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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3)화 (3/92)

3화

진겸은 믿기 힘든 현실에 눈만 끔뻑거리다가 다시 앞에 선 남자를 봤다.

정말 이곳이 《그레이》 속이라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저 남자가 백진우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 종국엔 제 품에서 살게 만드는, 감정이 결여된 메인공 탁원범일 게 분명했다.

‘진짜 잘생겼는데…… 무서워!’

계속 보고 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눈을 옆으로 옮겼다.

‘그럼 이 사람은…….’

훈일이 이름을 불렀기에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선수혁.

그는 탁원범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로 속내를 감추며 백진우에게 접근하지만, 자업자득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비운의 서브공이다.

작중 선수혁의 외모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다. 그냥 서글서글하다고만 표현되어 있었다. 실제로 마주한 그는 꽤 좋은 인상이었다. 웃는 눈매가 고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겨 빤히 보고 있자 수혁이 다시 한번 눈을 휘며 웃었다. 그제야 너무 본 것 같아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돌렸다.

‘아…… 놀래라.’

진겸이 짧은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병실 안쪽에 있는 진우를 봤다.

백진겸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이자 《그레이》의 메인수 백진우.

자기만을 바라보는 탁원범을 만나긴 했으나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도 피폐했다. 게다가 최신 연재 회차까지도 그가 왜 백진겸을 위해 사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백진겸을 위해 제 모든 걸 포기한 채 살아갔다. 둘을 다 아는 사람들은 진우에게 왜 그렇게 사냐고 물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백진겸에게는 한없이 퍼 주는 호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주변에 나쁜 놈들이 꼬인다 싶으면 공격적으로 변하곤 했다.

백진우에게 백진겸이란 지켜야 할 존재였다.

그 지독한 헌신에 돌아온 건 배신이었지만…….

게다가 그의 끝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빙의한 이 몸, 선천성 심장병을 앓아 몸이 약한 악역 백진겸.

‘……왜 하필 난데!’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방금 화장실에서 온갖 실험을 했을 때 꿈이 아니라는 건 깨달았다.

더구나 《그레이》는 피폐물이었고 백진겸은 탁원범에게 죽는다는 점에서 이미 글러 먹은 빙의였다.

무엇보다 원범의 눈빛이 너무 싸늘해 괜히 오싹거렸다. 진겸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어깨를 말며 움츠러들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진겸을 응시하던 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범을 보면 항상 말을 걸어 보려 하던 그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치대는 것도 보기 싫지만 저러고 있는 것도 별로였다. 모자란 것도 없는데 왜 자꾸 탁원범 앞에서 작아지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우가 표정을 굳힌 채 진겸의 옆으로 다가가 원범의 시선을 슬쩍 가리며 섰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내가 후원하는 환자 좀 보러 왔지.”

진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이런 호화스러운 1인실에 진겸이 입원할 수 있었던 건 원범의 지원이 있기 때문인 건 맞았다. 병원비 또한 그가 해결해 주고 있었다.

진우가 입을 열려는데 뒤에서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살짝 몸을 돌려 살피자 진겸의 작은 손이 제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게다가 숨듯이 등 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가 먼저 손을 뻗는 일은 흔치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더니 지금은 제게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스레 어깨가 펴졌다.

“다 보셨으면…… 이만 가 주셨으면 합니다.”

진우는 폴대를 잡고 진겸의 등을 살짝 밀었다.

침대에 걸터앉게 된 진겸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올렸다.

병실에 있는 네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어 얼굴이 따끔거렸다. 민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눈을 돌려 훈일을 봤다.

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누군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아까 진우와 나눈 대화를 통해 의사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흰 가운을 보니 맞는 듯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의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있었더라도 진겸의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도 의사니까 마냥 낯선 사람들보단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새 다가온 훈일이 진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겸아?”

훈일의 손을 피해 아예 침대 위로 올라가 버린 진겸은 경계하듯 그를 응시했다. 의사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대뜸 손을 뻗는 게 수상했다.

“단순히 검사만 하는 거야.”

“……왜요?”

“음…… 병원이니까?”

“……아?”

병원에 있으니 검사를 하는 건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에 진겸이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그런가?’ 하는 생각에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우와 훈일이 시선을 교환했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만약 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거였다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했다.

남들 앞에서만큼은 착하고 병약한 백진겸이었으니까.

훈일은 얌전해진 진겸의 몸을 살폈다. 이 상황에 놀란 건지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그래도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수액도 다 들어가 링거 주사도 제거했다.

그사이 원범과 수혁이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연차 냈길래 심각한 줄 알았더니…….”

