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재차의를 막아 보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내 절박함만 커졌다. 충동적으로 그의 손날을 깨무는 나는 개라도 된 기분인데, 재차의는 너무나 편편하고 또 뻔뻔했다.
특유의 까만 눈으로 그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
저 눈. 사실은 눈이 아닐 것이다. 백지 위에 구슬 하나씩을 박아 놓은, 사물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면 이다지도 무심할까? 나는 벼랑 끝에 몰렸는데, 다시 찢어지고 망쳐지지 않으려 발악을 하는데, 미처 손발을 휘두를 겨를이 없어 이를 써 가며 짐승이 다 됐는데…. 재차의는 너무나 멀쩡하다.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보기 좋다.
…하기야 성기를 씹히고도 기분 좋아하던 파수꾼에게 무얼 바랄까.
‘평생 내가 재차의를 상처 입힐 일이 있을까?’
그러자 문득 붉은 커튼이 생각났다. 내 배 위에 고일 정도로 흥건하던 피도, 의미 없는 지혈을 해 보겠다고 내 상처를 짓누르던 재차의의 손바닥도, 내 이름을 불러 대던 조급한 목소리도 생각났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재차의는 상처받은 듯 보였었다. 마음을 깊이 찔린 듯 가슴팍이 바삐 오르락내리락했고 얼굴에는 짙은 낭패가 서렸었다. 나는 결국 죽어야지만 이 남자에게 아주 작은 생채기나마 낼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죽긴 싫은데….’
사실은 죽기 싫었다. 너무나 살고 싶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 바라면서 내 절실함을 조금이나마 희석하려 애썼을 뿐, 언제고 나는 살길 원했다. 고아가 되고도 며칠 밤낮을 다친 다리로 걸어 다녔을 만큼, 골방에 처박힌 약쟁이 신세로 4년을 버텼을 만큼, 괴수의 잔해로 손금을 더럽히며 날을 새어도 좋을 만큼. 삶에 대한 내 의지는 언제나 끈끈했다. 재차의를 만나고,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상처받기 전까지는.
그 생각을 하니 부쩍 서러웠다. 재차의의 손날을 꾹꾹 짓씹으며 나는 입가를 씰룩거렸다. 눈살이 절로 구겨지고 뺨이 세게 일그러졌다. 꾸깃꾸깃해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속절없다. 마치 끓는 물인 양, 눈알이 쓰라리고 살이 달아오르도록 뜨겁다.
울음소리 하나 없이 나는 울었다.
“…….”
입가가 죽 늘어나고 턱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그래도 콱 악문 재차의의 손을 뱉진 않았다. 재차의 또한 제 손을 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볍게 털어 내는 아주 작은 동작조차 없었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관찰할 뿐이었다.
“송모래.”
윽, 윽…. 대답 대신 나는 신음만을 흘렸다.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시야가 흐리다. 재차의의 잘난 낯짝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흑….”
이내 나는 자포자기했다. 더는 반항할 힘도 없고 도망칠 길도 보이지 않았다. 내 턱 힘이 서서히 나약해지자, 그제야 재차의는 물린 손을 뒤로 빼냈다.
이제 화를 내며 나를 채근할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며 윽박지르기 시작할까? 아냐, 아닐 거다. 그가 내 감정 따위를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옷이나 뜯어 벗기고 좆이나 처박을 게 뻔했다.
절망하여 나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고개를 툭 떨구고 젖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닥쳐올 폭력을 예감했다.
“…….”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다. 내 구겨진 눈가로 더운 눈물이나 삐질삐질 빠져나올 뿐, 재차의는 조용했다. 뺨과 턱은 물론이고 목까지 눈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내게 다가오는 손길은 없었다.
볼썽사납게 이마를 구긴 채 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울음을 그쳤다. 전보다 선명해진 내 시야를 재차의의 얼굴이 가득 채웠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허리는 깊이 숙이며 그는 내 울상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뚝.”
