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43)화 (43/76)

43.

‘하지만…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러나 혼란은 길지 못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절박한 음성이 터져 나오기에 나는 문으로 통하는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그대로 위로 오르려는데, 재차의가 내 상체에 두른 엑스자 벨트를 뒤로 잡아당겼다. 내 몸이 허공에 덜렁 들렸다가, 선실 바닥으로 돌아왔다.

재차의는 나를 대신해 먼저 사다리를 올랐다. 거의 날다시피 움직이며 그는 1초 만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사다리를 다시 밟았다. 재차의가 그대로 문을 닫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재차의의 의도는 내 예상과 정반대였다. 그는 문 안으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손을 내려 내 팔뚝을 잡아 주었다.

“한 칸만 더 올라와. 이대로 당기면 어깨 빠져.”

그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발을 움직였다. 무거운 장비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으려 힘을 줘야 했다. 왼발, 오른발을 척척 올려 한 칸 가까워진 나를 향해 재차의는 두 팔을 다시 뻗었다. 그리고 내 팔뚝 아래, 겨드랑이 밑에 양손을 대더니 나를 들어 올렸다. 어린애나 개를 잡아 올리듯이 쑥 당겨져, 나는 로즈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가타부타할 것 없이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게이트 내부는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어디를 봐도 푸른 바다만 펼쳐져 있었고, 육지라고는 아주 멀리 봉긋 솟은 섬 하나가 전부였다. 봉분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모양의 섬이었다.

빠르게 눈길을 돌려 나는 저 먼 바다를 내다봤다. 주황색 구명보트는 겉면에 쓰인 알파벳이 보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보트에 탄 사람은 총 셋이었고 삼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가 함께였다. 어린아이의 지친 얼굴에 눈물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린 이들을 보자 뒤늦게 추위가 엄습했다. 콧구멍에 살얼음이 낄 만큼 추운 게이트였다.

마침내 구명보트가 로즈의 옆구리에 통 소리를 내며 닿았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이되, 우리가 선 망루의 높이가 그들이 선 구명보트보다 훨씬 더 높아 서로를 마주 보긴 쉽지 않았다.

나는 로즈의 머리 위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며 두 팔을 아래로 쭉 뻗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목이 다 쉬어 버린 여자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조그만 여아를 안아 들어 힘껏 위로 올렸다. 상황 파악도 잘되질 않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뜬 아이는 어른에 비해 소극적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새 아이가 떨어질까 걱정되어 나는 더욱 힘주어 상체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제야 아이가 날 향해 손을 높이 뻗어 보였다. 덕분에 가까스로 아이의 두 손목을 붙잡는 데에 성공했고, 망루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제야 눈물 흘리는 여자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맨손으로 노를 저어 왔는지 손에 가득 낀, 소금인지 살얼음인지 모를 얼룩이 유독 따가워 보였다. 옷은 다 젖고 헤졌으며, 배는 유독 불러 동그랬다. …임신부였다.

“아, 저….”

낯선 여자아이를 어설프게 안아 들고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임신부를 로즈에 태우자면 제대로 된 사다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재차의가 나섰다.

그는 우리가 선 망루의 울타리를 왼손으로 움켜쥐더니 훌쩍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커다랗던 뒷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 순간 나는 ‘풍덩’하는 소리를 예감했다. 그러나 바다는 고요했고, 재차의를 적신 바닷물은 한 방울도 없었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살피자, 여전히 울타리 하단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왼손이 보였다.

순전히 한쪽 팔 힘만으로 잠수함 외벽에 매달린 채, 재차의는 길쭉길쭉한 다리를 아래로 쭉 내렸다. 그러자 생존자 남자가 ‘어’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재, 재차의 님?”

이내 그들 얼굴에 희망이 가득 찼다. 절박한 표류 끝에 살길을 찾은 얼굴이 일순 환하게 빛났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은 재차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 재차의 님!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재차의는 구명보트를 발로 차 멀리 밀어뜨렸다.

남색 바닷물 위에 흰 거품이 크게 피어올랐다. 두 사람을 실은 구명보트가 단숨에 우리로부터 멀어졌다.