원범의 시선이 진겸에게 닿았다.

“멀쩡하네.”

시린 음성에 진겸의 시선이 구석을 향했다. 원범이 딱히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무서운 거지. 어제 백진겸이 죽는 장면을 봐서 그런 게 분명했다.

진겸은 옆통수가 너무 따가워서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진우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그뿐이라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살짝 당기자 한 걸음 가까워진 진우 덕분에 원범이 가려졌다. 이걸로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진우는 아까부터 자꾸만 저를 의지하는 듯이 행동하는 진겸 때문에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모르는 척했던 게 연기였다면 이것 또한 그렇다는 건데. 그의 표정과 몸짓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겸의 이런 행동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가다듬고 원범에게 시선을 옮겼다.

“회사는 어쩌고 오셨습니까?”

“비서가 없잖아. 나 혼자 뭘 해.”

“양 비서는요?”

“난 네가 필요해. 괜찮아 보이는데 내일은 출근하지?”

진우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어제 정리해 놓은 서류의 양이 상당했다. 그렇다는 건 결재할 것 또한 많다는 얘기다. 더구나 이사라는 직함은 절대 한가하지 않다.

탁 이사는 한창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저 말을 하려고 병원까지 친히 납셨나 보다. 게다가 말은 운전기사로 왔다고 했지만 선 이사는 재밌을 것 같아서 따라왔을 게 뻔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출근할 생각은 없었다.

진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제 의사를 전했다.

“내일도 연차입니다. 사인하셨잖아요.”

연차 신청서에 분명 원범의 사인이 있었다.

원범은 하루 연차인 줄 알고 사인한 거였다. 이제 와 잘못 봤다고 해 봤자 사인했으면 끝이라고 할 게 뻔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내일 출근하라는 말은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뭐 좋은 핑곗거리 없나 생각하다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그러자 진우의 뒤에 가려졌던 진겸이 보였다.

옷 밖으로 나온 발목과 손목이 너무 가늘었다. 확실히 진우랑은 달랐다. 덩치 큰 사내놈들 사이에 있으니 유독 작아 보였다. 거기에 환자복을 입고 있어 더 병약해 보였다.

그렇다고 눈길이 가는 건 아니었다.

항상 저를 유혹하려는 듯 눈에 빤히 보이는 아양을 떨었었다. 그때마다 치워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다. 오히려 귀찮은 게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시원하기까지 했다.

더는 진겸에게 눈길을 줄 필요가 없어지자 원범의 시선이 다시 진우에게로 옮겨졌다. 내일 출근하라는 타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사실대로 말했다.

“출근해. 너 없으니까 심심해.”

“……회사는 노는 곳이 아닙니다.”

“논 적 없어. 그냥 네가 없어서 심심하다는 거지.”

고개를 돌린 채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는 진겸의 눈이 반짝거렸다. 원범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무섭기는 한데, 주인공들의 대화는 흥미진진했다.

꽤 재밌게 보던 소설이었고 주요 등장인물이 전부 모인 상황이라 호기심이 마구 샘솟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보기에는 원범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웠다.

훈일은 그런 진겸을 보다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진겸아. 아픈 데 있어?”

“……아니요.”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진겸을 향했다.

진겸은 눈치를 보면서도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훈일이 숨을 들이켰다.

병실에 와 진우와 대화하면서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가 싶었지만, 진짜로 기억에 문제가 있을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황급히 손을 뻗어 진우를 가리켰다.

“진우는? 쟤도 기억 안 나?”

진겸의 시선이 훈일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걱정으로 물든 진우의 얼굴이 옅은 갈색 눈동자에 담겼다.

아까와 다르게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인 건 맞아서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훈일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의사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차분히 원범과 수혁을 가리켰다.

“……저쪽도?”

“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이거 참.”

훈일은 자꾸만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갑작스레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기억나는 건? 사소한 것도 괜찮아.”

진겸은 쏠린 시선에 천천히 눈을 굴렸다.

여기서 자신은 진짜 백진겸이 아니고, 빙의된 거라고 말한들 그들이 믿을 리 없었다.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게다가 백진겸만 보고 산 진우가 너무도 불쌍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안쓰러웠다. 소설에 너무 이입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탁원범이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신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매서웠다.

백진겸이 죽는 건 어제 연재분이었고 《그레이》의 진행 정도는 중후반부다. 지금이 소설 전개상 어느 시점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상한 행동을 해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맥락 없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클리셰가 최고다.

“제 이름만 기억나요. 백진겸.”

너무도 해맑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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