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기질이 어지간하질 않고서야, 요즘처럼 대슈망이며 파수꾼이며 하는 것들이 지도자로 부상한 시대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사채업자 형님들의 수다나 라디오 뉴스 따위로 주워들은 간단한 인물 소개만 듣고도 나는 그가 생득적인 혈통을 지닌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형님들의 어깨 너머로 만나 본 조직원의 충성심이 딱 그렇게, 매우 착실하게 계보를 따라갔었으니 말이다.
막 나가는 연쇄 살인마보다 무서운 게, 마땅히 우두머리 자리에 서야 할 근본적인 이유를 지닌 보스였다. 그런 치들과는 되도록 함부로 말도 섞어선 안 됐다. 주차장에서부터 호스 물로 트럭 타이어의 피를 씻어 내는 조직원들을 만나기 십상이고, 찢어진 입을 얼기설기 꿰매 놓은 덩치 큰 깡패를 문지기로 세워 두거나 했으므로.
“노사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내게 방패라고는 노사장의 이름이 지닌 신용, 그게 전부였다. 본래 ‘노사장’이란 의적 우두머리를 지칭하던 말이라더니, 법이 닿지 않는 바닥에선 그레이존의 노사장도 그와 비슷하게 통했다. 나를 불만스럽게 살피며 헬멧을 벗으라고 요구하던 문지기조차 노사장이 보낸 사람이라는 설명 앞에선 말을 삼갔다.
큰 손으로 내 재킷이며 바지 주머니를 한 번 확인하더니, 그는 쉽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운이 좋다’고 중얼거렸는데, 나로서는 영 뜻을 알기 힘든 소리였다.
그렇게 들어선 방 안은 온통 어두웠다. 창문 밖으론 도시의 야경이 환하고 카펫 위에는 가죽 구두가 떨어져 있고, 공기 중에는 담배 냄새와 술 냄새, 밤꽃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나는 그 모든 게 매우 전형적인 악당 보스 같다고 생각했다.
적갈색의 기다란 소파 가장자리에 앉은 보스를, 그리고 그 옆으로 긴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나신의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진 그랬다.
“…….”
일순 말문이 막혀 굳어 버린 내게,
“그래, 돈을 받으러 왔다고?”
사악하고 못된 보스여야 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담아 드려.”
보스는 놀랍도록 쉽게 약값을 지불했다. 허공에 대고 담뱃불을 툭 퉁기더니 그는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불곰 같은 부하가 금고 앞에 앉아 가방에 돈 묶음을 차곡차곡 챙겨 넣는 동안, 나는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인 채 방 안의 무엇도 보지 못하는 척 행동했다.
남의 피를 채운 물침대며 뼈를 팔아 치운 돈방석에 앉은 작자들 중 고등급 뉴타입이 많은 것이야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 치들이 옆구리에 가이드를 하나씩 끼고 지내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조차 않던 남들의 파트너십이 오늘의 내겐 뭉근하게 상처가 됐다. 거칠기 짝이 없는 세계의 조직폭력배 보스조차 제 곁에 누워 잠든 가이드에겐 상냥하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다가 덮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꼭 나만큼 키가 크고 체격 좋은 가이드의 머리를 뼛조각 덜 다물린 아기 머리 다루듯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
지난날의 재차의가 생각나 나는 억지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굼뜬 불곰이 돈 가방을 내줄 때까지, 잠든 나의 뒤통수를 받쳐 주던 단단하고 넓던 허벅다리를 기억에서 밀어 내고 또 밀어 냈다.
불곰은 돈 가방에 자물쇠까지 채워 주었다. 열쇠는 흰 봉투에 따로 담긴 채였다. 가방을 받자마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혹여 붙잡힐세라 빨리 건물을 떠났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서 바이크에 올랐고, 묵직한 가방을 상체 앞에 거의 동여매다시피 단단히 고정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대로 불편한 도시를 뜨려던 순간 나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저 먼 길 건너에 재차의의 얼굴이 있었다. 실제 재차의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담은 전광판 영상이었다. 느릿느릿한 손으로 나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고, 홀린 듯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높다란 건물 외벽에 박힌 전광판은 예전에 게이트에서 본 것만큼 환하지는 못했다. 그땐 주위에 빛이라고는 일절 없어 그것만이 해 같고 달 같고 별 같았으니까. 사방에서 비쳐 드는 자연광으로 인해 오늘의 전광판은 무척 흐려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재차의는 내게 있어 이전보다 더욱 짙은 사람이었다.
전광판 속 재차의는 사방을 메운 인파를 지나 무심한 얼굴로 움직이는데, 어째선지 자막도 홍보 문구도 없어 어떤 상황인지 불분명했다. 하단에 조그맣게 보이는 수화하는 아나운서를 보자마자 나는 그것이 뉴스 생중계 화면임을 알았다. 실시간으로 이동 중인 재차의를 비춘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 거지? 괴수라도 출몰했나? 옷차림은 꼭… 상 받으러 가는 사람 같네.’
