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갈피를 못 잡고 울렁거리는 내 기분을 붙잡아 주는 이는 뜻밖에 문소여였다.
센터 내에서 내게 가장 자주 말을 걸고, 가장 밝게 인사해 주는 그였다. 복도나 카페테리아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는데, 남에 대한 험담이나 날 향한 지적이 없어 듣기 좋고 편했다.
문소여가 ‘형’, ‘모래 형’ 하고 나를 불러 대니 나까지도 그를 동생처럼 대하게 됐다. 그가 높은 등급의 뉴타입이라는 사실마저 잊을 때가 많았다. 문소여는 재차의처럼 인상이 어마무시하지도 않았고, 다른 파수꾼들처럼 땀 냄새 혹은 피 냄새를 풍기며 지치고 흥분한 얼굴로 가이드를 찾아 돌아다니지도 않으니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슈망의 파수꾼 중 가장 한가로운 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내심 그의 가이드 버전이 나라고 생각했다. 내 업무는 오직 재차의의 필요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고급 파수꾼 중에서도 최고급 인력인 재차의는 게이트로 직접 나서는 일이 의외로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전속 가이드를 데리고 나설 만큼 대단한 일은 더더욱 희귀했다. 신문이며 뉴스에 떡칠 보도되던 모습만 알던 시절엔 재차의가 매일매일 피 흘리며 이 세상을 지켜 주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번 나설 때마다 화제성도 파급력도 크다 보니 그렇다고 착각했을 따름이었다.
그 증거로 지난 2주간 내 생활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파견도 없고 일정도 없어, 숙소 방에서 책이나 읽는 나날이었다. 게이트에서 주워 온 책은 완독한 지 오래라 대슈망 도서관에서 소설책 여러 권을 대출해 왔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수년간 사채업자들에게 간이 쪼여 온 나에게는 ‘도서 대출’의 대출도 어이없게 망설여졌다. 그래도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의 갓 나온 신작은 참을 수 없었다. 연체하는 일 없이 꼬박꼬박 반납하기로 혼자서 다짐하기도 했다.
그밖의 일정이라고는 재차의가 요구할 때마다 가이딩을 해 주거나… 손으로 그의 성욕을 풀어 주거나, 그러다가 ‘딸 치는 데엔 소질이 쥐뿔도 없다’는 성질 더러운 핀잔을 듣고 부질없는 반항은 생략하고 몸을 내주거나 했다. 내 생활에 고민이라고는 재차의가 전부였다.
옆자리에 누운 사람을 쥐어 터뜨릴 기세로 끌어안는, 재차의의 사나운 잠버릇을 알게 될 무렵에는 가이드 숙소 층의 복도가 흰 이유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도무지 주체가 안 되는 ‘과잉 진압’과 어떻게 아직도 내 몸이 박살 나지 않는 건지 이상할 만큼 거친 섹스의 여파로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자면, 한 시간에 한 번꼴로 파수꾼인지 미치광이인지 모를 것들이 어느 가이드의 방문 밖에서 소란을 피워 댔다.
지난날의 사달을 새하얗게 잊어버린 이이재가 두 친구들을 데리고 내 방문을 두들긴 것도, 그런 그들을 ‘계속 고집부리시면 재차의 님을 부를 겁니다!’ 하는 낯부끄러운 허세를 부려 돌려보낸 것도 여러 차례다. 이쯤 되니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영웅이 아닌 강철 철부지들 같다. 그나마 같은 사람이라 느껴지는 이는 문소여가 유일하다.
“조심해요, 형.”
파트너 가이드의 우람한 품에 안겨 시무룩한 얼굴로 끌려가는 이이재를 힐끔거리며, 문소여가 내게 말했다. 한 뼘 간격으로 좁게 열어 두었던 방문을 활짝 젖혀 주며 나는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난 괜찮아. 저러다 말겠지, 뭐.”
보드게임 판을 옆구리에 낀 채 내 방으로 들어오며 문소여가 한숨 쉬었다.
“이재 누나 말고요. 재차의 님 말이에요.”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하필 이이재를 돌려보내는 와중에 찾아온 바람에, ‘재차의 님을 부르겠다’는 내 거짓 엄포를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진짜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내가 부른다고 해서 와 줄 만큼 한가한 파수꾼도 아니고….’
멋쩍은 마음에 괜히 목덜미만 만지작거리는 나에 비해 문소여는 진지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파수꾼이 아껴 주고 챙겨 주면, 가이드로서 파트너한테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아요. 나도 봐 온 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도, 모래 형. 재차의 님에게 너무 빠져들지 마요.”
떨떠름해진 입 안을 침으로 축이며 나는 문소여를 내려다봤다. 소파 테이블 위에 보드게임 판을 깔아 놓고, 문소여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심각한 표정이었다. 양심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까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잠자코 듣기만 하는 내게 그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한 경고를 남겼다.
