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66)화 (66/76)

66.

‘아….’ 

낙담할 새도 없이 두 번째 질문이 닥쳐왔다.

“어제 장례식장에서 장건표가 너한테 놨던 주사, 그건 무슨 약이야?”

“…….”

스무고개 하듯 넘길 수 없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차마 내 입으로 그게, 내 좆을 억지로 세워다가 제 뒷구멍에 처넣으려고 주입한 발정제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길 반복한 끝에 나는 거짓말했다.

“몰라요.”

말끝에 땡그랑 소음이 크게 울렸다. 포크가 숟가락 옆에 내던져지는 소리였다. 이제 재차의의 손에는 젓가락 한 쌍만 남았다. 그래도… 썩 괜찮다. 젓가락이 있으면 뭐든지 먹을 수 있다. 국이야 그릇째로 들고 마시면 그만이니까.

세 번째 질문은 농담하듯 던져졌다.

“송모래. 너 공부 못하지?”

그 질문에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스무 살로 돌아와 그런지 고등학교 시절이 바로 어제처럼 느껴졌다. 그때가 내겐 호시절이었다. 나 좋다는 여자애들도 많았고 같이 축구하자며 불러내는 형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학생부였다. 당시 학생부는 내신 성적 좋은 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데다가, 수업료 면제 혜택이 쏠쏠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대학교도 수시로 합격했었다. 학원 한 번 못 다니고도 혼자 힘으로 얻어 낸 성과였다. 뭐 그래 봤자… 삼촌이 등록금을 내주지 않아서 대학교는 구경도 못해 봤지만.

“저… 공부 잘해요. 우등생이었어요.”

당당하게 대답하는 내 얼굴에 대고, 재차의는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자기 성적을 안 궁금해하는 우등생이 어디 있어?”

“…네?”

“어제 친 매칭 테스트, 몇 점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

내 허벅지 위로 보라색 파일이 쑥 올라왔다. 나는 두툼한 파일 속의 서류들을 보는 둥 마는 둥 살폈다. 대슈망에서 내놓은 나의 ‘성적표’에 쓰인 점수는 재차의의 얼굴만큼이나 변함없었다. 매칭 최댓값을 비롯하여 좋은 수치는 모조리 ‘산출 불가’ 혹은 ‘100’, 저항력이니 뭐니 하는 나쁜 수치는 온통 0이었다.

“백 점, 축하해?”

평소보다 한 톤은 더 높아진 음성으로 재차의가 말했다.

“내일부터는 많이 바빠질 거야. 되도록 빨리 대슈망에 적응하도록 해. 앞으로 너랑 나랑, 해야 할 일이 많거든.”

그에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대슈망에 입사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저는…, 재…. …저는 재차의 님 가이드하기 싫습니다.”

“그래?”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집? 너네 집은 게이트 사고로 시멘트 가루가 됐다던데? 거기 가서 뭐 하게. 너 거둬 줄 가족도, 친척도, 지인도 없잖아.”

“…….”

스무 살의 나였더라면 지금쯤 마음 아파서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이 정도 사실 적시로는 어디 하나 따끔조차 하질 않는다. 가슴이 돌이 된 것 같다.

“어차피 넌 평생 가이드로 살아야 해. 벌써 등록증 발급까지 싹 다 마쳤거든. 대슈망 밖으로 나간들 지금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덜떨어진 용병 새끼들이 네 좆이든 구멍이든 한 번만 핥아보자고 들개처럼 달려들 텐데.”

…뭐? 아, 아니. 이게 무슨, 대체 지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잖아도 꼴리게 생겨서 일반인도 줄을 서겠는데, 그 얼굴에 그 몸매로 다리까지 불편하니까 잡아다 빨아먹기 딱이잖아. 네가 S급 가이드인 데다 그게 나와의 매칭 테스트 결과라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 응? 꼬마야. 이젠 네 입장이 많이 달라졌어. 네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새근거리는 동안 많은 게 변했거든.”

“저 스무 살이에요…!”

참다못해,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어떻게든 그의 입을 틀어막아 보려 필사적으로 외친 목소리는 끝이 갈라져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재차의는 내 목소리가 어떻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응. 알아. 그런데?”

고개를 모로 까딱이며 되묻는 태도가 몹시 얄미웠다. 나는 이를 갈며 억지로 혀를 움직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스무 살짜리 애한테 그런 소리를…. 그런 협박을 하는 게, 도대체 가당키나 합니까?”

“‘협박’?”

솔직히 스무 살이면 어린애다! 옛날에는 나도 몰랐지만, 과거로 돌아와 거울을 보고 나니 이젠 알겠다. 스무 살 시절에는 나조차도 어린애였다는 걸. 어린 내게 세상이 너무 각박했었다는 걸.

