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일순 나는 내 등 너머에, 문 앞에 선 재차의를 상상했다. 세상만사 관심 밖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에 감흥 없는 눈동자, 무뚝뚝한 입꼬리를 천박해 보이도록 왼쪽으로만 죽 올려 웃는 재차의. 언제고 시커먼 옷으로 커다란 몸체를 단단하게 포장하는, 투박하고 또 그래서 우아한 재차의.
아무런 고민 없이 나는 문고리를 쥐고 벌컥 밀었다.
“형.”
무의식중에 천장을 향했던 내 시선은 아주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를 찾아온 이는 재차의가 아니었다. 커다란 몸의 가장 높은 위치에 달린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에 그 자리를 연홍색 폴라넥 스웨터를 강아지처럼 차려입은 문소여가 채웠다.
모난 실망감을 애써 삼키며, 나는 고개만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지금 혹시 바빠요? 형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요.”
“…….”
동네 친구가 건넬 법한 질문에 나는 코끝을 괜히 긁적였다. 한가하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문소여는 듣던 중 반갑고 맞는 말을 했다.
“사실 기분 안 좋죠, 형.”
“…….”
“그럴 줄 알았어요. 나랑 비밀 기지 구경 가지 않을래요? 기분 전환할 겸…. 형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할 말도 있고요.”
비밀 기지라는 흥미로운 미끼보다 신경 쓰이는 건 사람들의 이목이었다. 때문에 복도로 고개를 쭉 뻗고 주위를 살폈다. 입지가 흐트러진 상황에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문소여가 방싯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우릴 못 보게 할게요.”
그에 나는 ‘그래’ 하고는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신발을 찾아 한쪽 발을 넣기도 전에 생각을 바꾸고야 말았다.
‘재차의가 날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그가 내 방으로, 문 혹은 테라스를 통해 나를 보러 올지도 몰랐다. 당장 내게 필요한 건 문소여의 비밀 기지를 구경하는 일이나 기분 전환이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재차의였다.
그래서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그러자 문소여가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해맑던 웃음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머쓱하고 쑥스러운 기색으로 변했다.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문소여는 ‘그럼’하고 중얼거렸다가 ‘음’하며 연신 침음성을 냈다.
“모래 형.”
예쁘장하니 편안하던 웃음기를 서서히 지우며 문소여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뜸 무게를 잡는 그를 내려다본 순간 나는 한건을 떠올렸다. 재차의의 손에 머리통이 잡혀 용병단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내던져졌던 바로 그 한건. 나로서는 도통 줄 수 없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요구하며 떼를 쓰던 애송이 뉴타입, 한건.
한건이 나를 딱 저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었다. 내게 첫 가이딩을 요구하던 날에.
“형, 그게… 사실은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하지만 문소여는 달랐다. 한건과 같은 날라리 용병과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그는 순한 파수꾼이었고 착한 동생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내 방에 놀러 오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카페테리아의 구석진 바 자리를 고집하는 내 옆에 제 식판을 놓아 주는 밥 친구이기도 했다. 이따금 나는 내 친동생들보다 문소여가 나를 더 좋아해 준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동생들은 큰형만을 따랐는데, 문소여는 어째선지 제 파트너인 이상록보다도 나를 더 챙기는 듯했으니까.
그러니 문소여는 한건과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다.
“재차의 님에겐 이제, 다시 도곤이 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형이 새 파트너나 이중 파트너를 구하게 되면요. 그땐 나를 고려해 줄래요?”
…한건은 내 마음을 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정성 들이진 않았으니까.
“내가 형이랑은, 파수꾼 중에 제일 친하잖아요.”
둘 중 누가 더 착하냐 하면 나는 당연히 문소여의 편을 들겠다. 그러나 둘 중 누가 더 나를 아프게 했냐고 하면, 나는 별수 없이 문소여를 지적하겠다. 차라리 한건처럼 제 목표와 욕망에 솔직했더라면 내가 헷갈릴 일은 없었을 거다. 이이재나 그녀의 파수꾼 친구들처럼 대놓고 가이딩을 요구했더라면 몸이 피로할지언정 마음을 다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아무런 요구 사항이 없는 듯 다가와 나로 하여금 자신을 ‘동생’이라 여기게 한 문소여의 방식은 너무 나빴다.
…내게 잃어버린 동생이 없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문소여를 들여놓을 빈자리가 둘씩이나 되지 않았더라면 덤덤했을 텐데, 어리숙하던 동생들이 내게 주던 서툰 애정을 문소여의 꾀 섞인 관심과 비교하지만 않았더라도 죄책감이 들진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선 다 소용없는 후회다.
“…….”
나는 그저 멍했다. 속이 비어 버린 것 같다. 어째선지 문소여의 제안은 윤도곤의 생환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문소여를 정말로 동생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기대를 품었었나 보다.
“모래 형. 네? 형이 나를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될까요?”
