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74)화 (74/76)

74.

반대쪽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는 숨을 두 번 골랐다. 문득 흉 하나 없는 무릎이며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천사의 눈물.’

천금을 들여 가며 재차의는 두 번이나 나를 고쳐 주었다. 그만한 값어치가 없는, 중고임을 들켰으니 이제는 그 빚을 갚아야 할 차례다.

하지만, 어떻게?

짧은 순간 내 미래가 사진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재차의의 큰 손에 멱살을 잡혀 릴리에서 끌려 내려가고, 그를 칭송하는 가이드 직원들로부터 차가운 눈길과 배척을 받고, 내게 상냥한 척 시늉하던 소꿉놀이는 막을 내릴 거다.

“…….”

손을 뻗어, 나는 릴리의 반대쪽 문을 아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하차했다. 무어라 바삐 속닥거리는 안후이 대리의 음성이 아지랑이처럼 머나멀게 들렸다.

그대로 나는 뛰었다. 뒤도 돌아보질 않고 미친놈처럼 뛰어, 조금 전 릴리를 타고 들어온 백색 터널로 독주했다. 어깨너머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울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빨리, 건강한 팔다리가 달리기만으로 부서질 것 같단 위기감이 들도록 뛰고 또 뛰었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재차의가 화낼 테니까. 다시 나를 부수고 놀리고 버리기 전에….

상체가 앞으로 연신 쏠리고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숨이 목젖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재차의의 손에 잡혔다간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아니, 사실 안다. 뼈저리게 잘 안다. 내 목을 도축용 짐승 다루듯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서는, 매칭 테스트를 하느라 허비한 시간부터 보상받을 것이었다. 목구멍이 헐도록 좆을 처박고 내 몸을 성욕 해소용 구멍처럼 다룰 것이었다.

이번엔 전보다 더 나쁘다. 전에는 적어도, 내 처지를 완전히 들키진 않았었으니까. 이젠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나를 때릴지도 모른다. 아! 진작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내게 친절하고 내게 정성 들인 만큼 재차의가 화낼 거란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난 더는, 그런 짓은, 더는….

“…헉, 헉! 헉!”

휘청거리면서 미친놈처럼 내달리는 내 뒤로, 발소리가 울렸다. 대낮의 터널은 너무나 밝은 빛으로 내 눈을 찔러 댔고 등 뒤로 쫓아오는 묵직한 발소리는 내 발소리의 두 배로 빨랐다. 온 힘을 다한 뜀박질로 내 발이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거센 발소리가 두 번 크게 울렸다.

그러나 들리는 숨소리는 오직 내 것뿐이었다.

“아…, 헉, 아, 아…!”

나는 땀 범벅이 되어 다리를 힘껏 움직였다. 빨리, 제발, 더 빨리… 그러나 긴긴 터널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아….”

재차의의 발소리가 내 등 뒤에서 ‘터벅’ 울린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 온통 백색으로 환하던 시야를 커다란 화물차가 가득 채웠다. 일순 커다란 차의 정면 유리가 검은 벽처럼 느껴졌다. 릴리가 그렇듯, 운전석은 텅 비어 있었다.

치여, 죽는다.

깨달음과 동시에 쾅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힘 풀린 다리의 아주 작은 근육까지 경련하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려는 듯 흉곽 안을 두들겨 댔다. 목구멍에서 뛰는 맥박마저 사나웠다. 눈이 아프다. 머리가 울린다. 귓가에선 충돌음의 이명이 들린다.

그리고 재차의가 보였다.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이 뒤늦게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나를 지나쳐 앞으로 튀어 나가서는, 화물차를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벗겨진 검은 구두 한 짝이 바닥을 나뒹굴고, 화물차는 바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반대쪽 벽면으로 튕겨 나가 처박혔다. 터진 윙바디에서 짐 상자와 약품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난장판이 된 사고 현장의 한가운데에 재차의는 홀로 서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을 뿐 그는 냉동 화물차를 어깨로 밀쳐 낸 자세 그대로, 주춤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몇 초가 지난 뒤에야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재킷이며 셔츠의 찢어진 어깨에서 검은 김이 뿜어져 나오는데, 배어 나오는 피는커녕 땀 한 방울 없었다. 다만 목덜미와 이마에 핏대가 울룩불룩 팽창하여 부풀어 있었다.