그런데 어떻게 어른 된 도리로, 그것도 세계 최강의 파수꾼이라는 영웅이 이따위 성희롱을 일삼을 수 있단 말인가? ‘재차의’라는 명성이며 체면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서 어떻게… 어떻게 막 가족을 잃은 고아를 협박할 수가 있지?

치를 떠는 내 앞에서 재차의의 반응은 몹시 뻔뻔했다.

“내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래. 지금 널 꼬시는 중이잖아.”

도대체 재차의가 지닌 능력의 끝은 어딜까? 정말이지 열불 나게 무섭다. 사람 속을 갈퀴질하며 뒤집어 놓는, 염력보다도 정신계 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능력이 바로 이 추잡스러운 말본새다.

차게 질려버린 나를 향해, 그는 콧소리를 섞어 가며 말을 이었다.

“네 다리 말이야. 무릎이 완전히 망가져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던데? 2주 뒤로 날짜 잡아놨어. 그것도 경과 봐 가면서 할 수 있을까 말까야. 그때까진? 절대 안정해야지. 걷기, 달리기, 점프 금지.”

예상치 못한 비보에 나는 얼른 다리를 살폈다. 대왕 소시지처럼 커다랗게 감긴 깁스가 요란스럽긴 해도, 따로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다. 잠든 새에 진통제라도 놔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다쳤다고…?’

하기야 이미 깨진 무릎으로 복도를 질주했고, 심하게 넘어지기도 했다. 뼛조각이 안쪽으로 비틀어진 느낌까지 받았었다.

“꼬마야. 네 수술비가 얼만 줄이나 알아?”

모른다.

“너, 돈 있어?”

없다.

“기립도 못 하면서 독립을 하겠다고?”

아….

우등생이라 해 봐야 고졸인 나였다. 몸 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없었다. 대슈망에서 뛰쳐나가거든 곧바로 거지 신세란 뜻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재차의의 말이 옳았다. 내가 S급 가이드, 그것도 재차의의 파트너 후보임이 알려지면 곧바로 수작질이 걸려 올 터였다. 이전에는 그나마 육탄전으로 자기방어가 가능했건만, 다리 불구가 되어 그마저도 못해서는…. 내 앞날은 아무래도 암담했다.

“가이드 인생에 내 전속 파트너가 되는 것만큼 대단한 자리는 없어. 세상천지 친지 하나 없는 너 같은 꼬맹이가 내 옆자리를 마냥 거절해선 안 된다고. 이제 알겠어?”

“…….”

이미 충분히 낙담한 내게, 재차의는 거듭 폭격을 퍼부었다. 원래도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붓던 남자였지만, 이렇게까지 수다스러운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아. 혹시 지금 날 떠보는 중이야? 따로 원하는 조건이 있거나 그런 건가?”

“…….”

“우등생이라…, 그래. 똑똑한 꼬마를 스카우트하려면 따로 조건을 들어 드려야 되겠지? 뭘 원해?”

“…….”

“말해 봐. 뭐든지 들어 줄게.”

“…….”

마음이 상하다 못해 거의 멍해져서, 나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기만 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침묵하는 내 무릎 위에 재차의의 왼손이 내려앉았다. 밴드며 깁스로 둘둘 말린 무릎을 만지는 그의 손이 참 크다. 크고 투박하고, 거칠고 강하고, 우아하고 뜨거운 손이었다.

…어제, 이 손을 잡고 무료하게 보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밀려오는 잠기운에 까무룩 의식을 잃으면서도, 내 인생에 이만큼 좋은 시간이 드물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2주 정도라면…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

딱 그만큼만 잘 버텨내어서, 비싼 수술로 무릎을 고치고 나면 그땐 희망이 보일 성싶었다. 어제오늘 재차의가 보여 준 태도를 미루어 보아 그가 2주 내에 나를 죽도록 망쳐 놓을 가능성은 낮다… 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아주 높진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거짓말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할게요. 재차의 님의 파트너가 될게요.”

그러자 재차의의 반듯한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가느다랗게 휘는 눈매며 미소로 인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진 광대며, 그는 아주 상냥한 사람처럼 보였다.

“잘 생각했어, 송모래.”

그러더니 젓가락의 한 짝만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

…아니, 도대체 양심이 있냐? 가슴만 크지 속에 든 게 뭐야? 줄 거면 한 쌍을 다 줘야지….

주먹 안의 젓가락을 콱 움켜쥐고 분을 삭이는 날 구경하며 재차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기쁜 듯 속삭였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기나 해. 네 무릎도 고쳐주고, 네가 맞은 주사가 뭔지도 알아내서 치료해 줄게. 어차피 피 검사 결과 나오면 금방이야.”

‘…피 검사?’

그러고 보면 안후이 대리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아….’