“재차의 님을 절대로 믿지 마요. 몸은 내줘도 되지만 마음은 그래선 안 돼요. 재차의 님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문소여의 목소리는 훨씬 작아졌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속삭이다시피 건넨 주의에 나는 얼떨떨했다. 크게 새롭거나 신기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도 십분 이해하고, 진작 생각해 온 이야기였다. 재차의를 믿지 말자고, 좋아하지 말고 의지하지 말자고, 그는 사람이 아니라고, 차라리 괴수일 거라고…. 그건 2주간의 평화에 녹슬어 잊고 지낸 다짐이었다.
‘몸은 줘도 마음은 주지 말라고?’
도대체 언제부터, 왜, 무슨 이유로 이 경고에 속이 뜨끔하도록 물렁해졌는지 모르겠다. 재차의를 사랑하게 됐다는 건 죽어도 아니다. 다만 재차의가 ‘익숙해졌다’. 심장이 조이도록 공포스럽고 살 떨리게 싫고 또 밉던 재차의인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적응이었다.
“…….”
이 순간 가장 몰이해한 건 나 자신의 마음이었다. 평생을 ‘혼자’ 지내 온 나였다. 좁은 집에서 엄마, 아빠, 형과 두 동생 사이에 섞여 지낸 어린 시절에도, 삼촌의 손에 붙들려 약을 맞아 가며 골방에 갇혀 살던 무렵에도… 누구와 살 맞대는 어떤 순간에도 나는 혼자였다. 살기는 남들과 같이 살아도, 하루를 버티는 일은 늘 혼자의 몫이었다. 지나온 인생 중 어느 해의 어떤 날을 꼽더라도 외롭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재차의에게 익숙해졌다. 그가 주는 큰 자극과 폭풍우 같은 감정들, 가이딩이 주는 깊은 결연과 내 인생에 허락된 적 없던 안도감에 적응해 버렸다. 이제는 내 하루에 그가 없으면 안 된다. 나쁜 말을 듣고 심한 취급을 받을 때면 머리꼭지가 핑 돌도록 화가 나고 억울하면서도, 넓은 침대 옆자리를 채우며 나를 세게 끌어안고 잠든 재차의를 볼 때면 다친 기분이 회복됐다.
아주 가끔은, 솔직히 좋을 때도 있었다. 내게 일방적으로 말을 퍼붓다가 대뜸 내 정수리 위에 제 턱을 얹을 때나, 갑자기 내 배를 주물럭거리고는 곧바로 레스토랑으로 끌고 갈 때, 복도에서 우연찮게 마주쳤다는 이유로 나를 껴안고 2분 동안 안 놔줄 때도….
그래도 재차의에게 그 무어, 마음까지 줘 버릴 계획은 추호에도 없었다. 그런 꼴같잖고 우스꽝스러운 헌신은 꿈에서도 해 본 일이 없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내 세상이다. 혓바닥에 병 걸렸냐는 조롱을 듣도록 답답하게 꽉 막힌 인간, 그게 나였다. 그런 내겐 재차의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무얼 꺼내어 주려 해도 그럴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니 문소여의 조언이 경고처럼 들려 속이 켕길 이유가 없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뭔 버러지 새끼도 아니고. 재차의는, 날… 쓰기 편한 가이드, 장난감으로 취급하는데, 그런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뒷구멍으로 좆이나 처받는 내 주제에 마음은 무슨….’
그러자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 치는 듯했다. 일순 팔뚝이 따끔거리고 가슴께가 뜨거워졌다. 동시에 구역질이 목젖까지 치밀었다. 뇌리에 튀어 오른 이미지는 내게 제 것을 들이미는 재차의가 아니라, 내 것을 제 뒤에 넣겠다고 달려들던 삼촌이었다.
‘사랑해, 모래야.’
그의 고백은 죽고 싶을 만큼 역겨웠다.
‘…….’
주먹으로 내 뺨이라도 힘껏 치고 싶었다. 문소여가 지켜보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울컥 치민 충격에 못 이겨 침묵하는데, 문소여는 얼어붙은 분위기에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그건 그렇고, 형! 이것 좀 볼래요?”
그리고 보드게임 판 위로 제 휴대폰을 꺼내 보였다. 그가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무얼 찾는 동안, 나는 소리 없이 내 왼쪽 손목 살을 오른손으로 힘껏 꼬집어 쥐고 비틀었다. 얼얼한 통증으로 현실 감각을 깨우자마자 문소여가 손을 뻗었다. 밝기를 최상으로 키운 듯 환한 액정이 날 향했다.
찬물을 맞은 듯 착잡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 아침에 대슈망에서 형 프로필 공식 발표한 거 알죠? 재차의 님 새 파트너라고 증명사진도 나란히 실렸어요. 사람들 반응이야 당연히 엄청 폭발적이고요.”
건네받은 휴대폰 안에는 댓글이 수백 개 달린 기사 글이 있었다. 재차의의 사진은 프레스 콜에 나선 배우처럼 조명이며 복장이 화려한 반면, 그 옆자리에 붙여 놓은 내 증명사진은 흰 배경에 흰 셔츠, 안색마저 백색이라 재미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