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래, 나도 이제 알겠어.”
재차의가 말했다.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조금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조금이나마 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이해해 주는 걸까 기대해서였다.
“너는 회의실을 싫어하는구나. 그렇지?”
그리고 재차의가 헛소리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조금은 우쭐해 보이기까지 해, 나는 도무지 ‘그게 뭔 헛소리세요’하고 반박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여기서 얼른 나가자.”
그러면서 재차의가 휙 뒤를 돌았다. 마침내 그의 포박 같은 손길에서 벗어난 순간 나는 마음이 후련했고, 탁자를 벗어난 몸뚱이는 휘청거렸다. 어긋난 중력이 준 괴리감이 아직도 뼈마디에 남아 있었다. 재차의가 준 충격 때문에 더 나빠진 것 같다. 관절이 죄 미끌거리고 몸무게는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졌다. 달 위에 선 것 같단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힘든 기색을 보여선 안 됐다. 또다시 재차의에게 붙들릴까 봐, 나는 얼른 중심을 잡으며 바로 섰다. 다행히도 재차의는 나보다는 멀찍이 널브러진 파수꾼들에게 용건이 있었다. 세게 내던져진 모양새로 찬 바닥에 팔이며 다리를 널브러뜨린 세 사람이 재차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커다랗게 짙어진 동공 위로 그림자가 덮이도록, 재차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자, 이제 어떡할까?”
그리고 제 정장 바지의 무릎께 주름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올리며 몸을 숙였다. 무릎을 쪼그리고 허리를 굽혀도 그는 조금도 둔해 보이질 않았다. 커다란 양어깨를 향해 재킷 등에 가로 주름이 길게 졌다. 그 뒷모습이 꼭 물에 빠진 먹이 구경하는 큰 곰 같았다.
“남의 대화를 훔쳐 듣고… 이 예의 없는 새끼들.”
…솔직히 저 파수꾼들이 원해서 훔쳐 들은 건 아닐 텐데. 구멍이니 좆이니 하는 사적인 이야기는…, 다 당신이 마음대로 한 거잖아요.
“송모래 넘보지 마. 너네가 벗겨 먹어도 될 물건이 아냐.”
아니, 그럴 리가 있냐? 누가 나한테 그딴 짓을 하고 싶어 해? 당신 같은 변태 성욕자가 아니고서야….
“내 연약한 가이드한테 안전띠 하나쯤은 매 줘야겠지?”
뜻 모를 말에 귀 기울이며 나는 주섬주섬 테이블 자리를 이탈한 사무용 의자를 잡아끌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서류며 목이 부러진 마이크가 지나간 소란의 증거처럼 남아 있었다. 어질러진 회의실을 깨끗하게 정리하자면 10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송모래가 손뼉을 치면 너희는 즉시 기절한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버려.”
불가능한 주문을 혼잣말하듯 뱉어 놓고 재차의는 뒤돌아 나를 봤다. 외국어로 쓰인 서류 낱장을 주워다가 보라색 파일에 집어넣으면서 나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
앉은 자리에서 기다란 몸을 곧게 일으키며 재차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멀찍이 마주 선 그를 따라 입을 다물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손안에 쥔 서류 파일을 테이블 위에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
“…….”
삐뚤어진 각을 맞추려 검지 끝으로 파일 모서리를 살짝 밀었다.
그러자 재차의가 오른손을 위로 번쩍 들더니, 그대로 타원형 회의 탁자의 끄트머리를 내리쳤다. 주먹도 아니고 손날도 아닌, 손바닥으로 대충 휘두르다시피 한 가격이었다. 원탁을 빙빙 두르다시피 한 의자들의 바퀴가 전부 헛돌며 삐걱대고 기껏 정리해 올린 서류며 파일, 마이크 장비가 와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커다란 탁자가 완전히 박살 나 양쪽으로 벌어지며 주저앉은 것이었다.
그리고 재차의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카만 눈동자에 안광이 돌고 흰 이가 가지런한 예쁜 미소였다.
“응? 송모래?”
“네.”
나는 얼른 큰 소리로 대답하며 그 앞으로 후다닥 다가갔다. 재차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눈동자만 내려 나를 봤다. 뭉근하게 이어지는 눈짓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긴장감을 꽉 졸라매며 잠깐 뜸 들인 뒤에야 재차의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설마….’
반신반의하며 나는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그와 동시에 재차의의 발치에 널브러진 파수꾼들의 눈동자가 뒤로 휙 넘어갔다. 미약하게나마 꿈틀거리던 움직임도, 작은 소리로 헐떡대던 호흡도 싹 그쳤다. 흰자위를 내보인 채 그들은 고요했다.
기절한 것이다, 재차의의 주문대로.
“…….”
