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35)화 (35/76)

35. 

허망한 생각에 잠긴 내게로, 세 번째 파수꾼이 다가왔다. 그는 아예 의자에 앉은 내 무릎 위로 올라타더니, 나를 아주 마주 보며 꽉 끌어안았다. 파수꾼이고 뭐고 간에 남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안겨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토 쏠렸다.

“송모래 님, 자존심 부리지 마요…. 우리도 좀 받아 보고 싶어서 그래요. 얼마나 대단한 가이딩인지 너무 궁금하단 말이죠. ‘그’ 재차의 님을 상대로 매칭률이 100%가 나올 정도면… 정말 하나도, 조금도 아프지 않게 된다는 건데.”

낮고 들뜬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고, 보다 높고 차분한 음성은 어깨 너머에서 들려왔다.

“딱 1분이라도 좋으니까 저희 좀 안 아프게 해 줄래요?”

굳은살 박인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무르며 이이재가 말했다.

“네? 진짜 진짜로 부탁인데…. 제발요.”

속이 다 타 버린 사람처럼 조바심이 실린 목소리였다. 어째선지 그 순간에 나는 이이재의 파트너 가이드가 불쌍했다. 팔이 부러진 채로도 이이재의 옆에 누워 그녀의 배를 토닥여 주던 지고지순한 모습이 뇌리에 떠올라서 그랬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달래어 주어도 매칭률이 높지 못한 파트너로서는 뉴타입 특유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음이 안타까워 그랬다.

능력을 크게 발휘할 때마다, 그만큼 큰 고통에 시달리는 뉴타입임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내 주변에는 유의미한 통증을 느낄 만큼 뛰어난 뉴타입이 없었기에 그래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차의에게 가이딩을 해 주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의 맥박을 내 것처럼 느끼고 그의 감정을 쉽게 추측하면서, 나는 감히 확신했었다. 재차의를 괴롭히던 기나긴 고통이 마침내 끝이 났다고. 내가 그의 악몽을 모조리 걷어 내고 그에게 진정 평안한 순간을 안겨 주었다고.

지나간 순간의 장면을 사진처럼, 생각을 내레이션처럼 떠올리는데,

“야! 네가 너무 아프게 누른 거 아냐?”

이이재가 큰 소리로 타박하며 ‘퍽’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앉은 자리가 삐그덕 흔들렸다. 아마도 내게 능력을 쓴, 내 무릎에 걸터앉은 파수꾼을 주먹으로 세게 친 모양이었다.

한 대 시원하게 얻어맞은 파수꾼이 억울하다는 듯 크게 탄식했다.

“내가 아마추어인 줄 알아? 아프게 안 해. 가만히 앉아 있게 한 거뿐이야.”

“뻥치지 마! 그럼 왜 말을 못 하는 건데?”

이이재가 따지듯 묻는 말엔 오히려 내 속이 뜨끔했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건데….’

딱히 어디서부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서 그랬다.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한다고 해서 이 오해가 풀릴 것 같지도 않거니와, 무력으로 나를 진압해 주저앉혀 놓은 이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버티는 일이라면 도가 텄다. 그러나 내 인내심을 끌어다 쓰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오래도록 짓눌린 몸이 점점 심하게 아파 왔다. 몸살이 난 듯 전신이 저릿하면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목덜미며 팔꿈치, 무릎 등 신체의 두드러진 부분의 피부가 찢길 듯 아릿했고, 근육이 죄 땅을 향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눕고 싶다. 쓰러지고 싶다.’

어떤 방식으로든 바닥에 누울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파수꾼들이 각자 놀란 듯 내는 숨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할 수 없어 답답했다.

이내 나를 앉힌 의자가 크게 헛돌았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무겁게 짓눌린 몸이 흔들거린 까닭은 그만큼 격렬한 힘에 있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대뜸 무언가 큰 그림자가 끼치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아 나를 안던 남자의 몸이 크게 휘둘리며 허공에 뜬 것이었다.

울렁거리는 시야 가득 차가운 바닥만 가득한데, 작은 비명이 들렸다. 이내 쿵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벗어나 보려 나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연신 힘을 실은 손톱은 딱딱한 의자 팔걸이에 거의 박히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자세를 비틀기조차 불가능했다.

‘하아….’

앞으로 푹 고꾸라뜨린 고개는 더욱 밑으로, 밑으로 처지기만 했다. 상황을 추측해 보려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던 차, 의심할 길 없이 뚜렷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일어나. 송모래를 풀어 줘.”

