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쏟아져 들어오는 불빛이 너무 강렬해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좁히며 내가 물었다.
“뭡니까.”
그러자 윤도곤이 선 자리에서 두 발을 주춤거렸다.
“저, 제 물건을 가지러 들른 거였는데요. 그런데 송모래 님, 귀….”
그렇게 말하는 윤도곤의 오른쪽 귀에, 형태와 색깔은 물론이며 무게감마저 익숙한 귀걸이가 박혀 있었다. 내가 도려낸 것과 완전히 똑같은 까만 귀걸이는 그의 새하얀 머리칼 밑에 놓이자 더욱 뚜렷해 보였다. 분명 똑같은 장신구인데 풍기는 인상은 아주 딴판이었다. 내 귀에 붙어 있을 땐 영 이질적이더니, 윤도곤의 여우처럼 예쁘장한 얼굴과는 참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생사 불명으로 실종됐던 그를 환영하면서 위치 추적기부터 달아 줬을 사람이 누굴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오직 하나다.
‘송모래, 너는 내 거야.’
나로서는 평생 한 번이라도 말해 볼 날이 있을까 싶게 간지러운 말을 확신에 가득 차 속삭이면서, 내 몸에 이미 뚫린 구멍도 새로 뚫을 구멍도 제 것이라던… 재차의.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돌아온 윤도곤에게도 같은 말을 해 줬을까? 그래, 그랬겠지. 걱정하지 말라며 윤도곤을 달래고, 다신 게이트에 너를 혼자 두고 오지 않겠다고 꼬드겼을 거야. 여린 귓불 살에 바늘을 대고는 부쩍 즐거워하면서 박아 줬겠지…. 오늘 못다 한 회포를 풀 겸, 내일은 가이딩을 빙자하며 섹스로도 그리할 거고.
‘아….’
이런 짐작을 아무렇잖게 하는 나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어쩌다 이런 천박한 속물이 다 된 건지 머릿속이 단숨에 복잡해졌다. 보풀이 튀어나온 옷을 입고 생활고에 시달릴 땐 책 속의 시를 외우고 여느 날의 해돋이를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겐 그때의 감상적인 태도가 조금도 남아 있질 않았다.
작은 낙담에 입을 다문 내 앞에서, 윤도곤의 시선은 문가의 명패에 머물렀다. 나도 그와 함께 808호의 명패를 바라봤다. ‘송모래’ 세 글자의 모서리조차 닳지 않아 선명했다.
몇 초간 침묵한 끝에, 나는 크게 실소했다.
‘자기 물건을 가지러 들렀다고…. 이 방에?’
어쩐지 방을 채운 가구는 물론이고 작은 소품들까지 취향이 아주 분명하게 도드라진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가이드의 방엔 초대받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들 방의 인테리어는 내 방과는 다르지 않을까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나에게 주어진 방, 808호는 마치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혹은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방 같다고….
내 이름을 부랴부랴 찍어 넣은 새 명패가 달리기 전에는, 같은 자리에 윤도곤 세 글자가 박혀 있었나 보다.
“송모래 님.”
아주 작게 속삭이듯이 윤도곤이 말했다.
“지금… 도망치시는 겁니까?”
나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재차의가 없는 자리에서 만난 윤도곤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회의실에서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뻣뻣하게 굴더니, 지금 그는 훨씬 덜 도도한 데다 적극적이었다. 선 자리에서 고민하는 듯 제자리걸음하고, 입술을 짓씹는 동작은 얼핏 나를 걱정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 이중인격자인가?’
나는 그가 원래 아리송한 사람인 건지 재차의의 파트너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 궁금했다.
이제 와 보니 윤희수는 제 형을 쏙 빼닮았다. 물 탄 듯 색이 바랜 머리칼과 밝은 눈동자도 그렇지만, 동그란 이마며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길쭉한 눈매가 거의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윤도곤이 훨씬 침착하고 표정이 더 적다는 것뿐이다.
침묵 끝에 윤도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왕이면 최대한 멀리, 빨리 떠나세요.”
“하….”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해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그러잖아도 최대한 멀리, 빨리 떠날 생각이었다. 가려는 사람 앞길 붙잡고 착한 척 걱정하는 척은 다 하더니, 얼른 가라며 등 떠미는 말이 나를 황당하게 했다. 조금은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이래서는 꼭, 내가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다.