어찌 되었건 나는 재차의가 아닌 파수꾼에게는 가이딩을 해 줄 수가 없는 몸이다. 문소여가 바라는 도움이 무어건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왜 안 해 주겠는가. 이렇게 이따금 손이나 잡고 포옹이나 나누는 것으로 그의 병증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나도 기꺼이 그랬을 거다.
재차의에게 그러듯 신경 쓴 가이딩이 가능했더라면, 물론 공짜로는 해 줄 수가 없고 얼마의 대가를 받아 챙겼겠지만 아무튼 쉬는 날 해 주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별종이고 무능력자였다. 재차의가 아닌 다른 파수꾼 앞에만 서면, 지난날의 E급 딱지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익숙한 무력감에 어깨가 무겁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실망했다.
“문소여.”
“네, 형?”
너도 결국 원하는 바가 있어 내게 친절했던 거구나.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해 줄 수 없는 일을 바라서, 그래서 내 옆에서 살갑게 웃었구나.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소개하며 매일 찾아오는 공을 들일 이유가 따로 없는 거였는데….
“…….”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전부 삼켰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가 내게 진심이 아니었더라면, 이제 와 내가 그에게 속상한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래 봐야 ‘뭘 그렇게까지 받아들였냐’고 당황해하고, ‘그럼 뭐 미안해요’ 하는 형식상의 사과나 받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런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런 건 내 회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내 어깨에 남은 건 순 부담뿐이었다. 그의 기대를 조금도 채워 줄 수 없음에 낙담하고 시무룩해지는 순간, 내 머릿속엔 재차의 생각뿐이었다.
‘재차의 앞에선 이렇게까지 나쁘진 않은데, 내가….’
그러자 컴컴했던 시야가 전구를 켠 듯 밝아지고, 난해한 문제에 가로막혔던 생각이 대번에 맑고 또렷해졌다.
“아니….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긴 기다림으로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는 문소여를 향해 나는 거절을 뱉어 놓았다. 큰 확신을 더럭 품은 채였다.
“난 재차의의 파트너 자리에서 강등되지 않을 거니까.”
윤희수가 구태여 내 방까지 찾아와서는, 나도 듣기 싫고 저도 하기 싫을 말을 줄줄 꺼낸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난데없이 지금에야 찾았다. 내 존재가 그의 형제 윤도곤의 입지에 위협적이어서다.
윤도곤이 대슈망에서 오래도록 활동한 엘리트 출신으로, 재차의의 큰 총애를 받던 가이드라는 건 이제 와서는 아무런 위력도 없는 과거일 뿐이다. 그래 봐야 그는 A0급 가이드라지 않았던가. 등급만 놓고 보면 자격 미달인 가이드를 재차의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곁에 뒀다. 거기에 무슨 더 의미가 있을까? S급인 재차의를 상대로는 단 1%의 매칭률만 나오더라도, 매칭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A-급이라고 했다. 35%를 넘어서면 A+급이고, 윤도곤은 공공연히 알려지기로 A0급인데….
반면에 나는 매칭률을 계산하는 게 의미 없을 수준의 측정 불가한 파트너였다. 다르게 말해 확실한 100점짜리 S급 가이드다. 상대 파수꾼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재차의라는 조건 앞에선 가이드로서 나와 윤도곤의 점수 차이는 최대 66점이란 뜻이다.
윤도곤은 아무리 잘나 봐야 34점, 나는 100점이니까.
그러니 다른 조건을 비교할 땐 뒤처지더라도, 재차의의 파트너로서 나는 윤도곤에게 지지 않는다.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가이드라도 마찬가지다. 상냥한 이상록을 파트너로 두고도 문소여가 내게 애원하듯이, 거의 애인 사이처럼 보이는 가이드와 어울려 다니면서도 이이재가 내 방문을 두드리듯이, 감정을 차치하고 보는 세상에선 숫자만이 사실이니까.
‘재차의가 윤도곤을 좋아한다고? 그래서 뭐.’
나라고 눈멀고 귀 막힌 놈은 아니다. 여태껏 지켜봐 온 재차의의 태도가 있었고 말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 중 무엇 하나도 잊지 않았다. 맹세하건대 모조리 다 기억한다. 재차의가 내 팔뚝을 움켜쥐고 정액 냄새 풍기는 용병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가던 순간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내 기억 속 재차의는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남자다. 그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파수꾼이고, 미심쩍고 마음에 켕기는 한이 있어도 가장 쉽고 간단한 이득을 찾는 위선자다. 의리며 양심, 도덕이며 배려 따위는 변기에 처박고 물 내려 버린 놈이란 뜻이다. 그런 그가 뼛속까지 잘 드는 상비약인 나를 포기하고 성능만 따지자면 별도 옵션에 불과한 윤도곤으로 제 옆자리를 채울 리 없다.
‘재차의는 날 버리지 않아.’
재차의에게 나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