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54)화 (54/76)

54.

언제 흐트려졌었냐는 듯 말끔해진 모습으로 재차의는 아주 쉽게 나를 떠났다. 그의 발소리가 가시고 몇 초 뒤에야 방문이 덜컹 닫히는 소리를 냈다.

이불 위에 널브러진 채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정액으로 배 속까지 더러워진 내 몸뚱이도 내려다보았다.

“…하.”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아무 예측도, 짐작도 하지 말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말자.

‘일어나, 송모래.’

그래, 일어나자. 일어나서 우선 씻자. 더러워진 몸부터 씻고, 더러워진 이불을 치워 버리고, 오늘은 소파에서 자자. 소파에서….

비틀거리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액으로 인해 얇은 시트가 내 볼기짝에 풀 발린 듯 따라붙었다.

“…….”

누구의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체액으로 더러워진 시트를 천천히 떼어 낸 뒤, 나는 고개를 툭 떨궜다. 그리고 터벅터벅, 재차의가 구둣발로 오간 방을 맨발로 누볐다.

욕실에 들어가 좌절감을 씻어 내리는 대신, 나는 옷장을 열어 해진 가방을 꺼냈다. 손잡이가 달린 커다랗고 까만, 스포츠용 가방이었다. 쓰레기촌 빌라에서 옮겨 온 몇 안 되는 짐이기도 했다. 이 나간 지퍼를 활짝 연 뒤 나는 가방 안에 든 쓸모없는 옛날 물건들을 쏟아 내어 버렸다. 그리고 빈 가방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었다.

먼저 부엌으로 가, 쓸 만하다 싶은 물건들을 무작정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열량 높고 부피는 작은 간식부터 시작해서 값나가 보이는 위스키와 따로 보관된 와인 두 병을 챙겼다. 다음으론 소파 자리로 가 비싸 보이는 금색 시계와 작은 장신구들을 담고, 서랍장을 열었다. 두 번째 서랍의 반으로 접힌 신문 안에는 안후이 부장에게서 받았던 백화점 상품권이 있었고, 그 밑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틈틈이 주워 모은 남의 분실물들이 있었다. 얇은 줄 시계, 팔찌, 훈련실 세안대에서 주운 반지…. 모두 가방 속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 아직 뜯지 않은 생필품을 모았다. 샴푸며 비누 따위를 움켜쥐고 가방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던 중, 거울 속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칼이 다 헝클어지고 두 눈이 시뻘게진 초라한 남자가 거기 있었다. 거울 속에 눈물 줄이 두 줄이기에, 나는 그제야 주먹을 들어 얼굴을 닦았다. 묵직해진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비싼 술병들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달그락달그락했다.

“하아…, 흡.”

젖은 숨을 길게 내쉬고, 들이마시며 나는 감정을 삭였다. 찬물을 틀어 얼른 세수를 하려다가, 세면대에 손을 딛으며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충혈된 눈과 푹 꺼진 눈동자, 하얗게 질린 입술을 지나, 내 시선은 동그란 오른쪽 귀로 천천히 기울었다.

‘송모래, 잘 들어. 이 귀걸이를 제거하는 날에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울 거야.’

가이드의 실종을 방지하는 용도라던 귀걸이는 여전히 새카맸다. 어디에 있던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 자신하던 재차의의 눈동자처럼 검다. 이를 악물고 거울을 노려보다가, 나는 주먹으로 세면대를 내리쳤다. 작은 파열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물 받는 자리에 기다란 금이 갔다.

“…….”

꽉 쥔 주먹을 떨며 이를 악물다가, 나는 주변을 둘러 살폈다. 부엌으로 가 과일 깎는 칼과 가위를 무작정 꺼냈고, 금세 던져 버렸다.

“아냐, 이런 거 말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며 나는 소파 자리 주변을 배회했다. 분명 어딘가에 약상자가 있을 거였다. 귓불 크기에 딱 맞는 쪽가위도 그 안에 구비되어 있을 성싶었다.

넓은 방 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창가 자리 협탁 안에서 백색 약상자를 찾아냈다. 작은 가위와 붕대, 소독용 연고를 양손에 움켜쥐고서 다시 욕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서, 심호흡만 스무 번쯤 한 것 같다.

“후우, 하아아….”

땀에 젖은 손으로 나는 쪽가위를 고쳐 쥐었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콱 씹으면서, 쪽가위의 아주 작고 섬세한 양날 사이에 통통한 귓불을 끼워 넣었다.

“후우…, 후우우….”

그리고… 내게 남은 건 아주 큰 분노였다.

‘재차의, 이… 개새끼!’

흰 세면대에 피를 묻히면서, 도려내다시피 떼어 낸 귀걸이를 땡그랑 소리 나게 떨어뜨려 놓고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씨… 발!”

마른 수건으로 오른쪽 귀를 짓누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통스러울 거라며? 열 배는 더 아플 거라며? 미치광이 사기꾼 새끼!’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릴리에서 그의 손에 붙들려 강제로 귀걸이를 찰 때에, 왜 귀를 뚫을 뿐인데 대가리가 깨지도록 아픈 건가 했었다. 대슈망에서 아주 지독한 물건을 만들었구나, 참 좆같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귀걸이를 강제로 뜯어내고 보니, 그다지 아프질 않았다. 그야 생살을 잘랐으니 아릿하긴 했지만, 이전만큼 막대한 고통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재차의가 날 속인 것이다. 날 겁주려고, 귀걸이를 뺄 엄두를 죽어도 못 내게 하려고, 일부러 큰 고통을 내게 준 것이다. 그 빌어먹을 미친 사이코패스 재수탱이 개망나니 정신 가출한 정신계 능력자가!