작은 희망을 좇던 마음에 위기감이 더럭 닥쳐왔다. 내가 마약성 마취제에 취해 발정제나 맞으면서 삼촌의 딜도로 쓰이던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 재차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가뜩이나 사람 보기를 똥 보듯 하는 그였다. 지금 날 대하는 다정한 모습도 연기일 뿐,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낼 터였다.

‘내가…. 내가 원래 섹스 토이에, 약쟁이라는 걸 들키는 날엔….’

그날엔 재차의의 나쁜 본색이 거침없이 닥쳐올 것이었다. ‘아, 씨발!’, ‘괜히 공들였네’. 그런 말을 하면서 내게 쓴 시간을 아까워하겠지. 벌써 생각나는 용병들의 면면이 많다…. 그러곤 싸구려 마약을 던져 주며 섹스를 요구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알고 보니 걸레 좆이었다느니 뭐라느니 상스러운 소리를 지껄이면서, 나 같은 쓰레기는 흔쾌히 저와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저급 뉴타입 용병들이야 그들 아가리에 약을 부어 넣고 주먹다짐으로 정을 떼 버려 처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재차의는 다르다. 그가 제 바지 벨트를 풀며 달려드는 날에는, 모르긴 몰라도 전보다 더 끔찍해질 터였다.

그마저도… 나는 중고다. 그의 손때가 아닌, 남의 손때가 묻은… 빈티지가 못 되는 중고.

그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뺨의 솜털까지 오소소 서는 느낌에 몸이 떨렸다. 나는 황급히 팔뚝을 문지르며 소름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재차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워?”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그는 소파로 향했다. 그러더니 구비된 담요와 서류 파일을 가져와, 담요부터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 자세가 꼭 포옹하기 직전 같아, 나는 ‘재차의’를 떠올렸다.

‘송모래. 추워?’

끝없이 푸른 바다와 잠수함 로즈의 좁다란 망루, 그 위에서 보았던 재차의가 사진처럼 생각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기억을 외면했다.

그러자 재차의가 나를 놀리려는 듯 자세를 낮췄다. 내 두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웃을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보였다.

그 얼굴을 마지못해 직시하며,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원하는 조…, 조건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신다고 했죠?”

그러자 재차의가 ‘음’ 하는 침음으로 응답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나는 살 방법을 강구했다.

“강제로 하는 건 싫어요.”

“뭘?”

“…뭐든지요.”

“그리고?”

“…….”

…그리고? 그리고 뭘 더 말하라고? 뭘 말해야 하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괴롭힘 당하는 일, 남들 사이에 끼여서 눈치나 보며 원치 않게 섞게 되는 대화, 재차의에게 대답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 재차의가 제멋대로 내게 벌이는 모든 성행위…. 그 모든 걸 강제로 하지 않으면, 나는 그걸로 좋다.

그 모든 걸…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면야…. 피 검사 결과를 받고 내 실체를 깨달은 후에도, 나를 멋대로 내던질 수 없을 테니까….

“더 바라는 건 없어요.”

긴긴 고민 끝에 그렇게 선언하자,

“하….”

재차의가 아주 깊이 한숨 쉬었다.

“나 다리에 쥐 났다.”

그러면서 그는 내 어깨를 내리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시선으로 천천히 그를 좇았다. 기다랗고 굵은 허벅다리며 상대적으로 늘씬한, 그러나 직접 팔을 둘러보면 그렇게 두툼할 수가 없는 허리. 수영 선수처럼 커다란 흉곽과 길쭉하게 쭉 뻗은 목. 크리스마스트리의 정점에 별이 놓이듯이 가장 높은 자리에 달린 아름다운 얼굴에 이르기까지….

재차의 또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길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실히 훑어내리고, 다시 발목부터 얼굴까지 빤히 관찰했다. 싹싹 핥아진다는 착각과 간지러운 환촉이 일도록 집착적인 눈길이었다.

그대로 한참 침묵한 끝에 그는 제 잇새를 혀로 가볍게 핥았다. 그리고 ‘쩝’ 소리가 나도록 크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나도, 조건이 하나 있어.”

그 말에 나는 신경이 삐죽 섰다.

“부탁하는 입장에 무슨 조건이요?”

“허, 이 꼬맹이 봐라?”

“…….”

끝끝내 안도감이 든 바람에, 생각 없이 뱉은 말은 곧바로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는 재차의를 보자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나대지 마’ 그러면서 내 관자놀이를 퍽 칠까 봐 나는 반사적으로 목에 힘을 줬다. 내가 멋대로 대화에 끼어들 때면, 삼촌이 곧잘 그랬었는데….

그러나 재차의는 삼촌이 아니다.

“다시는 나한테서 도망치지 마.”

그의 ‘조건’ 또한 짐작과는 영 딴판이었다.

“…….”

