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그와 동시에 내 하반신이 뒤로 거세게 당겨졌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발목은 물론이고 종아리, 허벅지, 옆구리의 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온몸이 늘어나다 못해 반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아, 아파!
“아악!”
주르륵, 봉을 움켜쥔 손이 떨어질 듯 말 듯 미끄러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절박하게 봉을 고쳐 움켜쥐었다. 그 짧은 순간, 재차의가 오만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눈 감아!”
“어, 아…. 아!”
그의 화난 얼굴과 그가 뱉는 외침이 동시에 내게 닥쳐왔다. 눈을 감으라는, 그 쉬운 말이 이 순간 너무나 어려웠다. 겁에 질려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재차의 님….”
그와 동시에 두 손이 텅 비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거센 바람뿐이었다.
“아… 아!”
머리칼이 앞으로 날리고 등이 새우처럼 굽도록 빠른 속도로, 나는 뒤로 끌려갔다. 정확히는 날아갔다. 앞에서 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추락한다는 착각이 일었다. 절망감에 껌껌해진 시야에 재차의가 들어찼다.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그가 보였다. 팔이며 다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그가 위치한 지하철 칸은 계속해서 멀어지기만 했다. 재차의의 인영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점처럼 줄어들었다.
“송모래!”
그가 버럭 내지른 소리가 귀에 닿을 무렵, 내 시야에는 더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손발을 움직여 반항할 수도, 재차의의 말마따나 눈을 감을 수도, 심지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괴수는 끝도 없이 나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끌고 갔다. 이 정체 모를 괴수가 어느 순간 변심하며 나를 벽면이나 바닥, 천장에 팽개칠까 봐 두려웠다. 머리가 날리고 눈이 시리도록 빠른 속도라, 한 번의 패대기로 온몸이 박살 나고 끊어져 즉사할 것 같았다.
‘언…, 언제, 언제까지, 어디까지 끌고 가는 거야?’
휙, 휙, 휙, 통과하는 전철에는 끝이 없었다. 팔과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나는 무서웠다. 이대로 재차의가 나를 찾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쿵’ 소리가 울렸다. 내 머리통이 사물처럼 위아래로 들썩였다.
“…….”
전신으로 거친 타격음을 내며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열댓 바퀴를 정신없이 구른 뒤에야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반동이 그쳤다. 신음을 삼키며 어렵게 눈을 뜨자마자, 나는 곧바로 기절했다.
의식을 잃어버린 시간은 아주 짧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체감상으론 곧바로 눈을 뜬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았다. 허리며 어깨, 골반이 크게 아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픔에 눈물 흘리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억지로 달래야 했다.
‘괜찮아. 괜찮아, 송모래. 많이 안 다쳤어. 죽을 정돈 아니야.’
한 번 죽어봐서 안다. 죽을 만큼 큰 부상은 이것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아프다. 그러니 죽을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 고통은 견딜 수 있다. 참을 만하다.
‘눈….’
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나는 이마를 퍽 찡그렸다.
‘눈 감을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재차의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랬더라면 그가 나를 구해주었을 텐데…. 속절없이 끌려가는 나를 쫓아 달리던 그의 인영이 눈꺼풀에 새겨진 듯 아른거렸다. 왜 못 믿었을까? 그 순간에, 나는 왜 재차의를 믿지 못한 걸까….
‘아, 이제 됐어.’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암전된 듯 거뭇거뭇해진 시야에 서서히 빛이 들어왔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환영도 점차 걷혔다.
저 멀리, 길게 늘어진 전철 너머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그러나 나를 찾아 달려오는 재차의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건 순 새빨간 바닥과 벽, 천장이었다.
“…….”
따닥… 딱!
손톱으로 유리창을 치는 듯한 소리가,
따닥… 딱!
아주 크게 울리며 이명을 덮었다.
따닥… 딱!
