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나는 눈을 굴려 헤실헤실 웃는 낯의 문소여를, 그리고 그와 팔짱을 끼고 선 이상록을 번갈아 살폈다. 당황하긴 이상록도 마찬가지인지 나와 문소여를 빠르게 휙휙 살펴 댔다. 카페테리아에서는 높은 스툴에 앉아 있어 몰랐는데 이상록은 키가 아주 작았다. 문소여의 호리호리한 덩치에 쏙 가려지도록 몸집이 아담해서 까만 햄스터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상록은 부쩍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금 전 통성명을 다 해 놓곤 새삼스러운 인사였다.
‘둘이 파트너였구나….’
그럼… 말 걸고 싶다느니 조금 어렵다느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날 두고 나눈 대화였나 보다. 어색하기는 해도 긍정적인 이야기였다. 무뚝뚝한 나를 나쁘지 않은 형으로 소개해 준 문소여에게 고마웠다.
“저, 아까는 제가….”
벙긋벙긋 입을 열며 이상록은 잡고 있던 문소여의 팔뚝을 얼른 놓았다. 그리고 반 발짝 내게 다가왔다. 일순 종알종알 나에 대해 떠들어 대던 윤희수의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내심 긴장했다. 잠깐 사이에 더 나쁜 소문이 퍼져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다행히도 나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됐다. 어색한 대화는 대뜸 끼쳐 온 날 선 분위기에 뚝 끊겼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살피자, 재차의가 보였다.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어 선 채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빤한 시선을 좇아 복도에 선 십여 명의 눈길 또한 나에게 꽂혔다. 형체 없는 칼이라도 맞은 듯 나는 팔다리가 따끔거렸다. 이내 재차의가 성큼성큼 직진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와 서너 발짝 떨어진 자리까지 거리를 단숨에 좁히더니, 그는 갑자기 팔을 좌우로 넓게 벌렸다.
“…….”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이상록이며 창백해진 문소여를 힐끔 살핀 다음, 나는 관절이 빳빳한 다리를 움직여 재차의와의 남은 거리를 좁혔다.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지 않으면 더 큰 일을 요구할 재차의임을 알기에 그리했다. 그의 가슴팍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멈추어 서자, 재차의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나와 최대한 넓은 부위를 건전하게 접촉하고, 내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는 의미 없이 냄새를 맡도록 내버려 두었다. 재차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좌로, 우로 몸을 흔들며 포옹을 음미하는 걸 보면 그랬다.
이내 그는 포옹을 반만 푼 채 나를 잡아끌며 걸었다. 안긴 것도 아니고 어깨동무를 한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귓가에 와 닿는 수다는 더는 없었다.
두 눈을 내리감고 나는 답답하게 속을 채웠던 숨을 밖으로 전부 빼내었다. 그리고 안심했다. 몹시도 오랜만에, 정말 조금, 아주 약간이나마 그랬다.
‘이제 화가 풀렸나 봐.’
재차의와의 접촉이 안겨 주는 특유의 기분 좋은 감각과는 색이 다른, 옅은 안도감이 못내 달가웠다. 그가 더는 내게 화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시 전처럼 제 것 챙긴다는 듯 나를 끌어안고 걸으니 잘된 일이었다. 내게는 미로 같은 대슈망 센터 안에 나를 옆자리에 끼고 걸어 줄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게 모두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재차의라는 게 나를 진정시켰다. 어떤 오해와 편견도 나를 이곳에서 완전히 내쳐 버릴 순 없을 테니까. 재차의의 곁에선 나도 필요한 존재이고 중요한 일원이니까….
그래서 좋았다. 가슴 안에 처박힌 굴욕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괴감이 들도록 세속적인 안도감이었다.
재차의가 다가가 서자 승강기 문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바로 옆에서 대기하던 가이드가 호출 버튼을 눌러 준 덕분이었다. 복도를 채운 이들은 많았으나 승강기에 오르는 이는 재차의와 나뿐이었다.
승강기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또 다른 침묵으로 재차의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무턱대고 ‘그런데….’ 하고 목소리를 냈다.
“응?”
재차의가 가벼운 목 울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떠오르는 질문이 있어, 나는 애써 또박또박 발음하며 물었다.
“왜 호출하셨습니까?”
그러자 재차의가 코웃음을 쳤다. 1층 버튼을 건성으로 꾹 누르며 그가 대꾸했다.
“파수꾼이 가이드를 부르는 데 이유가 따로 있나.”
내 팔뚝을 움켜쥔 손에 뭉근한 힘이 들어왔다. 팔의 근육이라도 재 보려는 듯 위아래로 주물럭거리는 의도가 무언지 알아채긴 어렵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막 나온 참이니 물에 대한 갈증보다도 가이딩에 대한 갈망이 더욱 클 터였다. 바로 좀 전에, 나 때문에 능력을 써 주기도 했고….