재차의는 칭찬을 바라는 큰 개처럼 방긋 웃는데, 그 입매가 아름답고 눈빛이 자신만만해 보이는 만큼이나 나는 침묵했다. 마른 입술을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섭다는 감상도 대단하시다는 감탄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왠지 모를 반발심이 솟아서 그랬다. 재차의를 칭찬하고 칭송하고 찬양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재차의의 말이 맞다. 나는 별종인가 보다. 다른 가이드들이 그러듯이 ‘재차의 님’, ‘재차의 님’ 하며 그를 경애하고 그의 발등을 핥아 대고 싶지 않은 걸 보면. 그의 후광에 반사판을 들어 주며 그를 꾸며 주는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은 걸 보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선 나를 물끄러미 살피기도 잠시, 재차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송모래. 이제 어때. 괜찮아졌지?”
그의 표정이 한결 상쾌하고 밝아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네’ 하고 빠르게 대답했다.
“가자.”
그리고 바깥으로 나서는 그의 뒤를 군말 없이 따랐다. 힐끔 돌아본 회의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세 파수꾼은 어떤 다툼의 희생양처럼 불쌍하게 자빠져 있었다. 복도에는 요란한 소음을 들어서인지 그저 재차의를 쫓아온 건지 모를 구경꾼들이 많았다. 남들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재차의를 그림자처럼 쫓으면서, 나는 이이재를 포함한 파수꾼들이 정말로 오늘의 기억을 잊어버렸을까 궁금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짧은 시간 동안 재차의와 나 사이의 거리는 빠르게 벌어졌다. 재차의는 넓고 빠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지는 반면 나는 한 발 두 발 신경 써 걷느라 느릿느릿했다. 그러지 않으면 휘청거리거나 넘어질 것만 같아 별수 없었다.
낯선 파수꾼이 남긴 물리적인 충격의 여운을 몸살처럼 느끼면서 재차의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따르자니, 내 꼴이 꼭 주인 쫓는 절름발이 똥개 같단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속으로 떠올린 농담에 괜히 마음이 뜨끔해서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내 태도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복도의 벽지를 전부 가리기라도 하려는 양 벽에 붙어선 파수꾼이며 가이드의 시선은 오로지 재차의에게 향해 있었다.
‘정말… 희한하다.’
재차의 옆에서야 누군들 월 플라워가 아니겠는가. 소설책에서 읽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모습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 세계에 어울리는 장르를 선택하자면 하이틴보단 아포칼립스이고, 이곳 대슈망 센터 또한 댄스파티 회장은 결코 아니었다. 재차의에게 길을 내주고자 비켜선 파수꾼들은 각자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이며 텔레비전 광고, 뉴스에 심심찮게 얼굴 비치던 유명인들이었다. 그런 치들이 동화 속 공주님을 만난 어린애라도 된 듯이 눈 반짝이며 재차의를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같은 센터에서 일하면서 자주 볼 텐데… 그래도 저렇게 좋을까? 저 성격 파탄자가… 그렇게나 좋을까.’
정상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광경이 재차의에겐 일상이었다. 진작부터 느릿느릿하던 내 걸음은 큰 괴리감에 멈춰 버렸다. 재차의 님, 재차의 님… 하며 기쁜 듯한 얼굴로 말을 거는 가이드가 여럿 보였다. 뒷짐을 진 파수꾼도 그들 뒤로 두어 명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아리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방싯방싯 웃는 얼굴의 가이드며 파수꾼을 다루는 재차의의 태도는 늘 그렇듯 차가웠다. 매정하다 못해 사납다는 인상을 풍길 정도였다. 들뜬 문소여를 낙담시킬 때나 이이재를 포함한 파수꾼을 제압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전부터, 남을 다루는 재차의를 볼 때마다 받아 온 묘한 느낌이 있었다. 정확히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그 차이점을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재차의가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태도가 좀, 다른 것 같다.
물론 어느 쪽이든 다 나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 걸고 싶으면 말 걸면 되지, 왜 망설여?”
재차의의 뒤통수만 쳐다보는 내 귓가로 속닥속닥 수다가 들려왔다. 벽면에 나란히 붙어 선 이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였다. 아마 재차의를 주제로 한 이야기일 터였다. 수군수군 이어지는 대화를 못 들은 체하며 나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게 조금…, 조금 어려워서.”
“어렵긴 뭐가? 형 나쁜 사람 아냐.”
그런데 목소리가 꽤 익숙하다. 의아한 기운에 고개를 까딱이자마자,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에 닿았다. 똑똑, 노크하듯 오른쪽 어깨를 두들긴 이는 다름 아닌 문소여였다. 놀라 돌아보는 날 향해 그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제 곁에 선 가이드를 소개했다.
“모래 형. 이쪽은 내 파트너, 상록이 누나예요. 이름은 이상록이고 나이는 스물일곱 살. 형보다 딱 한 살 많아요. 그 정도면 또래라고 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