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가이딩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러나 나는 실패를 직감했다. 1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을 막연히 느꼈었으나 이젠 그렇지 않았다. 평생 ‘적당한’ 가이딩을 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긴 할까 막막했다. 재차의의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더운 고통을 느끼자마자, 나는 이 고통을 적당히 낫게 할 수 없게 됐다. 칼로 쑤시고 불에 익히고 물에 잠기는 듯한 복합적인 고통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치료해 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충동이나 고집이 아니었다. 생애에 수많은 실패가 덕지덕지 붙은 나에게도 이토록 순수한 ‘불가능’은 처음이었다.
재차의의 팔뚝을 꽉 움켜쥐며 나는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고통의 근간이 의심스럽다. 아무리 대단한 파수꾼이라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나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까 의아했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켜켜이 쌓여 재차의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는 이 ‘나쁜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고 살아 보지도 못한 세월 동안 축적된 병이었다.
마른 입술을 열어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차의 님.”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은 나오지 못하고 내 속에 머물렀다. 누구길래 이렇게 아픈 것이냐고, 당신의 아픔이 나는 무섭다고, 이런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당신이 불쌍하다고. 그런 말조차 모두 내 명치에 고여 돌이 됐다. 재차의에게서 갈취하듯 빨아들인 거대한 고통과 함께….
***
짹, 짹.
청량한 새 소리가 나를 깨웠다.
짹, 짹….
내 휴대폰에서 울리는 가짜 새 소리, 오전 7시 알람음임을 깨닫고 나니 꿈도 꾸지 못한 잠이 확 달아났다. 협탁을 찾아 아무렇게나 손을 뻗으면서 나는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알람이 뚝 끊기고, 내 시선은 재차의의 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뒤통수에 닿는 큰 바위 같은 감각은 재차의의 허벅다리 감촉이었다. 천장 등의 위치를 미루어 보아 나는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있었다. 침대 헤드 쪽으로 발을 뻗은 채였다. 아무렇게나 일자로 누운 내 머리를, 재차의는 제 무릎 위에 뉘어 놓았다. 아주 잠깐 날 떠났던 현실 감각이 부랴부랴 돌아와, 나는 거의 뒤로 구르다시피 하며 재차의의 무릎에서 벗어났다. 그마저도 어지럼증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가 없어 느릿느릿했다.
침대 시트 위에 차에 치인 개구리처럼 엎드린 나를, 재차의는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속 모를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새카맸다. 말끔한 얼굴에는 방긋 웃음이 걸렸다.
“좋은 아침, 송모래.”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인사말이 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뱉어져 나오는 말은 없었다. 재차의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여 그랬다. 아주 간만에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는 불쾌해 보였다. 얼굴은 늘 그렇듯 완벽하고 미소는 청량하기가 여름 하늘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아주 화나고 몹시 짜증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주춤거리며 나는 자세를 고치려 애썼다. 그러나 구부정한 자세로 엎어진 채 손발을 꿈질거릴 뿐, 마음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을 순 없었다. 눈앞으로 하얀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며 피어올랐다. 속에서 토기가 치밀어, 구역질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입을 꽉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쓰담, 쓰담… 두피에 따듯한 감각이 내려앉더니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자 내 머리에 손을 얹어 놓은 재차의의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잘못 움직였다간 코가 서로 부딪치겠다 싶을 정도였다.
“송모래. 어디가 안 좋아? 안색이 나쁘네.”
커다란 손이 뱀처럼 매끄럽게 흘러내며 내 왼뺨을 감쌌다.
“아, 아뇨.”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자 재차의의 얼굴이 웃는 낯 그대로 멈췄다. 내 눈앞에서 재생 중이던 동영상이 갑자기 사진이 된 느낌이었다. 그가 가만히 멈추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수 초를 흘려보내는 동안 나도 몸이 굳어 꼼짝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은 더 늦은 대꾸가 돌아왔다.
“그래?”
그리고 내 몸을 실은 매트리스가 살짝 위로 솟았다. 재차의가 크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밖에 선 것이었다. 그의 옷차림이며 머리칼은 어제와 같이 흐트러짐 없는 상태였고 얼굴 또한 아주 멀쩡해 보였다. 밤새 내 곁에 있었던 건 아닐 테고, 아침 일찍부터 어딜 다녀왔나 보다 생각됐다.