재차의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달갑고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다. 악동 같은 파수꾼들이 이제 나를 풀어 주겠거니 나는 기대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모래사장을 치듯 손바닥으로 남의 뺨 두들기는 소리만이 회의실 가득 울릴 따름이었다.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생각하기로, 아무래도 내게 능력을 쓴 파수꾼이 기절해 버린 것 같았다. 하기야, 그렇게나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데… 죽지 않았다면 다행일 거라 생각됐다. 재차의가 사람을 얼마나 세게 집어 던질 수 있는지, 이미 목격한 바가 있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게 살살 떼 내셨어야죠. 설마 죽여 버린 건 아니죠? 이거, 안 풀어 주고 죽은 거면… 나도 곧 죽겠는데….’

이제 새 가이드 찾으셔야 되겠어요? 어쭙잖은 농담이 입천장을 두들겼다. 그러나 내 잇새로 빠져나간 것은 힘에 부친 한숨뿐이었다. 이제는 숨이 막혀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됐다.

초를 다투며 희미해져 가는 시야 안으로 분주한 발이 보였다. 재차의가 내 주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의 발목 부근에 낯선 파수꾼의 발이 둥둥 떠 있었다. 남을 집어 던져 기절시켜 놓고는, 그를 인형 다루듯 집어 들고 돌아다니는 재차의였다.

“일어나.”

또 한 번 힘주어, 재차의가 말했다. 순간 그게 나를 향해 건넨 소리인 줄 알고, 못 움직이겠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신음만도 못한 웅얼거림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의식 없이 축 늘어져 있던 파수꾼의 발이 바닥에 똑바로 닿았다. 백색 바닥재 위로 흔들거리는 그의 그림자가 일부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좌로 흔들, 우로 흔들거리면서 그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만치 이상하게 일어섰다.

재차의가 명령했다.

“송모래를 풀어.”

그러자 검은 그림자에 작대기 하나가 더해졌다. 낯선 파수꾼이 휙, 팔을 높이 추켜든 것이었다.

“윽!”

그와 동시에 나는 의자에서 튕겨 나가다시피 하며 떨어져, 회의실 중앙 테이블 위에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파수꾼이 힘을 써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나에게 가하던 무거운 힘을 전부 거두었다. 그 바람에,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 하던 내 힘을 내가 못 이겨 앞으로 튕겨 나간 것이었다.

“콜록, 헉…!”

헐떡거리며 나는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속박에서 풀려나고 나니 뒤늦게 이마가 구겨지고 진땀이 온몸을 적셨다. 몹시 이상한 감각에 시야고 정신이고 간에 모든 게 다 어지러웠다. 발밑이 너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릴 적, 스카이콩콩이라 불리던 장난감을 한참 타다 내려왔을 때 느끼던 이질감이 수천 배로 닥쳐온 듯했다.

‘그건…, 그건 재밌기라도 했지….’

너른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어지럼증에 시달리는데, 내 팔뚝을 움켜쥐는 큰 손이 느껴졌다. 안 돼…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태껏 그래 왔듯이, 내 말보다는 재차의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나를 강하게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려 했다.

“우욱…!”

머리통이 크게 흔들리자마자 나는 겨우 참고 있던 구역질을 재차의의 가슴에 대고 해 버렸다. 물 한 모금밖엔 먹은 게 없어, 뱉어 낸 것도 고작해야 물이었다. 침인지 토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

어질어질한 와중에 나는 오른손을 다급히 움직였다. 탄식하거나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하며 토물로 젖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다행스럽게도 재차의는 온통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채였고, 특히나 재킷이 빳빳하고 두꺼웠다. 내가 뱉어 낸 물도 그의 재킷 가슴팍에 묻은 게 다였다.

더러운 물이 셔츠까지 스밀까 봐 황급히 잡아끄는데, 재차의는 그런 내 몸을 제 품 가까이 바짝 붙였다. 그 바람에 고개가 뒤로 훅 넘어갔다.

‘빌어먹을….’

전과 달리 이제는 온몸이 지나치게 가볍고 말랑해진 느낌이다.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다.

검은 옷깃이나 움켜쥐며 걸레짝처럼 늘어진 나를 안고서, 재차의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세 명의 파수꾼에게 원치 않는 포옹을 당하고 보니 재차의의 포옹이 확연히 특별해졌다. 그는 내게 안기는 게 아니라 나를 안기만을 일방적으로, 아주 강하고 분명하게 원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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