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76)화 (76/76)

76.

놀란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왼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잡힌 핸들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우리를 태운 차량도 매끄럽게 방향을 고쳤다. 차창 너머의 풍경은 온통 어두워 밤이었다. 간간이 휙휙 지나치는 가로등 불빛만이 달리는 속도를 알려줄 뿐이었다.

‘이것도 꿈인가?’

재차의의 손바닥에 손을 올려둔 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얹어 둔 손을 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재차의가 덥석 내 손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은 탓이었다.

침묵 속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제야 재차의가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감각으로 남은 그의 손아귀 힘을 얼얼하게 느끼면서, 나는 차창 너머를 살폈다. 그러나 온통 검은 하늘만 펼쳐져 있어 장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재차의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차체를 빙 둘러 걸어와 조수석의 문을 열더니, 나로서는 채워져 있는 줄도 몰랐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도착했어. 이리 나와.”

정신이 얼떨떨하고 감정은 묘하게 언짢아서, 나는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수석에 등을 기대어 붙인 채 차의 정면 유리만 노려볼 따름이었다.

그러자니 차근차근 몰랐던 사실을 되새길 수 있게 됐다. 조금 전 꾸었던 기분 좋은 꿈은 전부 거짓이었다. 예쁘고 성질 고약한 개는 재차의의 오른손일 뿐이었다. 아무런 비난도 조롱도 없을 거라 믿어 주절거린 내 이야기 또한, 개가 아닌 재차의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내 정신을 제멋대로 휘저으면서 그는 운전을 했고, 이제는 내 몸마저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다.

‘능력 쓰면서 운전하는 거 교통법 위반 아니야?’

불만으로 꽉 찬 속에 이내 자책이 쌓였다. 터널에서의 터무니없는 도주극이 생각난 탓이었다. 고개를 툭 떨구며 나는 바지를 확인했다. 하얀 긴 바지로 갈아입혀진 옷은 보송보송하고 깨끗했다. 차도 위에 나자빠져 줄줄 실금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부끄럽다.

“…….”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서 나는 빈 운전석만 바라봤다. 이대로 자리를 옮겨서 차를 몰고 도망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고,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무릎이고 팔꿈치고 다 박살 나고야 말 거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나는 양쪽 무릎을 만졌다. 부러지거나 으깨진 상처 없이, 두 무릎 모두 멀쩡했다.

“하!”

그와 동시에 재차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그는 문짝 위에 팔뚝을 얹었다. 까만 그림자가 조수석 위로 밀려 들어와, 그의 자세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수차례 입술 달싹이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재차의가 말했다.

“못되게 말해서 미안해. 진짜로 네 무릎을 부술 생각은 없었어. 너한테 화나지도 않았고.”

뜻밖의 사과에 위장이 다 꿈틀거렸다. 차라리 뺨을 맞고 혼이 날 줄 알았지, 사과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큰 당혹감에 오히려 심장이 떨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 나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

“…….”

그러자 침묵이 길어진다. 아무래도 사과를 똑바로 받아들여야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모양이다.

“네.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하자, 머리 위로 ‘툭툭’ 소리가 들렸다. 활짝 열린 조수석 문 위를 재차의의 손끝이 두들기는 소리였다.

“대충 무마하려고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어떻게 알았지?

두어 번 눈을 굴려도 다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커다란 그림자 또한 부동했다. 결국 솔직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이잖아요. 저한테 화냈으면서.”

그러자 불쑥, 재차의의 몸이 내려앉았다. 작은 동작일지라도 그가 벌이면 부쩍 크고 대단해 보였다. 순식간에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그는 제자리에 양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 그와 나의 눈높이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라고 당황하여 쳐다만 보는데, 재차의가 말했다.

“그래…. 내가 너한테 화를 내긴 했지. 그런데 그게 내 탓이야? 애초에 네가 약속을 어겨서 그런 거 아냐. 딱 하나 있는 약속, 어렵지도 않은 거. ‘도망치지 마’. 그걸 냅다 어기는데 내가 눈이 안 돌게 생겨? 이 다람쥐 같은 꼬맹아, 너 100미터 몇이야? 정말 잘 뛰더라.”

“…….”

전부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다. 애초에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쌓인 한탄을 쏟아 내는 듯한 재차의의 음성은 발음이 또박또박 정확한 데다 몹시 빨랐다.

“근데, 너도 알지? 나 아니었으면 너는 벌써 죽었어. 납작하게 치여 죽어서, 그 예쁜 얼굴이고 몸이고 간에, 응? 송모래 쥐포 됐다고, 씨발!”

“…….”

짧은 악다구니와 함께 반듯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온갖 못된 말을 다 뱉던 저 입에서, ‘씨발’하는 욕설이 튀어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 그만큼 그는 크게 분노하고 성난 듯 보였다.

그러다가도 낯빛을 순식간에 바꾼다. 구겨진 눈썹을 펴고 일그러진 입매를 미소로 고치며, 어린애 달래듯 속닥거린다.

“그래도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게. 내가 너보다는 착한 어른이니까.”

“…….”