하긴 윤도곤의 입장이야 뻔하다. 저 없는 사이에 재차의의 파트너 자리는 물론이고 제 방까지 꿰차고 있으니, 그의 눈으로 볼 땐 나야말로 굴러 들어온 돌일 터였다. 울퉁불퉁 모난 돌이 웬일로 알아서 빠져 주겠다는데 싫을 리가 있나. 쌍수를 들고 배웅하는 게 신기하진 않았다. 그저 기분 나쁠 뿐이지.
입을 다물고 나는 무거운 가방을 고쳐 멨다. 그러자 윤도곤이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송모래 님.”
악수라도 하자는 듯 대뜸 내민 그의 손을 나는 반사적으로 거칠게 쳐 냈다. 성질이 치밀어 묵묵히 넘어가 줄 수가 없었다.
“남한테 오지랖 부릴 시간 있으면 동생 교육이나 똑바로 시켜요.”
버럭 말을 뱉어 놓고 나는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더는 윤도곤에게 쓸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충분히 늦은 시간이었고 다른 날에 비해 호텔 전체가 잠잠하긴 했으나, 누구 하나라도 마주쳐선 곤란하기에 승강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차라리 나를 고깝게 여기는 가이드를 만나면 또 모를까, 문소여나 이이재처럼 오지랖 넓은 파수꾼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무시당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계단을 내려가자니 허벅다리가 타는 듯 아팠다. 고개를 휙 숙여, 혹시 바지 위에 묻어나는 핏방울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게 다, 재차의가 남의 몸 귀한 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때려 댄 탓이었다.
“…….”
그래도 그와 몸을 섞은 일 자체가 후회되진 않았다. 백 번 부정하고 천 번 거부해 봤자, 그와 살을 맞대면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게 사실이다. 덕분에 코피가 멎고 전신에 기운이 돌아서는, 이렇게 야반도주를 할 기회를 얻었다.
호텔 로비에 도착해 나는 가방을 고쳐 멨다. 그리고 일부러 아주 천천히 경비원 앞을 지나며 평소와 같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비원은 잠시간 내 가방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시선을 거뒀다. S급 가이드인 송모래가 도주 중이라곤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호텔 밖으로 나와서는 볼일도 없는 본관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경비원이 살피고 있을 것에 대비하여, 두리번거리거나 서성이는 기척 없이 저벅저벅 걸어 본관 후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움켜쥐었던 문고리를 놓으면서 나무 뒤로 숨어들었다.
수풀 너머에 몸을 앉힌 채 호텔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경비원이 보였다. 짐 가방을 든 내 모습이 의아했던지 그는 호텔 정문 앞까지 나와서는 본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전기를 꺼내 들거나 내 쪽을 향해 오는 동작은 없었다. 그대로 몇 초간 서 있는가 싶더니 그는 기지개를 켜며 호텔로 돌아갔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눈치를 오래 살폈다. 숨죽이고 귀 기울이자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 떨어진 산책로를 가이드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밤공기를 쐬며 걷는 그들의 유니폼이 워낙 하얘서 꼭 소복 입은 귀신처럼 보였다. 인기척이 충분히 멀어지기를 기다린 뒤, 나는 별관까지 일부러 먼 길을 둘러 걸었다. 목적지는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 커다랗고 환한 터널이었다.
“…….”
릴리를 타고 오갈 때마다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던 터널은 그러나 무척 껌껌했다. 느릿느릿 다가서면서 나는 두 눈을 여러 번 끔벅거렸다. 혹시 터널이 완전히 닫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터널은 작동을 멈춰 어두울 뿐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나를 반겼다. 한숨 같은 콧김을 흥 쉬며 나는 어둠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내 두 발은 우뚝 멈추고야 말았다. 충분히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보인 인영이 둘 있어서였다.
“어?”
내가 그들을 발견했듯이 그들도 내 형체를 알아보고 목소리를 냈다.
“송모래 님? 어디 가세요, 이 시간에?”
음성이 커다란 터널 안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검은 상의에 노란색 파자마 바지를 입은 이는 이이재였다. 평소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파트너 가이드도 함께였다.
“…….”
