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63)화 (63/76)

63.

뒤이어 낯선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힐끔 뒤를 살피자 내 테스트 상대라던 파수꾼이 보였다. 허둥지둥 나를 쫓아 달리는 두 다리가 길쭉했다.

그러나 다리로 따지자면 내가 더 길다. 달리는 속도도 내가 더 빨랐다. 절박하기로도 나는 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서 나는 앞만 보고 도망쳤다. 기다랗고 큰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놀란 헛숨 소리며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고, 두어 명과는 어깨를 부딪혔다.

그리고 문득, 나는 크게 휘청거렸다. 왼쪽 무릎이 안으로 훅 말리는 느낌이 일더니 갑작스럽게 전신이 기울어졌다. 그 즉시 ‘쿵’ 소리를 내며 복도 한복판에 크게 나자빠지고야 말았다.

“헉…, 헉.”

가슴에서부터 얼굴까지 끓어올라온 열기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는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는 조금 전만 못했고, 무릎의 통증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한 발짝 세게 디딜 때마다 무릎뼈 속에서 날카로운 돌조각이 헛도는 듯했다.

나는 이 고통을 이미 알았다.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게이트 돌발 사고에 휘말려 가족을 전부 잃었던 여름에 얻은 고통이었다. 바지가 다 찢어지도록 다리를 다친 채로 나는 게이트 속을 오래 헤매어 다녔었다. 기적적으로 구조된 뒤에도 무릎의 회복이 더뎌,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니라는 진단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목발은 단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 무릎이 다 낫고 계절이 바뀌도록, 삼촌이 날 골방에 가두어 놓아서 걸을 일이 없었으니까.

‘뭐지…? 도대체 뭐야?’

넘어질 듯 말 듯, 휘청휘청 달리면서 나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복도의 끝에, 벽 한 면을 다 채우도록 큰 거울이 보였다. 한데 거울 속 내 모습이 이상했다. 이상하게… 어렸다. 푹 꺼지고 파리하던 눈 밑 살은 통통하고 붉었다. 얕게 파이고 딱딱하던 뺨과 턱은 미묘하게 둥그스름했다. 키는 여전히 크고 길쭉길쭉한데, 어깨며 허리의 윤곽이 이상하게 어렸다. 꼭… 고등학생처럼.

혼란한 마음에 나는 또다시 비틀거렸다. 지끈거리는 무릎을 억지로 움직여, 모퉁이를 돌아 계단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숨 가쁘게 달리는 방향을 틀자마자, 아주 커다란 것이 내 얼굴이며 어깨에 세게 부딪혔다. 반동으로 인해 머리가 뒤로 휙 쏠리도록 강한 충돌이었다.

곧바로 뒤로 무너지려는 내 몸을, 대뜸 닥쳐온 두 팔이 와락 붙잡아 안았다.

“헉…! 헉…!”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눈을 감았는데도 선명한 빨간색이 보였다. 두 발이 허공에 붕 뜨는 감각이 꿈 같았다. 흉곽이며 허리는 근육이 바짝 긴장될 만큼 단단하게 조였다. 그리고 커다란 손아귀가 내 뒤통수를 붙잡더니 앞으로 내리눌렀다. 누군가 나를 고스란히 떠받아 끌어안고, 내 얼굴을 제 어깨에 파묻게 한 것이었다.

“잡았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하아…, 허억….”

차오르는 숨을 헐떡헐떡 내뱉을 뿐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얼굴을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이미 알았다. 몸의 긴장이 죄 풀리고 갈비뼈마저 느슨해지도록 안정된 기운, 크고 뜨끈한 품에서 풍기는 특유의 진한 체취, 고급스러운 옷으로 포장된 우아하고 거친 몸….

떨리는 팔을 들어, 나는 그를 아주 천천히 마주 안았다. 그의 날개 뼈를 붙잡으며 옷 위로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남몰래 훔쳐 와 밤새 끌어안던, 속 빈 재킷이 아니다. 부드러운 원단 안에 든 큰 몸은 델까 봐 겁날 만큼 따듯하고, 내 허리에 감긴 굵은 두 팔은 집착이 느껴지도록 억세고도 강인했다. 눈살이 찌그러지도록 두 눈을 꽉 감은 채 나는 그 감각을 만끽했다. 재차의의 품에 안겨, 그의 부피감을 가만히 느꼈다.

그리고,

“…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으며 뒤늦게 말했다.

“이거…, 놔요.”

두 번째 되새김질하듯 을러 놓자, 재차의가 제 몸에서 나를 가볍게 떼어 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였다. 큼지막한 두 손에 팔뚝을 단단히 잡혀, 그가 팔을 뻗는 대로 허공에 매달려 있자니 어색해서 닭살이 돋았다.

당황한 나를 눈앞에 놓고 재차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 동작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그, 빌어먹을 잘생긴 얼굴로 뻔뻔하게 선보이는 새끼 고양이 같은 습관은….

