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75)화 (75/76)

75.

한발 늦게 밀려온 공포에 움찔거리면서, 나는 멍하니 하반신을 적셨다. 축축하던 사타구니가 단숨에 흥건해졌다. 뜨거운 기운이 번지는 속도는 주체할 수 없이 빨랐다. 요도를 조일 틈도 없이 엉덩이 밑이며 허벅다리까지 덥고, 축축하고, 눅눅해졌다.

“…….”

겁에 질려 실금해 놓고도 나는 부끄럽질 않았다. 수치심을 비롯한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메말라 버렸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재차의가 이런 내 몸을 더럽게 보고, 손대길 주저했으면 싶었다. 넌더리를 내며 추잡하다고 욕을 하길 바랐다. 어디든 좋으니까, 이대로 차도 바닥에라도 버려놓고 떠나 버리길 간절히 원했다. 차라리 나를 혐오해서 성욕을 잃어버렸으면, 입맛이 떨어졌다고 침이나 뱉고 가 버렸으면….

그러나 늘 그렇듯, 재차의는 내 바람과 반대로 움직였다. 그는 오히려 내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더러워진 내 허리를 두 팔로 감싸더니, 제 손이며 옷을 다 버리도록 똑바로 안아 들었다. 머리조차 똑바로 가누질 못해 나는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머리칼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내 이마에, 재차의가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송모래.”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외는 입술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차분해진 그의 음성에 어째선지 눈물이 났다. 여태껏 꿈쩍없이 메말랐던 눈이 단숨에 뜨거워지더니 눈물방울이 뚝,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이내 뒤로 꺾인 내 목덜미에 큰 손이 닿았다. 힘 빠진 고개를 받쳐 쥐더니, 재차의는 제 품 안에 나를 쑤셔 넣기라도 하려는 듯 아주 세게 포옹했다. 땀이며 오줌, 눈물로 지저분해진 나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는 흉곽을 위로 크게 부풀렸다가, 서서히 가라앉혔다.

질식 혹은 실신의 기로에서 나는 가까스로 입을 벌리기에 성공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뱉어낸 말은 발음이 뭉개져 형편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눈동자에 힘이 풀렸다. 이토록 영혼까지 무기력한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의식이 강제로 꺼져버리기 직전에, 재차의의 속삭임이 낮게 들렸다.

“네가 왜?”

눈 아프게 백색이던 사방이 암전됐다.

***

‘개다.’

꼬리가 기다랗고 털이 풍성한, 검은 개가 보인다. 이렇게나 크고 예쁜 개는 처음 본다. 이쪽으로 와 주면 좋겠다… 하고 막연히 바라는데, 들판 위를 노닐던 개가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나는 설레고 긴장했다. 순한 개를 놀라게 할까 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바라만 보자, 개는 내 옆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더니 다리를 늘어뜨리며 누웠다. 그리고 내 허벅지에 제 턱을 괴었다.

‘우와.’

이렇게나 가까이서 개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둥그스름한 정수리 털결이 반질반질한 게, 어지간한 사람 머리칼보다 고왔다. 촉촉한 콧잔등이며 부드러운 머리를 만져 보고 싶어 고민한 끝에 나는 개의 코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냄새를 먼저 맡게 해 주면 경계심을 푼다던 말이 생각나서 그랬다. 그러나 개는 내 냄새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에 길쭉한 귀를 뒤로 젖히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송모래. 이건 꿈이야.”

개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 금방이라도 ‘헥’ 소리를 낼 것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말할 때마다 진분홍색 혀가 살짝 보였다.

“꿈?”

내가 되묻자,

“그래, 꿈.”

개가 똘똘한 눈을 깜빡인다.

“여기는 네 꿈속이니까 어떤 말이든지 다 해도 돼. 현실이 아니니까.”

“꿈….”

그제야 나는 근방을 둘러보았다.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연두색 잔디밭은 드넓은데 흙냄새가 나지 않았다. 분명 입체적인 세계인데, 어째선지 납작하다. 온통 크레파스로 죽죽 그어 놓은 것 같다.

잠들기 전에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주 나쁘고 무서운 말썽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정신이 아득하다. 꼭 기억해 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뭐더라….

“송모래.”

생각에 빠진 나를 큰 개가 건져 올렸다. 집중하라는 듯 입으로 ‘딱딱’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녀석은 대뜸 질문했다.

“장건표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장건표? 그게 누구지….”

영 귀에 익지 않는 이름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였다. 개가 눈가를 찌푸리는 사이,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뉴타입 등록증에 기재된 본명은 장건표, 용병단 똘마니들이 부르기론 대장, 내게 주어진 호칭은….

“아, 삼촌….”

그렇게 중얼거리자 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처럼, 녀석의 얼굴 근육도 자유자재였다.

“‘삼촌’? 네 친지가 아닌데 어떻게 그놈이 삼촌이야?”

“아버지 친구니까….”

“‘친구’.”

그러더니 개가 인상을 쓴다. 뭐가 됐든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리기에, 나는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누가 친구 자식 새끼한테 마약을 먹이지?”

이 개, 말투가 고약한 편이네. 생김새는 예쁜데 목소리가 무서운 것도 그렇고, 누굴 닮은 것 같은데….

나는 괜스레 잔디밭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까칠까칠하게 내 손 틈새를 간질여야 할 잔디는 이상할 만큼 부드러웠다. 감촉이 꼭 잘 다듬어낸 가죽, 혹은 천 조각 같다.