‘아…. 아….’

생각조차 마비되어 제대로 되질 않는다. 충격에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저릿저릿하다. 전기에 오른 듯 제자리에서 부르르 떠는 나를 향해 재차의가 소리쳤다.

“다시는.”

그의 성화에 오금이 저렸다. 다리에 이어 팔의 힘까지 죄 풀려 버렸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지고, 살갗은 공포심에 돋은 닭살로 덮였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버럭 내지른 외침이 사자후 같다. 터널 안을 크게 울린 그의 음성은 메아리마저 날카로웠다. 사람이 아닌, 짐승 울부짖는 소리로 변모하여 내 귀로 돌아온다.

옴짝달싹도 하질 못하고서 나는 통증을 느꼈다. 심장이 아팠다. 그리고 후회됐다.

‘나…. 아, 내가, 내가 왜…. 왜 그랬지?’

차라리 얌전히 사죄하고 가만히 있을걸. 나서지 말걸. 나대지 말걸. 도망치지 말걸….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주였다. 이성적으로 딱 한 번, 1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씨발, 내가 왜 그랬을까? 아, 등신 새끼, 멍청한 새끼, 버러지 새끼…. 그냥 있지. 입 닥치고 누워나 있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으면 됐잖아. 그랬더라면 재차의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 텐데. 적어도 이 상황마저 내 잘못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다 망쳤다. 뺨 두어 대 맞고 며칠 시달리면 끝낼 수 있는 일을, 괜히 도망을 치겠다고 나대서 크게 부풀리고야 말았다. 사고를 내어 재차의를 더 화나게 했다. 몇 톤인지 모를 차를 망가뜨리고, 배달 일을 전부 망쳐 버리고, 그냥… 다. 전부 다 망쳐 버렸다.

성큼성큼 재차의가 내게 다가왔다. 풀썩… 나약한 소리를 내며 나는 뒤로 상체까지 쓰러져 버렸다.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다. 다가올 힐난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대로 질식해서 기절하는 게 훨씬 낫겠다. 그의 손에 집어 던져져 다치느니, 목을 조이고 겁탈을 당하느니.

식은땀이 단숨에 얼굴을 다 적셨다. 두피까지 젖는 느낌이 끔찍했다.

“송모래.”

망설임 없이 성큼 다가와, 재차의는 내 몸 위에 올라타듯 앉았다. 그리고 바삐 벌렁거리는 가슴 중앙에 손바닥을 대고, 성난 입술을 구겼다. 고장 난 채 쾅쾅 뛰는 내 심장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손바닥을 두드려 댔다.

내 몸통을 무겁게 내리누르며 그가 말했다.

“장건표, 그 새끼가 너한테 마약을 처먹였어? 그래서 꼼짝 못 한 거야, 약을 처먹어서. 그래, 그건 알겠어. 처음부터 그런 것 같았거든.”

아무 말도 못 하고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시야에 높다랗고 환한 터널이 보였다가, 저 멀리 찌그러진 냉동 화물차가 보였다가, 다시 재차의의 화난 얼굴이 보였다. 그 모든 게 날 괴롭게 했다.

“그런데… 발정제?”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 마저 괴롭히려고 되살려 주었나 보다.

“너, 몰랐다는 말 거짓말이지. 너는 다 알고 있었지? 발정제 처맞고 억지로 좆 세우면서, 그게 뭔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재차의의 말이 맞다. 그가 다 맞고, 나는 틀렸다….