재차의는 여전히 멋있고 대단하고, 완벽해 보였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넘긴 흑발이며 모든 선과 각이 뚜렷한 얼굴, 곧게 뻗은 목과 넓게 벌어진 어깨, 나신이 절로 상상되도록 전신에 딱 맞추어 입은 슈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곁엔 내가 아닌 윤도곤이 함께였다.
“아….”
헬멧 속에 내가 뱉은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하긴, 이제 재차의가 제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 줄 가이드는 내가 아니다. 아주 뻔하고 당연한 사실이라 마음 아파할 가치도 없다. 나도 안다.
‘알긴 아는데….’
무거운 머리를 위로 추켜든 채 나는 전광판을 한참 더 바라봤다. 재차의가 릴리에 오르고, 윤도곤이 그를 따라 모습을 감추고, 그들을 태운 릴리가 기자들의 셔터 불빛 속에 사라질 때까지. 전광판 화면이 완전히 다른 광고로 바뀌어 이름 모를 모델의 얼굴로 가득 찰 때까지.
헬멧 안을 채운 습기를 닦아 낼 틈도 없이 나는 바이크를 몰았다. 일부러 과속을 하며 복잡한 길을 단숨에 돌파했다. 머릿속에는 어서 그레이존으로 돌아가 새 할 일을 받아 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더 번거롭고 더 힘든 일, 더 위험하고 더 구차한 일. 그런 일이 내게 필요했다. 내 머릿속을 서서히 가라앉혀 침수시키려는 재차의라는 존재를 밀어 내려면….
가로등도 다른 차량도 전혀 없는, 시커멓게 텅 빈 고속도로를 아무렇게나 질주했다. 그러면서 나는 핸들을 잘못 꺾거나 역주행 차량을 만나는 상상을 했다. 구조물에 부딪혀 바이크의 앞이 찌그러지고 내 몸은 절벽 밖으로 떨어져 심장 마비 상태로 낙하하는 상상을 했고, 역주행 혹은 음주 운전 차량의 과실로 인해 치여 갓길로 튕겨 나간 다음 119 신고도 없이 버려지는 상상을 했다.
비참한 죽음을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떠올리는 일이 어째선지 작금을 버티는 데에 도움이 됐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맞아 죽고, 약에 절어 죽고,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었으며 이따금 슬퍼 죽었다.
***
너무 잦은 죽음을 상상한 탓일까. 내 상상의 나래를 하늘이 소망으로 착각하기라도 한 걸까. 죽음의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달리는 말발굽에 차이듯 찾아들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잠에 들 수 없게 된 지 열흘째였다. 이틀 내내 바이크를 몰아 가며 일부러 과로하고, 녹초가 되어 노사장이 내준 조그만 방에 들어가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이전에 내 악몽은 삼촌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새로이 마주한 악몽은 재차의의 얼굴을 달고 있었다. 전자는 순 미워하면 그만이라지만 후자의 경우엔 내 속에 후회가 남아 그저 미운 마음만으로 넘기기가 버거웠다.
‘그냥 참고 대슈망에서 지낼걸. 그럼 재차의 얼굴이라도 보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정한 악몽을 꾸고 난 새벽, 내 몸 위엔 재차의의 재킷이 덮여 있었다. 나는 그 옷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잠결에 짐가방에서 직접 꺼내어서는, 재차의가 내게 덮어 주는 것이라고 멍청한 착각을 하며 추운 몸을 덮은 기억이 났다. 폭력배 보스의 예쁨이라도 받던 가이드가 어지간히 부러웠었나 보다.
“…….”
재킷 옷깃을 움켜쥐고는 코를 대 보아도, 얼굴 전체를 세게 문지르고 숨을 들이마셔도 더는 재차의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옷을 입었다. 재차의의 덩치는 어지간한 남자의 체격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 그의 재킷이 내게는 품이 조금 남고 길이가 넉넉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덩그러니 앉은 자리에서 눈만 끔벅이기도 잠시, 나는 벌떡 일어나 헬멧과 바이크 열쇠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헐레벌떡 노사장을 찾아갔다.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마…. 후회해도 이미 늦었잖아.’
대슈망 센터로는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둑질을 하고 귓불까지 제 손으로 잘라 낸 데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이재를 쓰러뜨리고 도망을 쳤으니, 다시 돌아가 봐야 센터에는 내가 일할 자리가 없을 것이고 모두가 날 비웃으며 깔깔댈 거라 생각됐다.
아니, 애초에 대슈망 센터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고, 새벽 공기를 쬐며 돌길을 걷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잊고 잘 지내고 있을 재차의를 보러 가고 싶지 않다고, 두 번 다시는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다고, 그가 아무리 찬란한 남자래도 무채색의 세상을 살다 보면 내 안에서 잊혀질 거라고. 다만 그날이 오늘은 아닐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