“…….”

순간 뼛속까지 추위가 엄습했다. 경악으로 내 입은 크게 벌어졌고, 절망으로 얼룩진 생존자들의 표정은 지켜보기 마음 미어질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작아져 버려 제대로 보이질 않게 됐다. 무어라 외쳐 대는 절박한 음성만이, …님, …차의님, …제발, 하고 뜨문뜨문 들려왔다.

떨리는 팔로 나는 품 안의 아이를 꽉 안았다. 왼팔 힘 하나만으로 재차의는 로즈의 망루 위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허리춤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멀리 흘러가 버린 구명보트를 다시 로즈에 붙여 보고자 두 팔로 노를 젓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려 나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화가 나다 못해 황당해서, 그 행동을 어디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감도 오질 않았다.

“재차의님, 제발… 도와주세요…!”

생존자들의 음성이 들릴 만큼 거리가 좁혀지자, 재차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감각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을러 놓듯 말했다.

“보다시피 운송선이 아니라 자리가 여의치 않아. 당신들 셋을 모두 태울 순 없어.”

그 차가운 목소리에 내 이가 다 떨렸다. 당신들 ‘셋’이라는 말은 내 품 안의 여자아이도 선택지에 넣겠다는 의미였다. 얼른 고개 숙여 나는 아이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는 어른들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온기를 찾아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기 바빴다.

“임신부를 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겠군. 그럼 하나 값으로 둘을 얻는 셈이니까.”

나는 재차의의 입을 틀어막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가 뱉어 놓는 말 하나하나가 뼈저리게 충격적이어서,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한 자리가 남았네. 누구를 데려가고 싶어? 당신이 선택해.”

잔인한 선택권이 임신부에게 떨어졌다. 세계적인 영웅, 파수꾼 재차의를 알아보고 기뻐하던 그녀의 얼굴엔 이제 아무 표정도 남지 않았다. 희망, 열망, 의지, 용기… 그 모든 게 순식간에 자리를 비웠다. 구멍이라도 크게 뚫린 듯한 얼굴이었다.

“저…, 저희 남편이에요. 제 딸이고요. 가, 가족이에요.”

사색이 된 채 그녀는 더듬더듬 말했다. 제발 전부 데려가 달라, 아이는 어려서 몸무게가 10kg도 나가지 않는다, 가진 짐도 전혀 없다, 어디든지 태워만 주신다면 거기에 구겨져서라도 가겠다… 이어지는 애원은 구차할 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재차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차가운 바다 저편을 힐끔 살필 따름이었다.

그에겐 생존자를 발견한 일이 조금도 대단하지 않은 듯했다. 그저 정해진 시간 내에 스티치를 마칠 생각밖엔 없어 보였다.

그보다 더 나를 무섭게 하는 건 생존자 남성의 반응이었다. 그는 재차의가 세워 놓은 강압적인 규칙과 환경 앞에 빠르게 굴복했다. 그리고 제 아내를 끌어안으며 애원의 굴레를 잇기 시작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아이는 내 품 안에서 얌전한 한편, 기울어진 구명보트 위의 남편은 아내에게 귓속말하기 바빴다.

…출산까지 서너 달쯤 남았을까? 부른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여자가 고개를 푹 떨궜다. 구겨진 이마 위로 얼어붙은 머리카락이 물건처럼 툭툭 흐트러졌다.

그녀가 입을 열어 뱉을 선택지가 무언지 나는 직감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빨리 움직였다. 여자아이를 왼팔로 고쳐 안아 들고, 한 손은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전부 데려가요.”

그리고 말했다.

“아주 가볍고 작은 애입니다. 꼭 지침대로 계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재차의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와 동시에 내 손 안에서 철컥, 잠금쇠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 얼굴에 내려앉은 재차의의 까만 눈길은 빠르게 미끄러져 손에서 정지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금색의 가느다란 쇠사슬이 흘러내렸다. 사슬의 한쪽 끝은 내 손목에, 다른 한쪽 끝은 어린아이의 손목에… 수갑으로 채워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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