“응? 꼬마야.”

이제는 개도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구나. 과거로 돌아와 나이가 줄어들고 액면가가 어려졌을지언정 키는 그대로인데, 왜 이리도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걸까. 참 한탄스러운 일이다.

못된 개의 독촉에 못 이겨, 나는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날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렇지, 뭐….”

돌아올 반응이 어떻건 간에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못 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개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할 것이고,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가치판단도 하지 않을 텐데.

두 눈을 내리감고, 나무 기둥에 등을 완전히 기대어 붙였다. 어째서인지 나무마저 푹신하고 부드럽다. 지친 정신에 온 간만의 휴식이 달가웠다. 기분이 좋다. 이렇게 좋은 꿈이라면 깨지 않는 게 좋겠다.

현실로 돌아가기란 고달픈 일이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애쓰는 일도 이젠 힘들다. 나는 많이 지쳤다. 이젠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대단하게 느껴지지가 않고, 오히려 지루한 경지에 이르렀다.

오늘이 이토록 허무할 줄 알았더라면, 어제는 너무 애쓰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죽을 걸 그랬나 봐.”

가만히 중얼거리자 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날 떠나려나 생각하는데, 개는 길쭉한 주둥이를 뻗어 내 뺨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까만 코와 입술이 살에 닿으면 축축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건조하고 거칠었다.

두어 번 내 뺨을 문질러주는가 싶더니 개가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 목소리가 너무나 심각해서 오히려 웃겼다. 귀여운 강아지 주제에 심란해하기는.

“뭐…, 엄마 아빠가 바란 게 그거니까. 그냥 내가 죽는 거…. 형이랑 동생들은 다 살고, 내가 죽는 거.”

그러면서 올려다본 하늘은 묘하게 낮았다. 온통 파란 빛깔인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괴수도, 빨간 헬기도 없었다.

“헬기에는 세 사람만 더 탈 수 있다고, 구조대원이 그랬거든.”

오래 회상하고 고민하고 생각한 나머지, 나는 이제 모두의 마음을 이해했다. 엄마, 아빠 입장에야 어린 동생들을 최우선으로 살리는 게 옳고, 그러자면 어른 구실이 가능한 형을 함께 보내는 게 맞았을 거다. 동생들도 나보다는 형이 좋아서 따라간 것이고, 형의 입장도 크게 다르진 않았겠지. 날 향한 미안함을 못 이겨 제 점퍼를 주었으니, 오히려 고맙다.

그러니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다. 나 혼자 살아 그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좀, 지지부진할 뿐이다.

“그게 장건…, 아니. 삼촌이랑은 무슨 상관이야?”

“삼촌?”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속 편한 답변을 내놓았다.

“삼촌이랑은 상관없지.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인데…. 더는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하잖아.”

“정확히 무슨 짓을 못 하는데?”

‘무슨 짓’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뱉어야 할 말이 너무 길고 많았다. 그래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내 말을 이해 못 할 개가 아닌가. 그래서 전부 설명해 주었다.

나에게 약을 먹이고 주사하고, 때로 링거로 매달아 두던 일이나 좁은 방에 가둬 놓고 괴롭히던 일, 날 때리던 매질이나 내게 뱉던 욕지거리들, 긴 굶주림에 물이라도 달라고 매달렸던 기억들과 또 여러 차례 도망을 시도했던 추억들, 그에 따른 처벌 같은 것들….

그러면서 나는 실소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삼촌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몇 번이고 반항하고 도주하고 때론 육탄전까지 벌였는데, 삼촌은 그때마다 며칠, 혹은 몇 주를 들여서라도 나를 굴복시켜 놓았다.

“내가 다…. 다 포기하면… ‘착하다’…, 칭찬하는 거.”

그만한 정성을 쏟은 걸 보면, 그는 평생 나를 끼고 살 심산이었던 게 분명하다. 괴수에게 찢겨 죽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송모래를 껴묻거리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더라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괜찮다. 말마따나 삼촌이랑 나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역겹고 우울한 4년 또한, 이번 생에는 적히지 않을 세월이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 내게,

“그런데 왜 네가 죄송해?”

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재차의가 그러듯이… 머리를 모로 기울이면서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 영문 모를 소리의 출처를 의심했다.

“왜 네가 죄송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도망까지 친 거지? 네 잘못도 아니잖아.”

고개를 푹 숙여, 나는 개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머리 쓰다듬어도 돼?”

그러자 개가 그러라는 듯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기쁜 마음으로 나는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개의 북실북실한 정수리를 만져 보았다. 그런데 감촉이, 이상하다. 맨들맨들하고 부드럽기는 한데, 털의 결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는다.

“…….”

고개를 돌려 나는 하늘을 다시 살폈다. 그러나 푸른 하늘이 있던 자리를 채운 것은 회색의 낮은 천장과 차량 조수석의 선바이저, 그리고 룸미러였다. 깜짝 놀라 다시금 개를 살피려는데, 내 허벅다리 위에 놓인 건 큰 개의 머리가 아닌 커다란 남자의 오른손바닥이었다.

턱 내밀어진 손을 따라 서서히 시선을 움직였다. 굵은 손목과 팔뚝, 너른 어깨, 그리고 무심한 옆얼굴이 보였다. 재차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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