“왜 화가 났지?”

내 두 눈을 직시하며 재차의가 물었다. 아주 쉽고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렇듯 입을 닥쳤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물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은지조차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몸은 저리고 머릿속은 얼떨떨한 내게로, 직원 여럿이 터덜터덜 다가왔다. 나를 쫓아 달리던 반동을 못 이겨 떠밀리듯 움직이는 걸음이었다.

“하아, 재, 재차의 님…. 얘가 갑자기, 헉, 도망치는 바람에….”

헐떡헐떡 바쁜 숨소리를 섞어 가며 남자 파수꾼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재차의의 시선이 내 두 눈에서 떨어지질 않아, 내 시선 또한 그의 눈동자에 꽉 묶인 탓이었다.

“…도망을 쳐? 송모래가 왜?”

재차의가 물었다. 만일 물건이었더라면 바닥을 뚫고 처박혔겠다 싶게 무거운 목소리였다.

설명은 안후이의 몫이었다.

“그, 그게, 하아…. 매칭 테스트를 해 보려 했거든요. 가이딩 실력을 좀 보려고요. 그런데 학생이, 음, 테스트 룸 기계를 보고 놀랐나 봅니다.”

“왜?”

“네? ‘왜’…? 그야, 재차의 님께서 이 학생을… 가이드라고 소개하셨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깊이 매료됐다. 오직 그만이 내 기억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치의 변함 없이 똑같았다.

“송모래는 내 가이드인데, 왜 다른 놈과 그 방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심지어는 나의 외모마저도 달라지고야 만 지금, 내겐 눈앞의 재차의만이 진짜였다. 무뎌진 현실 감각을 깨워 주는 알림이었고, 힘껏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온 세상이 낯선 나를 재차의는 깊은 포옹으로 감쌌다. 그의 가슴팍에 바짝 안긴 채, 나는 왼뺨에 와 닿는 재차의의 부드러운 뺨을 느꼈다. 그리고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송모래. 네가 이해해. 저것들은 자유 의지가 너무 강해.”

신이나 뱉을 수 있을 법한, 무척 오만한 말이었다.

잠시나마 나를 달래던 안일한 안도감은 금세 떠났다. 재차의의 팔에 안겨 매칭 테스트 룸으로 돌아온 순간, 날카로운 경각심이 내 뇌리를 찔렀다.

턱을 까딱이는 것으로 직원들을 전부 내보낸 뒤, 재차의는 직접 기계를 만졌다. 정확히는 커다란 기계와 전선으로 이어진 탐지기를 여럿 집어 들었다. 그 모습 또한 내 기억과는 달랐다. 깔끔하고 조그맣던 부착형 탐지기가 아닌, 큰 기계에 주렁주렁 빨갛고 푸른 줄로 이어진 탐지기는 훨씬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인상을 풍겼다.

기다란 줄을 흰 바닥에 늘어뜨리며, 재차의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셔츠 밑단을 걷어붙이고 가슴이며 배에 탐지기를 부착했다. 푹신한 쿠션 벽에 등을 파묻은 채 나는 허수아비처럼 굳어 버렸다. 도망을 쳐도 소용이 없고, 반항조차 의미 없는 상황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몸이 바짝 언 대신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작금의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진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내가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순간으로 돌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주어진 시간이 1분이라도 충분했을 텐데. 아니, 1분이 다 뭐야. 두 분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의 순간으로 가, 단 1초라도 좋다. 그랬더라면 살기를 포기하고 나도 같이 죽어 버렸을 텐데. 믿었던 삼촌의 가이드가 되어 착취당할 줄을 알았더라면…. 하필 다시 장례식날로 돌아와서, 그가 아닌 재차의에게 끔찍한 짓을 당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러자 원망이 더럭 피어올랐다. 정확히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도 몰라, 갈 길 잃은 원망은 차가웠다.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다시 살려 낸 거야? 왜?’

이내 재차의의 커다란 손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모든 게 나를 미치게 했다. 그의 집게손가락에 잡힌 납작한 탐지기도, 새빨갛고 새파란 전선도, 그리고 마지막 탐지기를 관자놀이에 붙이자마자 벌어질 더럽고 추잡한 짓거리도….

“아야.”

재차의가 외쳤다. 멀뚱멀뚱 눈을 끔벅거리며 아무 감정 없이 뱉은 소리였다. 그 덤덤한 비명을 들은 뒤에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이상하게 머리가 늦고, 몸은 빨랐다. 정확히는 이가 빨랐다.

나는 재차의의 손날을 깨물었다. 그리고 놓아 주질 않았다. 있는 힘껏, 내 턱을 쥐어 짜내고 재차의의 살점을 뜯어 낼 기세로 세게, 온 힘을 다해 악물고 또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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