“…….”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어떻게든 재차의의 화를 삭이고 싶었다. 아니라고, 이번에는 한 번뿐인 일이었다고. 4년 동안 갇혀 지내지도 않았고 진짜 역겨운 짓은 아직 당하지도 않았고, 약에 중독되어 바닥을 기어 다니지도 않았고 울다가 실신하지도 않았고, 약쟁이도 아니고 걸레도 아니라고, 아무튼 난 깨끗하다고….

이번에는 그렇게 더럽지 않다고.

“기절하지 마. 숨 쉬어.”

머리가 크게 흔들린다. 내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재차의가 명령했다. 그의 말에 무조건 따르고 싶은데,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멍한 정신에 나는 자책했다. 정말로 과거로 되돌아온 게 맞나? 스무 살, 아직 약에 취하지도 정신이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은 그 시절로, 내가 돌아온 게 맞긴 한가? 그럼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왜 조금도 변한 게 없지? 어째서 아무렇잖게 나 자신을 버러지, 약쟁이, 좆 박는 장난감이라 생각하고 벌벌 떤 거지?

“너는 왜 이렇게 어려워?”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재차의가 까만 눈을 번들거린다.

“질문해도 대답 한 번을 안 해. 번거롭게 알아냈더니… 또 도망을 쳐!”

잔잔하게 읊조리던 말이 버럭 내지른 소리로 끝났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크게 호통치는 목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들까 봐 무서웠다. 그의 손에 맞아 죽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 놓곤 숨도 못 쉬고 뻗어 버려. 대체 왜 이래? 평생 너 같은 종자는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난해하고 꽉 막힌 인간은 처음이야.”

그의 팔 힘에 붙들려 내 상체가 억지로 앞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축 늘어뜨린 손이 차도 위에서 질질 끌린다. 숨결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재차의가 말했다.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너야?”

내 뺨에 대고 칼날처럼 파고드는 질문이 온통 아프다.

“무슨 생각 중이야? 응? 송모래. 기절하지 마! 기절하기 전에 대답해.”

숨을 연거푸 내뱉기만 하면서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러나 뱉어져 나오는 음성은 없었다.

“대답해!”

분노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눈동자를 까맣게 태우면서, 재차의가 내 멱살을 놓았다. 나는 차도 위에 다시금 쓰러졌다. 멍한 눈으로 재차의를 살피는 것밖엔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의는 터널 내부를 훑어보았다. 멀리 튕겨 나간 구두를 찾아 발을 쑤셔 넣는다. 그대로 잠시간 침묵하는 듯하다, 그는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무기력하게 툭 뻗은 내 무릎에 제 발 한쪽을 비스듬히 얹었다.

“약속을 어긴 대가는 치러야지.”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다시 박살 내도 불만은 없지? 어차피 내가 고쳐 준 무릎이잖아.”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허벅지며 종아리에 작은 경련이 거듭 일었다.

애초에 대슈망에 남는 게 아니었다. 재차의의 다정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깟 친절한 말 몇 마디가 뭐라고, 손잡은 게 다 뭐라고, 밥 좀 먹은 게 뭐라고. 평생 관심 한 줌 못 받아 본 거지새끼인 걸 못 감추고 해이해져서는 내가 멍청했다.

이번만큼은 그가 내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약속을 지켜 줄 줄 알았다.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다.

“송모래.”

벌어진 입술을 잘게 떠는 나를 향해, 재차의가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그리고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왜 반항하지 않아?”

그 말을 듣고도 나는 꿈쩍조차 하지 못했다. 서서히 질식하는 고통에, 박살 난다는 공포에 물든 채 그저 가만있었다.

“내가, 씨발. 지금 협박하는 중이잖아. 네 무릎을 으깨 버리겠다잖아. 그런데 왜….”

아득히 크고 강인해 보이는 재차의와, 짓눌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내 시선이 맞붙었다.

“너.”

새까만 눈이 나를 담는다. 비로소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싫다는 말을 못 하는구나.”

재차의가 말했다. 이번에 그 음성의 메아리는 사람의 형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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