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56)화 (56/76)

56.

대슈망 센터에서 벗어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향한 곳은 폐쇄 구역, ‘그레이존’이었다. 이곳은 정부 혹은 대슈망의 편도, 그렇다고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 혹은 사이비 종교 단체의 편도 아닌 모호한 입지에 선 이들이 다닥다닥 모인 게이트다. 스티치 없이 방치된, 이른바 주인 없는 땅으로 내부는 온통 돌산으로 이뤄졌다. 대슈망에선 핵을 찾아 박살 내기 위해 세금을 들여 돌산을 깎고 또 깎았으나 끝내 나타나는 핵은 없었고, 그렇게 조성된 평지에 떠돌이들의 마을이나 생겼다.

외부 간섭은 물론이며 외부인을 일절 받지 않는 폐쇄적인 이 구역에 손쉽게 출입할 수 있는 이유는, 나도 이전에 이곳의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그레이존에 처음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삼촌이었다. 정액 냄새 풍기는 골방에 틀어박혀 천장의 곰팡이 얼룩에서 사람의 얼굴을 찾아 그 형체에 이름을 붙여 줄 무렵에, 삼촌은 내게 외출을 허락했다. 그렇게 삼촌과 함께 그의 용병단 사무실에 들르기도 했고 덜 위험한 게이트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내 팔뚝에 쑤셔 넣을 발정제와 혓바닥에 붙일 마취 약을 사러 이곳 그레이존에 자주 들렀다.

삼촌의 죽음으로 대뜸 자유를 얻게 되어 혼자가 된 날 나는 이곳을 다시 찾았었다. 4년을 처박혀 지내던 골방보다 작은 숙소를 얻었고 두 달을 살았다. 자그마치 열여섯 계절 동안 내 몸을 점령해 온 마취 약에 중독된 탓에,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어서였다.

약값은 길거리를 오가며 자잘한 심부름이나 막노동을 해 주는 것으로 충분히 벌 수 있었다. 몇몇 약쟁이들은 내게 키스나 대딸을 요구하며 더 좋은 마약을 줄 수 있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 치들의 앞니와 콧대를 부러뜨리는 싸움을 너무 자주 벌인 탓에, 그레이존의 간부로부터 누적 경고를 아홉 번 받기도 했다.

보통 경고라는 건 두 번 이상 쌓이면 퇴장 처리해야 정상인데, 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간부라 해 봐야 별명은 깐부고 호칭은 ‘노사장’인 마음씨 퍽 넓은 여자 하나가 다였는데, 그 노사장이 나를 아껴 준 덕이었다. 삼촌이나 다른 약쟁이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성행위를 바라서는 아니었다. 노사장은 저보다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중년의 여자와 사실혼 관계였으니까. 노사장이 나를 좋아하는 건 단지 어떤 심부름을 시키든 곧잘 물건을 가져온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별도의 쾌락 없이 온몸을 그저 마비시키기만 하는 마취 약에 중독된 내가 불쌍하다고도 했다.

‘송모래 이 개새끼! 불쌍한 새끼! 불쌍한 새끼!’

…마약 시장 한복판에서 싸움질을 벌여 경비대에게 끌려온 날 볼 때마다, 노사장은 그렇게 외쳤었다.

‘불쌍해서 봐주는 거야! 경고! 경고!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노사장이야말로 최고의 마약 제조범이라는데 참 고까운 동정이었다. 그렇게 선언한 ‘마지막’은 ‘진짜 마지막’이 됐다가 ‘진짜 진짜 마지막’이 됐다가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 됐다가 또 ‘최종 마지막’이 됐다가 ‘진짜 최종 마지막’이 됐었다. 죽은 삼촌이 진 빚을 갚으라며 빚쟁이들이 쳐들어와 게이트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 전까진 그랬었다.

노사장에게 불려 갈 필요도 없이 나는 제 발로 그레이존을 떠났다. 삼촌의 사채 빚은 너무 많았고, 사채업자들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들이라 억지로 뻐기다가는 그레이존의 규칙을 무너뜨릴 수도 있어 별수 없었다.

대슈망에서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생활로 사채업자들과의 인연을 청산하고, 2년 만에 돌아온 그레이존은 이전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발전도 없었고 쇠퇴도 없었다. 시꺼먼 석산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한 마을은 여전히 반쯤 죽은 약쟁이들로 가득했다.

검은 볼캡 모자를 눌러쓴 채 나는 뒷골목 시장으로 가, 훔친 소품들을 다 팔았다. 대슈망 센터에서 가져온 것들이야 모두 명품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인증서가 없어 가품 취급을 받아야 했다. 가품을 팔려고 할 땐 ‘아무리 잘 만들었더래도 내 눈은 못 속여’ 하고 별 으름장을 다 놓던 장물아비가, 진품을 가져다주어도 가품 값을 주니 황당했다.