머릿속이 파래진 채 나는 침묵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이재의 검지 위엔 작은 불씨가 피어올라 있었고, 키는 멀대 같고 덩치는 곰 같은 남자 가이드는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문 채였다.
대슈망 센터는 호텔은 물론이며 본관에도 별관에도 금연 시설이 없었다. 흡연 자체가 엄중히 금지된 곳이었다. 그러니 남들 눈길을 피해 담배를 피우려고 이곳 터널 앞까지 함께 나온 모양이었다.
이이재가 허공에 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녀의 검지 위에서 조그맣게 타오르던 불씨는 성냥의 크기를 지나 어린 뱀처럼 일자를 그리며 위로 솟았다. 마음 안의 의심이 곧바로 불꽃의 형체로 드러나는 듯했다.
“송모래 님, 지금 설마…?”
이이재의 부릅뜬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크게 손뼉을 쳤다. 아주 세게, 짝 소리가 나도록.
‘송모래가 손뼉을 치면 너희는 즉시 기절한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버려.’
이이재가 고개를 위로 휙 추켜들었다. 손끝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제자리에 우뚝 선 채 하늘을 보는가 싶더니, 그녀는 그대로 벌목을 당한 나무처럼 일자로 쓰러졌다.
놀란 가이드가 소리를 치며 이이재를 받쳐 안았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다 떨어뜨리며 그는 ‘누나’하고 크게 외치더니, 흰자위를 보이며 의식을 잃은 이이재의 머리를 안은 채 허둥지둥했다.
“누나…, 누나! 왜 그래요?”
그 틈을 타 나는 터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가방끈이 불편해, 커다란 가방을 두 팔로 안고 뛰어야만 했다.
“가, 가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송모래 님!”
등 뒤로 절박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허둥지둥 뛰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누나, 이재 누나… 하며 이이재의 어깨를 흔드는 가이드 곁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제 머리 위로 끼친 내 그림자를 물리적으로 느끼기라도 한 듯, 가이드는 날 향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손을 뻗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 손길을 앞에 두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 한 개비와 붉은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터널을 향해 다시 뛰었다.
“어, 어? 어…?”
당황한 듯 버벅거리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잠시간 뒤따라 붙었으나, 전처럼 내 이름을 부르거나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말은 없었다.
나는 조명이 꺼진 터널 안을 질주하고 또 질주했다. 허벅다리가 터질 듯 아프고 종아리가 저릿할 때까지, 재킷 안이 온통 땀으로 흥건해져 헐렁한 소매 밖으로 땀줄기가 빠져나올 때까지, 터벅터벅 뛰는 걸음마다 뚝, 뚝 땀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이도록 열심히 달렸다.
그래도 터널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인 릴리로도 주파에 수십 초가 걸린 터널이다. 사람이 걸어 지나가라고 만든 길이 애초에 아니었다.
흐으… 흡, 흐으… 흡, 쥐 오른 발을 절뚝거리며 나는 힘겹게 숨을 정리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맺혀 속눈썹이 무거워도 닦아 낼 힘조차 나질 않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이 흉곽 안을 치는 느낌이 찌릿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나는 컥컥 기침했다. 연신 콜록거린 끝에 흑…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짧게 나왔다.
별수 없이 걷는 속도를 늦추면서, 조금 전 주워 온 한 개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급스러운 담배 케이스 안에는 지포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젖혀 피워 낸 작은 불에 기대어 자세히 보니 듀퐁 라이터다. 비싼 라이터의 미끌미끌한 몸체를 엄지로 문지르며, 나는 터널 안을 둘러보았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시커멓고 출구조차 가늠이 안 되는 게, 꼭 첫 파견으로 나선 게이트를 닮아 있었다.
이 순간 내게 두려울 것은 재차의의 목소리뿐이었다. 지난날 게이트에서 들은 것처럼,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재차의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이리 와’가 아니었다. ‘돌아와’… 그렇게 부를 것만 같았다.
“…….”
거칠거칠하니 까진 입술로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힘껏 빨았다. 몸에 좋을 것 하나 없는 연기로 속을 채우면서, 나는 떨리는 다리를 질질 끌었다. 눈앞의 저 새카맣고 긴 어둠이 고스란히 내 앞날을 뜻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피우는 담배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천사의 눈물’ 한 병 값을 삥땅 치는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