재차의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엄지 끝으로 내 뺨을 쓸어 내듯 문질렀다. 눈물을 닦아 주는 그 동작은 조심성이 느껴질 만큼 부드러웠으나, 나는 경직됐다.
재차의의 시커먼 눈동자엔 여러 개의 이채가 돌았다. 전등을 완전히 등지고도 그의 눈빛은 몹시 환하고 반짝반짝했다. 순전한 호기심과 약간의 기쁨으로 물든 그 눈빛이 이상했다. 무섭다.
너무 무서우니 오히려 울음이 멎었다. 더는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끅…!”
힘껏 쏟아 낸 감정의 여운으로 나는 딸꾹질했다. 재차의는 그런 나를 모방하려는 듯 제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가 끌어 내렸다.
재차 딸꾹질로 들썩거리는 내 어깨 위에 그의 두 손이 앉았다. 묵직하게 꾸욱 내리누르는 손길이었다. 이 자리에, 이 순간에 가만히 박혀 있으라는 듯 나를 잡는 그 손길은 닻이었다. 다소 진이 빠져 버려 나는 얼떨떨하니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쿠션 벽면에 등을 푹 기댄 채 주르륵, 발등부터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까지 풀썩 무너졌다.
낮아진 내 눈높이에 맞추려는 듯 재차의도 자세를 낮게 숙였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반쯤 앉은 자세로, 그는 내 눈물을 재차 훔쳤다. 기다란 엄지 끝으로 싹싹 긁어내다시피 닦아 내더니 그대로 제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물을 핥아 먹었다.
“매칭 테스트가 그렇게 싫어?”
쩝.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며 재차의가 물었다.
“그게 아니면, 나랑 섹스하는 게 싫은 건가?”
“…….”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반면 이성은 창백하게 질렸다.
‘왜…, 왜 이런 걸 묻지? 내 호불호 같은 게 뭐가 중요하다고…, 재차의가….’
얼떨떨하니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뱉어져 나오는 속 시원한 대답 역시 없었다. 그저,
“끅….”
딸꾹질 소리만이 작게 새어 나갔다.
“…….”
그런데 재차의가 이상하다. 내 눈앞의 그는 스물여섯 살의 내가 만났던 ‘그’와 사뭇 달랐다. 분명 여섯 살은 더 어린 시절의 ‘그’일 텐데…. 나와 눈 맞추는 지금의 재차의는 오히려 내 기억 속 그보다 더 어른스럽고 인내심이 강했다.
“…끅! 하아…. …끅.”
훌쩍훌쩍 딸꾹질이나 해 대는 내 얼굴을, 그는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맞춘 시선을 떼지 않고서 돌아올 대답을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목울대를 잘게 떨어 가며 나는 서서히 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진심을 더럭 뱉었다.
“섹스하기 싫어요.”
어렵게 꾸린 말에,
“어허.”
재차의는 감탄사를 섞어 즉시 되물었다.
“정말? 어째서지?”
무척 놀랍고 의외라는 듯한 그의 반응이 여상스럽고 편안했다. 새카만 눈동자도 더는 위협적으로 번들대지 않았고,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마저 걸렸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의 열기가 서서히 식고 나니 목이 말랐다.
“오늘…, 오늘 부모님, 장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재차의가 내 입가에 제 귀를 가져다 댔다. 그 동작이 꼭 ‘잘 안 들려’ 하고 핀잔을 주는 듯해 나는 아랫입술을 꽉 씹었다. 그러자 퍼석퍼석 메마른 입술이 따끔따끔 아렸다.
‘아프다.’
그래. 아프다. 그러니까 이건 악질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정말로 6년 전으로, 스무 살의 나로 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못 할 말이 없다. …그래, 못 할 말이 없어. 지금의 나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미성숙한 성인이니까. 4년을 약쟁이 엉덩이에 좆 박아 주며 갇혀 살아온, 비루한 E급 가이드가 아니니까….
“…당신 같으면…, 당신 같으면 부모님 장례일에 섹스하고 싶겠어요?”