왜 재차의가 내게 이런 말을 할까? 내가 알던 ‘그’라면 차라리 내 귀에 위치추적기를 쑤셔 박고, 가짜 통증을 불어넣으면서 협박을 일삼아야 하는데….

“두 번 도망쳤다간 다리로도 모자라 팔까지 박살 날 것 같아서 그래. 응?”

내 허벅다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재차의가 속삭였다. 나는 이 다정의 출처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내게, 작금의 재차의는 이토록 친절한 것인지…. 마법 같은 변화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가 스무 살이어서, 어려서 그런 걸까? 조금이라도 나를 측은하게 여기며 동정해서 이러는 걸까?

‘…아냐.’

그래, 아니야. 아니다…. 재차의는 사이코패스다. 그는 상대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사정을 봐줄 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그 춥던 게이트에서 10kg도 안 되는 어린애마저 내치겠다고 선택지에 끼워 넣던 개망나니인데….

‘…아, 그건 이제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

어찌 보면 ‘없었던’ 일조차 못 된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셈이니까. 그날의 재차의는 이제 없다. 내 과거가 달라진 만큼, 미래의 그도 달라질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아쉬웠다. 아쉽고 아까웠다. 나를 따라 ‘후’ 입바람을 불며 입김으로 기온을 가늠하던 재차의가, 뒤늦게 추위를 알아채곤 두 팔 벌려 나를 덥석 안아 주던 재차의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버리더라도 나만큼은 꼭 데리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재차의가… 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게 아까웠다. 사이코패스에 부도덕한 개망나니일지언정 적어도 그 순간의 그는 정말, 예뻤는데….

나는 눈앞의 재차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골몰했다.

앞으로 2주다. 2주 동안 내게 다시, 이 남자의 옆자리에서 버텨볼 자신이 생길까? 막돼먹은 혓바닥에 촌철살인 당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면서, ‘죽고 싶다’는 거짓 소망을 짓씹으며 혼자 남아 뒤를 헹구는 일 없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왜 하필 재차의지?’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왜 하필 재차의를 다시 만난 걸까, 그는 왜 나를 구해 준 걸까? 내 울음소리가 시끄러워서… 단순히 그게 이유인가. 내가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썼기 때문에…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 당하지만은 않았기에, 용기를 내고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래, 그게 이유다. 오직 그 사실 하나만으로 스무 살의 내 신세가 이렇게나 달라진 것이다.

“약속?”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내게 재차의가 새끼손가락을 뻗어 왔다. 긴긴 고민 끝에 나는 그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내 입장에서야 아주 쉬운 약속이었다. 보증을 건 계약도 뭣도 아닌 손가락 하나 거는 접촉쯤이야, 없었던 일인 척하면 그만이니까.

새끼손가락을 건 약속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듯, 재차의는 손바닥을 넓게 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시시덕대며 속삭였다.

“복사.”

그 말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손바닥을 맞대며 ‘위이이잉’ 하고 복사기 소리를 흉내 내는 동작은 아주 어린 시절 동생들이나 하던 짓이었다.

애써 표정을 굳히며 나는 손바닥을 펴고 그의 손에 마주 대 주었다. 그러나 재차의의 ‘복사’는 내 생각과 사뭇 달랐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움켜쥐더니, 구겨진 손바닥에 대고 제 중지를 앞뒤로 쓱쓱 비볐다. 갑작스러운 마찰에 손금에 열이 올랐다.

‘이… 미친놈!’

나는 후다닥 손을 뒤로 빼내어 등 뒤에 감췄다. 당혹감에 인상을 찌푸린 날 보며 재차의는 악동처럼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저를 건네주었다. 남은 젓가락 한 짝은 물론이며 숟가락과 포크도 함께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송모래.”

활짝 웃는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수저를 넙죽 받았다. 그리고 따끈한 뚝배기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전복은 생각보다 훨씬 짭조름하고 탱글탱글했다.

‘맛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맛있었다.

생생한 음식의 식감에 집중하면서, 옆자리에 앉아 내 식사를 구경하는 재차의를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면서, 나는 마지막 의심을 떨치려 노력했다.

재차의가 나를… 공들여 짓밟는 중은 아니겠지. 동물을 도축하기 전에 일부러 밥을 먹이며 살찌우는, 그런 못된 장난질을 벌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불안해야지 말자, 지레 걱정하지 말자.

‘이번에는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겠지?’

재차의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티끌만큼이라도 나를 좋아해서, 그래서 내게 잘해 주는 것이어야만 한다. 재차의밖에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없으니까. 지금의 나는 정말이지 아무도, 아무 데도, 아무것도 의지할 수가 없으니까.

또 한 번 재차의의 손을 잡고, 어린날의 나에게 온 두 번째 삶은 조금이나마 친절하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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