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67)화 (67/76)

67.

전철 창밖에서 빛이 번쩍거린다. 전등을 붙여놓은 듯 온통 새하얄 뿐 보이는 풍경이 없다.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불분명하다. 애초에 행진이 목표가 아니라는 듯 무작정 내달릴 뿐이다. 영원히 이 상태 그대로일 것만 같다.

물론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이 공간에 찾아 들어온 것이니까.

나는 목을 쭉 뻗으며 게이트의 입구를 올려다 봤다. 직사각형의 천장 중앙에 뻥 뚫린 구멍은 1미터 남짓한 지름의 원형이었다. 아직 덜 벌어졌다고는 하나 작아도 너무 작은 입구다. 그 바람에 릴리 없이 재차의와 나는 맨몸만 내려와야 했다.

딱 하나 챙겨온 짐은 목발이었다. 플라스틱 목발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며 나는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재차의의 커다란 등을 노려봤다.

‘푹 쉬기만 하라고 떵떵거릴 땐 언제고….’

제멋대로인 그의 면모야 놀랍지 않다. 게이트로 보내진 선발대가 핵을 찾았으니 스티치 하러 갈 거라는 설명과 함께, 그는 날 찾았다. 그러곤 제 준비물 챙기듯 나를 릴리에 태웠다.

무조건 내 옆이 제일 안전해, 우린 파트너니까 어딜 가든 붙어 다녀야지, 마침 위험도도 낮은 게이트니 잘 됐어, 체험 학습이라 생각하고 배우도록 해…. 재차의의 의견이 그러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에 동의했다. 지난날 재차의가 홀로 다이브며 스티치에 나섰을 때, 내 얼굴엔 녹색 불이 붙었으니까.

문소여도 보이질 않는 대슈망 센터에 혼자 남고 싶진 않았다.

‘지금쯤이면 문소여는 열네 살이겠네. 아직 발현도 안 했으려나.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그의 빈자리가 은근히 크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종알 수다 떨던 목소리도, 타인과 나를 완전히 차단해 주던 멋진 능력도 그리웠다.

‘아…. 아니지. 이젠 못 만나겠네. 난 조만간 여길 뜰 거니까….’

물렁한 생각을 밀어치우며 나는 목발을 꽉 잡았다.

정신 차려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재차의의 돈과 인맥으로 무릎 수술을 받고, 대슈망 곳간을 털어 배와 주머니를 채우고,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자면 전과 같은 사고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때는 내 얼굴에 천사의 눈물을 끼얹어주었지만, 이번엔 물리적인 수술 날짜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니까.

두 달만 지나도 값이 변하는 게 신약인데, 자그마치 6년 전인 오늘날 천사의 눈물은 세간에 알려진 바 없이 기밀 유통망을 오가는 보물이었다. 그런 약을 내게 써주길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전철 내부를 둘러보는 재차의를 구경하면서, 나는 괜스레 목발만 만지작거렸다. 그가 천리안으로 어디의 무엇까지 살피는 중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내 환한 빛이 전철 안을 가득 채웠다. 덜컹, 덜컹… 바닥이 가볍게 기울어지며 흔들렸다. 나는 재차의 옆으로 얼른 다가가 섰다. 그리고 기다랗게 펼쳐진 전철 내부를 괜히 같이 구경했다.

문득 재차의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나를 안아 들려기에, 나는 물에서 건져진 생선처럼 어깨를 파드득 털었다.

“제 발로 걷겠습니다.”

그렇게 소리치고 나니 내심 두근거렸다. 몇 번씩 삼켰던 말을 마침내 뱉어 속이 후련했다. 재차의에겐 별일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외침에 재차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뜻밖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깁스를 채운 오른쪽 다리 대신 목발을 쿵쿵 디디며 그를 따랐다.

“…….”

그런데 이상했다. 말없이 걷기를 5분째 해도 전철이 끝나지를 않았다. 꽉 닫힌 자동문, 각진 창문 다섯 개, 기다란 좌석과 철제봉과 손잡이들, 전철과 전철 사이의 이음매 문을 통과하면, 다시 똑같은 구조의 전철로 통했다. 이만큼 걸었으면 전동차의 전두부든 후두부든 나올 때가 됐는데 도통 막힘이 없다.

“…….”

재차의의 뒤통수를 보며 10여 분쯤 더 걷다가, 나는 목을 뻗어 앞을 내다봤다. 마치 거울을 마주 대놓은 것처럼 전철 내부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 게이트의 아가리가 어디쯤 있었는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

목발을 힘주어 고쳐 쥐고, 다시금 재차의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몇 분쯤 더 지났을까. 내내 뒤통수만 보여주던 재차의가 갑자기 휙 뒤를 돌아봤다.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표정이 영 불만스러워 보였다. 목소리는 더욱 불퉁했다.

“적당히 좀 하지?”

대뜸 던져진 핀잔에 어깨가 굳었다. 그의 눈길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내리기에, 잘못한 일 없이 절로 쭈뼛거리게 됐다.

나는 얼른 내 옷차림을 확인했다. 유니폼으로 지급된 흰 셔츠는 구김 없이 깨끗했다. 두툼한 깁스 탓에 반바지인 하의와 운동화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특히 검은 점퍼는 멋지기까지 했다. 세월의 흔적을 되감아 까맣고 반질반질하니, 새 옷이 된 게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나를 흘겨보는 재차의의 눈길은 냉담했다. 잠시 입술을 비트는가 싶더니 그는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하다 하다 이제 인어공주야?”

…이게 뭔 개소리야, 갑자기?

“너 예쁜 거 알겠으니까 공주 놀이 그만해.”

아니…. 뭐야. 뭐라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재차의의 힐난을 듣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재차의는 내 코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허리를 슬쩍 숙여 시야를 낮추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송모래. 안아달라고 해.”

재차의의 오른손이 내 눈앞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대로 검지가 휙 들리기에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따라 굴렸다. 긴 손가락이 지적하듯 가리킨 건 꽉 닫힌 자동문 위에 부착된 사각형의 스티커였다.

D99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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