차근 알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진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한 달 후야.”
“……아.”
도대체 이 시점이 원작 어디쯤이길래, 수술을 한 달 앞두고 빙의된 거지?
혹시 백진겸이 수술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갔고, 그때 자신이 빙의한 걸까?
진겸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입술을 삐쭉거렸다.
이왕이면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안 되는 건가? 그런 거 많던데. 시한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던가.
벌어지지 않을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상상해 봤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가 갑자기 심각해져 버렸다.
진겸은 대충 쥐고 있던 봉투를 꽉 잡았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 놔야겠다.”
“내가 챙길게.”
“응. 고마워.”
진우가 봉투를 가져가자, 진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와 다르게 창밖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실이 밝아서 그런지 밖이 보이기보다는 병실 내부가 비쳤다.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과 캐비닛 앞에 선 진우.
혼란스러울 텐데도 꽤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진우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도.
방금까지만 해도 수술이라는 것 때문에 기분이 착잡했는데, 다시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꿈속이나 환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겸은 다가오는 진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리 여기서 자?”
“응. 내일 오전에 퇴원하니까 답답해도 좀 참아 줘.”
딱히 답답한 게 없어서 진겸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 * *
간드러진 피아노 연주가 조용한 병실에 울렸다.
익숙한 소리에 깨어난 진우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더듬거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껐다. 연차이건만 꺼놓는 걸 깜빡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어제 긴장을 많이 했더니 몸이 뻐근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자는 진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을 조금 벌리고 색색거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백진겸이다.
아직도 어제 벌어진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일어났을 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어제 보여 주었던 모습을 다신 못 본다면 그건 좀…… 쓸쓸할 것 같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어 주던 얼굴과 먼저 손을 뻗어 주었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고작 하루,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귀하고 좋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될 만큼.
이기적인 마음인 걸 알지만 아주 잠깐만…… 정말 잠깐만 이대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