눈 깜빡이는 법도 잊고서 재차의를 지켜본 끝에,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횃불처럼 너울거리는 감정 변화에 신기하던 마음도 잠시였다. 그가 관대하게 ‘용서’를 말하는 순간 내 관심은 그 단어에 온통 쏠렸다. 재차의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말이 기대되는 건 처음이었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화난 이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

꼴통처럼 인생의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물러 있던 나조차도, 이런 문구의 포스트잇을 붙일 생각은 해 보질 못했다. 아마 나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타인이 베풀어야만 가능한 위로여서 그런 듯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차의가 뱉는 위로였다. 한참 신경질을 부리던 목소리로 무심하게, 아무렇잖게 뱉은 소리는 애를 쓴 위로라기보단 덤덤한 사실 적시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좋았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가만히 들은 말을 곱씹는 내게, 재차의는 대답을 독촉해왔다.

“내 말이 어려워?”

“아. 아니요.”

“그럼, 내 말 이해해?”

“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작금의 평화를 부여잡으려 애썼다. 꿈만 같은 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내게 이상할 만큼 관대한 재차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자면 그가 하는 명령마다 재깍재깍 대답을 붙여야만 했다.

“그래. 내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 다신 하지 마.”

“네.”

“네 잘못이 아닌 일로 빌빌 기지 말란 말이야.”

“네.”

“함부로 체면 구기면서 질질 짜지 마.”

“네.”

“‘네’ 말고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어?”

“…….”

로봇처럼 끄덕끄덕 움직이던 고갯짓이 뚝 멈췄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나는 눈을 굴렸다. 아. 뭐든 빨리 말해야 하는데…. 그런 조바심이 나, 고개를 우선 내저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재차의가 답답하다며 화낼까 봐 속이 조여서, 빨리 이 순간을 넘기고만 싶었다.

그러자 재차의가 손을 뻗었다. 내 무릎을 부드럽게 움켜쥐더니, 그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천천히 말해.”

온정마저 느껴지는 접촉에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번뜩 떠오르는 질문을, 아무런 거름망 없이 툭 건넸다.

“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

“뭐?”

그러자 재차의가 이마를 구겼다. 나는 내심 아차 싶었다. 시비를 걸 의도는 조금도 없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려 했을 뿐인데 내 말이 이상했나 보다.

빠르게 표정을 고치기로는 재차의도 마찬가지였다. 입매를 구기며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되물었다.

“놀려? …너를? 내가 언제.”

그에 나는 속에 든 말을 천천히 쏟아 냈다.

“깁스요. 제 무릎, 진작에 다… 치료해 주셨으면서, 수술해야 한다고 거짓말한 거잖아요. 깁스도 일부러 채워 두고, 목발도….”

“아, 그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차의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곤 양심의 어느 한구석에 뜨끔 하는 기별조차 가질 않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가 또 언제 뛰쳐나갈지 몰라서 목줄을 채울까 하다가 깁스로 대체한 거야. 걷기 불편하면 좀 얌전히 처박혀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거에 대해서 네가 할 말이 있어?”

“…….”

그런 의도였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응? 다리 멀쩡한 거 알자마자 냅다 화물차로 뛰어든 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느냐고.”

“…….”

재차의에게 할 말이라면 특히나, 없다….

부끄러워 입을 꾹 다문 내 무릎을 재차의가 엄지 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면서 그는 특유의 비아냥대는 어조로 말했다.

“겁 많은 꼬맹이가 뻔뻔하기까지 해? 멋대로 쫄아붙어서 마구 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한테 잘잘못을 따져? 이럴 게 아니라 고맙다고 대가리를 박아야지.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잖아.”

‘겁’부터 ‘아’까지 몽땅 맞는 말이었다.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겁에 질려 도주한 원흉은 결국 내게 있었다. 그런 내게 재차의는 선의만을 베풀었다. 말이 못되고 방법이 거칠어서 그렇지, 내 무릎이며 어깨를 치료해 줌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구해 주었다.

“이건 뭐, 무릎 꿇고 감사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국인데?”

그러면서 재차의가 웃는다. 깨끗하다는 감상이 일도록 반듯한 미소였다.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숨 고른 끝에, 나는 조수석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밖으로 나서려는 내 의도를 반기는 듯 재차의도 벌떡 일어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당장 여기가 어디인진 몰라도, 누구의 말소리도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아 고요한 장소였다. 마침 차를 세워둔 땅바닥도 회색 콘크리트를 발라놓은 차도였다. 무릎을 꿇고 대가리를 박아도 크게 옷이 더러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는 땅바닥에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작 이 정도 행동만으로 목숨을 구한 빚을 제해 준다니, 재차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머리를 박아야 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히며 그가 요구한 인사를 올리려는데,

“이런 씨발!”

재차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그는 나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굽혔던 다리가 단숨에 펴지고 두 발이 허공에 붕 떴다. 놀란 나를 안아든 채 재차의는 성난 숨을 내쉬었다. 혼잣말로 서너 마디 더 욕설하더니, 이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순 나는 그가 날 찌그러뜨려 죽이려나 보다 했다. 너무 강한 포옹에 숨통이 조여 절로 신음이 흘렀다.

그리고 재차의의 어깨너머로 비로소 종착지가 모습을 보였다. 파도마저 어둠에 물들어 검게 그을린, 넓고 잔잔한 밤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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