어제와 비교하여 달라진 건 그의 눈빛뿐이었다. 어제는 무심하고 차가웠다면 오늘은, 그 눈빛이 그저 공허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벽이나 공기 중을 쳐다보는 사람 같다. 드물게 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왜, 날….’
질문이 내 입안에서 맴맴 돌았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봐요?’
함부로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나는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재차의의 무정한 얼굴을 지나 구김 없는 상의, 일자로 길게 뻗은 다리, 그리고 구둣발을 바라보았다. 발치에 떨어진 천 뭉치가 산더미였다. 전부 피에 젖어 갈색으로 얼룩진 수건이었다.
‘아, 들켰구나.’
내 머리를 채우는 건 낭패와 낙담이 전부였다.
‘들켜 버린 거야. 재차의한테….’
그러잖아도 나를 약골이라 욕하던 사람인데, 밤새 코며 입으로 피를 뱉어 내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차의가 떠올렸을 비난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이 막혔다.
나는 그저, 매번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했을 뿐이다. 재차의의 상비약 역할을 똑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그를 최대한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자….
“재차의 님.”
다리 밑의 침대 시트가 빠르게 눅눅해져 갔다. 전신에서 흘러내린 땀이 묻은 탓이었다. 내가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고쳐 앉자 젖은 시트가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소용돌이처럼 꾸깃꾸깃한 시트를 괜스레 노려보면서,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것쯤은, 다… 당신에게는, 재차의 님에겐.”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당신에게는 아무 지장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자기 변호를 하고 싶었다. 내가 조금 아프고 가끔 기절한다고 한들 파견 업무에 피해를 끼친 적도 없고, 당신의 병증을 못 낫게 한 적도 없으니까. 부디 성과만 봐 달라고, 나는 아직 쓸모 있는 가이드가 아니냐고, 당신의 파트너가 아니냐고….
“…재차의 님, 저는….”
“거짓말.”
그러나 재차의는 냉정하게 내 말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오늘은 방에 처박혀 쉬어. 밖으로 나오거나 움직이지 말고. 한동안 네가 할 일은 없을 거야, 송모래.”
귓가에 남은 단단한 목소리를 나는 멍하니 곱씹고 또 곱씹었다. 빳빳하게 눌린 두 다리를 천천히 뻗어, 자리에 제대로 앉고 나니 10여 분이 지나 있었다. 구역질을 참아 낸 끝에 솟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살펴본 침대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이제 와 살펴보니 베갯잇이 온통 갈색으로 얼룩덜룩했고 시트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았더라면 최소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난 현장인 줄 착각했을 터였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는 익숙한 청소를 시작했다. 더러워진 베갯잇을 벗겨 내고 시트를 걷었다. 그리고 진이 빠져 버려, 발가벗은 매트리스 위에 풀썩 누웠다.
‘진짜 약골이 다 됐구나, 송모래….’
이따 재차의가 다시 찾아오면, 왜 기분이 상했느냐고 물어봐야겠다.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은 재차의의 말마따나 방에 처박혀 쉬고 있다가, 저녁 즈음 기회가 된다면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도구처럼 그를 위해 움직이는 나에게도 그 정도 질문을 건넬 자격은 있겠지… 하고.
“왜….”
실력 없는 앵무새처럼 나는 건넬 말을 미리 연습했다.
“왜 기분이 상하신 겁니까? 재차의 님.”
그러나 어렵사리 품은 질문을 꺼낼 기회 따위는 오지 않았다. 오전에 대슈망 센터 밖으로 홀로 나선 재차의는 저녁 무렵 두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한쪽 어깨에 의식 잃은 남자를 들쳐 멘 채였다.
그의 정체를 나는 문소여를 통해 알았다. 웅성웅성 시끄러운 복도의 소음에 놀라 문을 열자마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치들 너머로 문소여가 보였다. 날 향해 직진해 달려오며 그는 활짝 웃는 낯이었다.
“도곤이 형이 돌아왔대요! 재차의 님께서 갑자기 수색에 나서서 다들 의아해했는데, 반나절 만에 찾아낸 거예요. 이건 기적이에요, 기적!”
도곤이 형. 그게 누구더라…. 멍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나는 얼떨떨했다. 그 순간이 내 평화의 마지노선인 줄도 모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