“아아!”

분노로 고함을 꽥 지르며 나는 쪽가위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세면대에 떨어진 귀걸이를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못된 새끼, 나쁜 새끼, 개새끼! 속으로 백만 번 욕을 하면서,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침대 자리로 향했다. 이 순간 내게 소원은 오직 하나였다. 재차의에게 아주 작은 엿이라도 정말 작고 소소한 상심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당신도 어디 한번 기분 나빠 봐. 살면서 한 번쯤은 그래야지.’

헝클어진 침대 시트를 대충 정리한 뒤, 베개 세 개를 일렬로 이어 놓고 가운데에 귀걸이를 얹었다. 그러자니 까만 귀걸이에 아주 작은 삼각형 모양으로 붙은 내 귓불 살점이 보여, 오른쪽 귀의 상처가 갑작스럽게 지끈거렸다.

목덜미를 적신 피를 손등으로 대충 훔쳐 내면서 나는 이를 갈았다. 이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재차의 덕분이다. 이보다 천 배 만 배 더 큰 아픔도 각오할 만큼 내 심정을 비참하게, 아주 처참하게 깔아뭉개 줬으니까. 내 맷집을 불필요할 정도로 잘 길러 준 그에게 마음 안으로 깊은 찬사를 보냈다.

후우, 후우… 연신 숨을 가다듬으며 나는 얼추 사람 형체를 갖춘 베개 더미 위에 이불을 꼼꼼히 덮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 대충 몸을 닦아 내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옷장 한편에 얌전히 걸린 검은 재킷을 꺼내어 팔을 꿰어 넣는데, 내 것이 아닌 외투가 한 벌 보였다. 조금 전 재차의가 내 방에 들어오면서 걸어 두고는, 도로 입진 않고 두고 간 옷이었다.

나는 그 외투를 꺼내어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빳빳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외투는 재차의와 달리 쉽게 허물어졌다. 힘주어 안으면 안을수록 내 품 안에서 구겨지며 떠나간 이의 빈자리만을 느끼게 했다.

“하아… 흡….”

재킷 깃에 코끝을 대고 나는 재차의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눈이 뜨거워질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숨만 쉬다가, 겉주머니 두 개와 속주머니 하나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기대와 달리 재차의의 외투 속엔 아무것도 든 게 없었다. 비싸 보이는 재킷이긴 하나 하단에 대슈망 로고가 박혀 있어, 함부로 팔아 버릴 수도 없는 옷이었다. 챙겨 봐야 짐만 될 게 분명했다. 심드렁해져서 옷깃을 노려보다가, 나는 그것을 옷장 안에 도로 넣었다.

“…….”

그러곤 다시금 밖으로 꺼내어, 납작하게 접어 짐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멨다. 충동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었다.

그래도 경솔해선 안 된다. 나는 문소여처럼 쓸모있는 능력자는 못 되기에, 바퀴벌레처럼 아주 조용히, 은밀하게, 남들 눈을 피해 움직여야만 했다. 그래서 방문을 열기에 앞서 핍홀에 눈을 대고 밖을 살폈다. 거의 30초간 눈을 깜빡거리며 관찰만 하는데, 오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확인한 일정표의 오늘 자, 현 시각에는 아무런 공지도 없었다. 떠돌이 돌멩이인 나만 빼 두고, 다들 어느 큰 방에 모여서는 윤도곤의 귀환을 환영하는 파티라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위치 추적이 염려되어 휴대폰은 신발장 안에 넣었다. 그리고 문을 밀어 열었다.

“어?”

“…….”

윤도곤이다.

내가 벌컥 밀어젖힌 문에 어깨를 맞았는지, 그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온통 백색뿐인 8층 복도에서 마주하자니 그러잖아도 하얀 머리카락이 더욱 환하게 빛나 돋보였다.

그가 내 상태를 확인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뜰 때까지 나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랐고, 도주의 시작부터 목격자를 만든 격이라 낭패였다. 결국 아무 말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고리를 잡고 도로 닫으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윤도곤이 내 방문 틈새에 제 두 손을 비집어 넣으며, 힘껏 내 뒷걸음질을 막은 것이었다.

“자, 잠시만요! 목에서 피 나요. 다치셨잖아요.”

난데없는 간섭에 나는 이마부터 찡그렸다. 지금 이 순간 윤도곤은 내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였다. 2순위는 그런 그의 대체품 삼아 나를 속인 재차의였고, 3순위는 그런 재차의와 알콩달콩하니 달라붙어 있는 윤도곤, 두 사람의 조합이었다.

“…….”

나는 문을 세게 당겨 닫으려는데,

“아, 아….”

윤도곤은 끙끙거리며 문짝을 놓지 않고 버텼다. 그의 손을 부러뜨려 버릴 순 없어, 나는 별수 없이 도로 문을 열었다. 윤도곤이 안심하며 물러나면 기회를 노려 쾅 닫아 버릴 심산이었는데, 아쉽게도 그는 끝까지 잡은 문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방문의 안쪽 고리를 꽉 쥐며 활짝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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