문제는 내 가이딩 실력에 있었다. 한번 해 보았다고 이제는 자신감이 붙기는 했다. 재차의가 가이딩을 원한다면 당장 해 줄 수야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적당히’ 해낼 자신은 없었다.
“저…, 여기서 바로는 못 해 드립니다. 아무 데서나 잠들어 버릴 순 없습니다.”
“아, 그래?”
멋쩍게 건넨 내 말에 재차의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의외네. 여태 아무 데서나 픽픽 잘만 쓰러졌으면서?”
“…….”
“혹시 지병이라도 있어, 송모래?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 숨기지 말고.”
비웃음 섞인 지적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재차의의 가이드가 된 이후 자진해서 잠든 때보다 기절한 횟수가 더 많긴 했다. 평생 코피 한번 흘려 본 적 없는 나였다. 철야와 근육통으로 다져진 몸이건만, 이곳에선 내 근성이 통하지 않았다.
‘지병은 무슨. 가진 건 건강한 몸뿐인데.’
그래서 억울하긴 해도, 변명할 순 없었다. 아무튼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가이딩 실력이 문제니까….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렇게 맹세해도, 재차의는 쉬이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왼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가 노력하면, 지금 당장 문제가 다 해결돼? 아니잖아.”
“…….”
“송모래. 내가 너한테 당장 뭐라도 받아야 하겠다면? 그럼 어쩔 거야.”
“…….”
그 바람에 나는 다소 혼미해졌다.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날 옆구리에 끼고 걸을 땐 언제고, 대뜸 가이딩을 독촉해 오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답이 무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려다가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하다고 말하면 목을 부러뜨려 죽이겠단 선언이 생각난 탓이었다. 아, 아니지. 가만…. 남한테만 그러지 말라고 그랬던가? 재차의 본인한테 사과하는 건 괜찮으려나?
안 돼…. 시간이 가고 있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는데….
불안정한 생각에 빠진 날 향해 재차의가 타박했다.
“게으름 피우지 마, 송모래. 더 부지런하게, 적극적으로 일하라고.”
“…….”
딱히 게으름을 피운 적은 없는데…, 세상의 누구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재차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꼬리표처럼 달라붙은 소문에나 신경을 쏟는 부적응자 파트너가 고까울 만도 했다.
‘아니, 근데… 그래서 뭐 어떡하라는 거야. 내가 뭐, 일부러 그랬나?’
절로 비죽거리는 윗입술을 누르며 나는 애써 말을 골라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재차의가 이상한 동작을 보였다. 내 어깨에 오른팔을 빙 둘러 놓은 채, 제 오른쪽 뺨을 얼굴 가까이 들이민 것이었다. 순간 아름다운 옆얼굴의 선이라도 자랑하는 건가 싶었다. 어리둥절하니 보고만 있자, 재차의는 제 뺨을 검지로 툭툭 두들겼다.
‘뭐야? 피부 좋으니까 만져 보라고?’
멀뚱멀뚱 그의 손동작을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었다. 어떤 대답이든 행동이든 보여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그의 매끄러운 뺨에 손끝을 대고 아주 살살 문질렀다. 턱선이며 콧대며 온통 진하고 남자다운 데다 전신이 돌처럼 딱딱한 재차의인데, 뺨의 살만큼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
보들보들한 감촉이 새삼스럽고 신기해서 살살 만지고만 있자니 재차의의 표정이 묘해졌다. 두 눈을 좁게 뜨고 나를 흘겨보는가 싶더니, 그는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바로 맞붙였다.
‘이게… 아닌가? 뭘 어쩌라는 거지?’
혼미해져 나는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아예 두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재차의가 웃었다. 손바닥 안의 뺨이 동그래지도록 큰 웃음이었다.
“하하!”
그와 동시에 내 시야가 어둑해졌다. 그가 내 뺨을 마주 움켜쥐고는 입을 맞춘 것이었다. 눈앞으로 더럭 가까워지는 재차의의 눈동자를 마주 보기가 힘들어서, 나는 눈을 아주 꽉 감아 버렸다.
그러고 보면 재차의에겐 뺨보다도 부드러운 부위가 있다. 그의 입술이 그렇고 혀가 그렇다. 내 잇새를 벌리며 거침없이 파고드는 불도저 같은 키스에서도, 폭력성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게 되고 경계심이 마비되어 버린다.
‘그래도 오늘은…, 이 정도는, 키스까지는 괜찮을지도 몰라.’
딱 그만큼 재차의의 혀는 부드러웠다.
‘적어도 내게 더 화내진 않으니까.’
그가 뇌까린 힐난과 희롱이 옅어지고, 지친 내 고민이 휘발되어 버릴 만큼.
‘적어도 혼자는 아니니까….’
오래된 영수증에 쓰인 값처럼, 힘껏 그어 놓은 경계선마저 투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