일순 내 머리가 충격으로 이상해진 줄로 알고 나는 소리의 출처를 멍하니 찾았다. 정수리 위 천장에서, 괴수의 몸에서 뻗어 나온 기다란…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것이, 따닥… 소리를 내며 천장에 일렬로 들러붙었다가, 딱! 소리를 내며 이어지는 벽면으로 옮겨붙었다. 다시, 따닥… 소리와 함께 벽면에 빨간 길 한 줄을 새기고, 딱!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옮겨붙는다.
따닥… 딱!
그렇게 이곳, 전철역의 한 칸이 온통 빨간색이었다. 전부 괴수였다.
“…….”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는 등 뒤를 살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뒤로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온통 빨간 줄로 칠갑한 지하철 칸의 문짝 너머로, 완전히 새빨간 새로운 칸이 이어져 있었다. 끝도 없이, 아주 길었다….
따닥… 따닥… 따닥….
문득 전철이 회전축을 도는 듯 서서히 기울어졌다. 얼이 나간 내 상체도 그와 함께 대각선으로 기울어졌다. 덜컹, 덜컹… 모로 기울어졌다가 도로 일자로 맞붙는, 수십 수백 개의 전철 간이 모두 빨갛다.
“…아….”
따닥… 탁!
끈적한 타격음 끝에 새빨간 줄이 내 다리에 일자로 들러붙었다. 발목에 이어 허벅지로, 허벅지에 이어 허리로, 이내 목까지 감겨 올라온다. 움직임은 마치 문어 같은데 감촉과 세기는 철골 같았다. 붉은 끈에 온몸이 칭칭 감겨, 나는 반항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하아…, 후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생각뿐이다. 우선 최대한 침착하고자 노력했다. 숨을 죽이고, 꼼짝조차 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전신의 힘을 풀었다. 어찌 됐든 괴수는 나를 이 먼 곳까지 끌고 왔다. 곧바로 죽이지 않고 그저 잡아만 둔 데에는, 아마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먹잇감을 둥지에 가져와 죽이기를 좋아해서 그랬거나.
“…….”
도박하는 심정으로 나는 괴수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내 몸은 새빨간 끈에 완전히 칭칭 감겼다. 질겁한 몸의 체온이 떨어져서 그런 걸까, 괴수의 온도가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진다.
이내 새빨간 괴수 더미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전신이 빨간 줄로 칭칭 묶여서는 이젠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밖에 날 향한 공격은 없다는 점이었다.
‘재차의가 올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아무런 반항도 도망도 시도하지 않은 게 과연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이제 내 판단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어차피 실수였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됐으니까.
문득 빨간 바닥에 떨어진 새하얀 끈이 보였다. 눈을 좁게 뜨고 살펴보니 그건 내 무릎에 감겨 있던 붕대였다. 반으로 쪼개어져 떨어진 석회석 깁스도 함께 보였다. 조금 전, 바닥에 부딪히며 나뒹구는 충격에 깁스까지 박살 난 모양이었다.
‘괜찮아. 무릎은 괜찮아…. 안 아파.’
살갗이 까졌는지 따갑기는 해도 그뿐, 크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당장은 잘 보이질 않는 무릎보다도 어깨가 더 아팠다. 아무래도 날갯죽지가 찢어진 것 같다.
이내 검은 그림자가 얼굴에 훅 끼쳤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내 얼굴 앞으로 뻗어온 붉은 끈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 도박이 실패한 것 같다. 마침내 내 숨구멍까지 막아 죽이려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느 부위인지도 알 수 없는 붉은 살덩이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나는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최대한 오래 숨을 참아볼 작정이었다. 내가 질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30초냐 1분이냐에 따라서, 어쩌면 재차의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굉음이 크게 울렸다.
“아아악…!”