‘이이재한테 들키지만 않았어도 이 못된 할배한테 안 올 수 있었는데….’

재차의는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윤도곤과 뒹굴 테니, 본래 계획대로라면 내겐 이틀의 여유가 있어야만 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값을 가장 잘 쳐 주는 장물아비를 찾아 물건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이재에게 들키고 그녀의 가이드까지 나를 봐 버린 탓에 아무런 여유도 없이 그레이존에 들어와야만 했다.

“팔 거야, 말 거야? 나보다 잘 쳐 주는 사람 없을걸.”

‘구라 치시네.’

장물아비가 내민 현금을 낚아채듯 받았다. 그리고 바로 건너편의 가게로 가, 중고 바이크를 한 대 샀다.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왔으니 전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가이드로선 일을 할 수 없었다. S급 가이드라는 허황된 명함으로 너무 유명해져 세상 밖에 얼굴을 내밀기도 멋쩍었다. 언변이 좋았더라면 가이딩 사기로 큰돈을 벌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그러니 바이크를 끌고 노사장을 찾아갔다. 노사장이라면 내 맨몸과 바이크 한 대만 있어도 할 수 있고, 또 돈도 되는 일을 줄 거라 믿었다.

“돈이 필요해요. 그리고 할 일도요.”

철제 계단이 큰 소리 내며 삐걱삐걱 흔들리는 빌라 건물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 그렇게 말했다. 가죽 소파에 앉아 생쥐에게 쥐포를 뜯어 주다 말고, 노사장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날 봤다.

“너 이 개새끼!”

그러더니 당황한 듯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래 봐야 노사장네 작업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품들과 다섯 대의 냉장고, 미닫이문으로 가려진 더러운 미친 과학자의 구역이 다였다.

다시금 나를 홱 노려보며 노사장이 으르렁거렸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왜 여기로 왔어? 대가리에 총 맞았니?”

난데없는 비난에 나는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빚 다 갚았는데요.”

그러자 노사장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누가 빚쟁이 쫓아올까 봐 이래? 너 돈 잘 버는 거 모르는 한국인이 어딨다고! 내 말은, 대슈망에 있을 놈이 왜 여기서 일을 찾냐고! 재차의한테 손발가락 스무 개 다 빨리면서 잘 먹고 잘살아야 할 놈이!”

재차의.

세 글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슈망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 이름까지 회피할 순 없음을 각오했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가슴이 아팠다.

“…관뒀어요.”

애써 표정을 굳히며 최대한 아무렇잖게 대답해도, 노사장은 눈치가 빨랐다.

“도망쳤구나!”

이번에 나는 대답 없이 유리관 안의 생쥐를 구경했다. 그리고 내 침묵에 차게 질린 노사장이 ‘너, 너 이 새끼…’ 하며 상황을 파악하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손안에 쥔 쥐포를 생쥐에게 통째로 던져 주면서, 노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 자리로 가 밖을 내려다보며 잠시간 제자리걸음했다. 아마도 빌라 앞에 대놓은 내 바이크를 보는 듯했다.

전전긍긍하며 고민한 끝에 그녀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여기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대슈망에서 널 찾으러 오면 뭐라고 해야 해?”

그 질문에 나는 좀 의아했다. 대슈망에서 나를 찾는다 한들 그레이존까지 쳐들어오진 않을 거였다. 내게 입사 제의를 하던 시절에도 게이트까지는 날 찾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쓰레기촌 빌라 문이나 좀 두드리고 편지나 날릴 게 뻔했다. 아니지, 어쩌면 그 정도 관심도 과대망상이다. 그때는 윤도곤이 없어 그의 대체재가 필요했었지만 더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를 찾아 사방팔방을 다 뒤진다고 쳐도, 왜 노사장한테서 날 찾겠는가?

“노사장이 뭔데요. 그렇게 대단해요?”

“이 새끼 봐라?”

내 질문에 성질이 뻗친 듯 노사장은 팔짱을 꼈다. 버르장머리 없는 나를 길게 노려보다가 피식 웃기도 했다. 건조한 입꼬리를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노사장은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도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지 않니?”

“그럼 죽었다고 하세요.”

“하아!”

답답해 속이 터지는 모양을 표현하려는 듯 노사장은 두 손을 허공에 휙 뻗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제 뒷머리를 벅벅 소리 나게 긁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감았는지 알 수 없게 떡 진 머리카락이 말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저 손이랑 악수하지 말아야지.’

심드렁하니 선 나를 두고 노사장은 쯧, 쯧, 쯧… 크게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재차의가 금세 널 찾아낼 거다, 내가 장담해.”

‘아닐걸요.’

내 예상은 노사장의 당당한 확신과 정반대였다. 재차의는 나를 굳이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럴 만큼 한가한 파수꾼도 아니거니와 그럴 이유도 딱히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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