빳빳하게 얼굴을 추켜들고 크게 소리 내자, 재차의가 양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러더니 웃는다. 이가 보이도록 환한 미소였다. 마치 내 건방진 대거리를 아주 오래 기다려 온 사람처럼….
“장례식이 그렇게 특별한가?”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며 재차의가 물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뱉어 낸 말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었다.
“섹스를 안 한다고 해서 죽은 부모가 살아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아니었으면 너, 벌써 다른 놈 뒷구멍에 그 예쁜 좆을 박아 주고 있었을걸.”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반사적으로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런 일….”
“흠….”
짧은 대화 끝에 재차의는 낮은 침음성을 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들은 말을 잇속으로 곱씹는 듯한 그를 올려다보다가, 나는 급격한 피로감을 더럭 느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바닥났다. 그러고 보면 이맘때, 거의 일주일 가까이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었던 것 같다.
‘아, 배고파…. 밥 먹고 싶다. 쉬고 싶다. 자고 싶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축 처진 내 곁으로 재차의는 빠르게 돌아왔다. 두 손 가득 전선이 줄줄이 매달린 탐지기를 움켜쥔 채였다. 무심한 얼굴로 내 관자놀이에 마지막 탐지기를 착착 붙이는가 싶더니, 그는 내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내 오른 팔뚝과 그의 왼 팔뚝이 바짝 맞닿도록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남은 탐지기를 제 몸에도 붙이기 시작했다.
‘이거 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잖아.’
이어질 행위를 짐작하며 나는 심호흡했다.
그러나 근육으로 뭉쳐 울룩불룩한 복부며 넓고 팽팽한 가슴, 굵은 혈관이 다 비치는 손등과 발등 위에 탐지기를 부착한 뒤에도 재차의는 얌전했다. 발정 난 짐승처럼 내 목을 조르지도, 바지를 뜯어내듯 벗기고 볼기를 억지로 벌리지도, 그 큰 성기를 무턱대고 쑤셔 박으며 속을 들쑤시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허공에 대고 제 왼손을 내밀었다. 그게 전부였다.
‘…뭐야? 손… 잡자고? 지금…. 지금 재차의가 나더러, 같이 손이나 잡고 있자고 제안하는 건가? ‘그’ 재차의가…?’
부드럽고 순한 제스처에 내 머릿속이 크게 흔들렸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마음 안도 유난스럽게 움직거렸다. 다른 누가 함부로 흉내 낼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한 얼굴을 보면 그는 재차의가 맞는데, 차분히 건네 온 이 손짓은 조금도 재차의답지 못했다.
“송모래, 손.”
혼미해져 침묵하는 날 향해, 재차의는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어린 개에게 명령하는 주인 같은 그 태도에 못 이겨, 나는 재차의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이 손을 잡자마자 내 팔을 비틀어 포박하진 않을까, 별종이니 공주니 하는 별명을 붙여 비아냥거리진 않을까…. 끝내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였다.
그런 내 손을 재차의는 깍지를 껴 아주 부드럽게, 또 강하게 맞잡았다.
“지루하다고 또 울지나 마. 이대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는 기다란 다리를 꼭 나처럼 앞으로 쭉 뻗었다. 단단한 허벅다리며 종아리 옆면이 온통 내 다리와 맞붙었다. 접촉은 그게 전부였다.
재차의의 손아귀에 꽉 잡힌 내 손을 얼떨떨하니 쳐다보면서 나는 우리 자세가 마치 샴쌍둥이 같다고 생각했다. …한쪽의 식성이 특출나게 강한 탓에 엄마 배 속의 영양분을 일방적으로 먹어 치우며 크게 자라난, 비대칭 샴쌍둥이 같다고.
“…….”
그리고 재차의의 말이 틀렸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서 펑펑 보내는 시간은 아주 길되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는 의문도 죽음에 대한 갈망도 마음 찢어지는 낙담도 모두 떠나고 빈자리에, 나와 재차의만 남았다.
그의 거친 손바닥이 주는 부드러운 온기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