불현듯 닥쳐온 고통에 내 입이 쩍 벌어졌다. 곧바로 눈물이며 콧물, 침이 뿜어져 나왔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전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침으로 먹은 빵까지 순식간에 토해버렸다. 난데없는 통증은 충격적일 만큼 심각한데, 이상하게도 정확히 내 몸의 어디가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아팠다. 죽도록 아팠다. 죽을 때보다 더 아팠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가득 메운 빨간 줄이 크게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이내 새빨간 물결이 우르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퉁…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새빨갛던 바닥은 어느새 괴수의 흔적일랑 없이 말끔했다. 고개를 돌리자 뒤로, 뒤로 빠르게 물러나는 벌건 괴수가 보였다.
영문도 모르고서 나는 이리저리 고개만 흔들어댔다. 이내 괴수를 아프게 한 원인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폭죽 같은 굉음과 함께 불똥이 크게 튀더니, 채찍 같은 불꽃이 달아나는 괴수를 직통으로 때렸다.
“윽!”
불길이 내게도 튀었는지 갑작스러운 통증에 피부가 찌릿했다. 나는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었다. 그리고 헐떡헐떡 숨을 고르는데, 자박자박… 가벼운 발소리가 엎드린 내 발밑에서부터 허리, 어깨를 지나 정수리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너무나 반가워 나는 고개를 휙 들었다.
그리고 스팽글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핑크색, 민트색,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스팽글은, 낮은 굽 샌들에 달라붙은 장식이었다.
샌들 앞코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쪼그맣고 뽀얗고 보송보송했다. 천천히 목을 올리며 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기요, 아직 살아있어요?”
…여자애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지 싶은, 아주 어린 여자애.
그와 동시에 아이의 뒤로 새빨간 끈이 뻗쳐왔다. 나는 바닥에서 튀어 오르다시피 일어서며 아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지나간 아픔도 그 순간엔 잊어버리고 없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금방이라도 시뻘건 괴수에게 잡혀 끌려갈 것만 같아, 반사적으로 벌인 동작이었다.
그대로 나는 여자애를 껴안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닫힌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전철 문에 등을 부딪치며 이를 악물었을 때, 괴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단순히 물러서거나 자리를 옮긴 게 아니었다. 신기루처럼 완벽하게 사라진 채였다. 정말 아무것도, 빨간 끈의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
나는 품 안의 여자애를 천천히 내려다 봤다. 그 애는 도리어 나 때문에 놀랐다는 듯, 커다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였다.
“어어….”
통통한 입술을 벙긋거리며 아이가 목소리를 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은 팔을 얼른 풀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도로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등허리와 어깨의 통증이 극심해 함부로 움직일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차가운 전철 문짝에 등을 기대며 앉는 게 고작이었다.
“하아….”
통증에 한쪽 눈이 절로 감겼다. 인상을 구기며 주위를 살피는 내게, 여자아이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오빠도 파수꾼이에요?”
그러더니 말똥말똥한 고동색 눈으로 내 옷차림을 빤히 살폈다. 흰 셔츠 깃에 새겨진 대슈망 로고 자수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숱 적은 눈썹을 찡그리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아, 뭐야아! 가이드…! 가이드 맞잖아요! 헤헤, 으헤헤! 무슨 가이드가 이래!”
대뜸 발랄하게 웃어젖히는 아이의 외침에 그저 얼떨떨했다. 죽을 위기를 겨우 넘긴 데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파 나는 심각한데, 초등학교는 졸업했을까 싶게 주먹만 한 꼬맹이는 아주 재미있는 만화를 본다는 듯 웃어대니 이상했다. 이 애까지도 게이트가 만들어낸 환영은 아닐까 무서워질 정도였다.
그리고 멀찍이서 대답이 들려왔다.
“쉿. 조용히 좀 웃어.”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또 다른 꼬맹이를 발견했다. 철없이 웃는 여자아이와 동갑내기로 추정되는 꼬마는 남자였고,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달고 있었다. 뺨은 동그랗고 눈은 커다란데, 코와 입술이 오밀조밀하니 소동물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피식 실소하면서 어깨를 끌어올렸다가 내리는 동작까지….
그의 모든 게 눈에 익으면서도 낯설었다. 너무 작고, 너무 어려서 어색했다. 소년의 이름을 나는 알았다.
‘문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