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34)화 (34/76)

34. 

그러잖아도 과중 업무로 인해 원치 않은 핀잔을 먹은 와중이라, 재차의의 호출이 싫지만은 않았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딱 한 번, 그것도 우연찮게 해낸 나에겐 연습이 필요했다. 되도록이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재차의가 나를 호출한 이유야 당연히 가이딩을 해 달라는 것일 테고…. 그러니 주눅이나 들고 지레 겁을 먹기보다는 그와 일하는 순간을 기회로 삼아야겠다.

내겐 재차의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다. 어차피 내 앞에서 재차의는 지금보다 더 무서워질 순 없기 때문이다. 하도 많이 무서워하고 또 자주 놀랐더니, 이제까지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 지경이다. 어디서 타임머신이라도 구해 와서 시간을 거스르면 또 모를까.

긴 복도를 쭉 가로지르다가 문득, 조금 전 속으로 중얼거렸던 농담이 생각났다. ‘고래 비늘 자랑에 새우 껍질 터진다’고….

‘근데 고래도 비늘이 있나?’

하긴 돌고래도 비늘이 없고, 상어도 비늘이 없으니 고래도 비늘은 없지 싶었다. 그러자니 내 농담이 아주 시의적절했다 싶었다. 애초에 내겐 있지도 않았던 능력이며 의도를 두고, A급 가이드들은 새우 역할을 자처하며 껍질 터진다고 성화였으니 말이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피식 실소하는데, 문득 바람이 코앞에서 불었다. 앞머리가 붕 뜨며 날리는가 싶더니 나는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눈 깜빡할 새에 두 발이 바닥에 끌리며 복도에서 낯선 방 안으로 옮겨졌고, 발바닥엔 미약한 마찰열이 남았다. 풀썩 떨어지다시피 앉혀진 자리는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 위였다. 의자 등받이가 크게 기우뚱거리고 바퀴는 한편으로 도르륵 굴러가기까지 했다.

당황스럽고 경황이 없어, 나는 주먹부터 불끈 쥐었다. 고개를 들고 살펴본 방은 아주 넓은 희의실이었다. 방의 중앙을 가로질러 놓인 타원형 책상은 크고 무거워 보였고, 자리마다 까맣고 작은 마이크가 놓였다. 한쪽 벽면에는 보라색 점이 가득 찍힌 낙서 같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보다도 먼저 확인해야 할 건 나를 끌고 온 이들의 정체였다.

은연중에 재차의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회의실 문을 걸어 잠그며 내 얼굴을 확인하는 이들은 총 세 명이었다. 둘은 남자, 하나는 여자인데 세 사람 모두 체격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고 늘씬해서 아이돌 가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나는 낙담했다. 그들 모두 까만 슈트를 상하의로 차려입었고, 특히나 한 놈은 손목 부근에 구속복 버클이 덜렁대는 탓이었다.

‘가이드였으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하필 파수꾼들이다.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며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곧바로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정확히는, 차마 서 있을 수가 없어 별수 없이 쓰러졌다. 내 몸이 큰 바위라도 된 듯 순식간에 무거워져 앉은 채로도 균형을 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손과 발에 돌이 묶이고 배 속에 장기 대신 모래주머니가 꽉 찬 느낌이다. 파수꾼이 내게 능력을 쓴 것이다.

파수꾼이 초능력을 써 대슈망 소속 가이드를 위협하는 짓은 분명 규칙 위반일 텐데. 생각이 거기에 닿자 경계심이 크게 부풀었다. 규칙까지 어겨 가면서,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나를 묶어 둔 치들이다. 내게 뭘 바라는진 몰라도 그 목적은 흉악할 게 분명했다.

‘하….’

이 긴박한 순간에 왜 가이드 무리의 뒷모습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며 저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던 움직임…. 만일 파수꾼들마저 그와 닮은 악심을 품었다면, 나를 해치거나 부러뜨리거나 죽이려는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걱정에 사로잡혀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수수께끼 파수꾼들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세 사람은 나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 선 채, 서로의 팔뚝을 툭툭 쳐 대기 바빴다. 어떤 일을 서로에게 미루는 듯한 몸짓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마를 찡그리며 나는 그들 모두의 얼굴을 똑바로 살폈다. 무슨 일이 있건 간에 저 얼굴들을 똑바로 기억하고 복수해 줘야겠다 생각해서 그랬다. 그런데 뜻밖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섞여 있었다. 바지 슈트를 차려입은 여자 파수꾼으로, 쓰러져 잠든 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닷새 전의 게이트에서 만나 내 두 팔로 침대에 옮겨 주었던 바로 그 파수꾼이었다.

혼미한 와중에도 나는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속이 역겹도록 무거운 감각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면서, 고문이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라고 자기 암시를 열심히 걸었다. 무거운 역기를 어깨로 밀어 올린다 생각하며 억지로 허리를 곧게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어’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뭐야! 어떻게 일어나는 거지?”

놀란 듯 구시렁거리는가 싶더니 문득, 무리의 가운데에 선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곤 허공에 손바닥을 대고 천천히, 힘주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툭.

문을 향해 뻗으려던 내 두 발이 다시금 바닥에 딱 박혔다. 그리고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앉는다는 감각조차 마비된 몸이 풀썩 의자 위에 떨어져 내렸다. 어찌나 큰 무게에 세게 짓눌렸는지 의자 시트에서 삐그덕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야, 조심 좀 해! 뭘 하기도 전에 기절해 버리면 안 된단 말이야.”

“아니, 앉혀만 두려고 했더니 일어나잖아! 이상하다. 보통 이 정도면 꿈쩍도 못 하는데….”

이젠 그의 말대로 됐다. 정말이지 더는 움직일 수가 없다. 내 몸의 무엇 하나도 꿈쩍하질 못하겠다. …무겁다. 온몸, 머리, 손, 발, 심지어는 눈꺼풀까지 무겁다. 그제야 저 파수꾼의 능력을 알 것도 같았다.

‘중력….’

이내 검은 구둣발이 내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뚜벅뚜벅 울렸다. 이쯤 되니 어느 정도의 폭력은 당연히 따르겠거니 예상이 갔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는 몰라도, 나를 고문하기 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요구부터 해 줬으면 좋겠다. 되도록이면 나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억울하게 죽임당하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겠나. 여태껏 대슈망 소속 가이드가 되었답시고 당한 일들이 숱한데,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죽을 순 없다.

마침내 파수꾼이 내 두 발 앞에 섰다. 바닥으로 푹 꺼진 시야에 상대의 구두코만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사이즈가 작은 걸로 보아 여자인 듯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는 기척이 크게 느껴졌다. 긴장감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진 만큼이나 손발이 굳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리고 파수꾼은 나를 껴안았다.

“…….”

엥, 뭐야?

“으으으음!”

내 목덜미에 제 두 팔을 두른 여자의 턱이며 뺨이, 어깨며 귓등으로 느껴졌다. 허리를 깊이 숙여 가며 그녀는 나를 꼭 안더니,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흐음…. 잘 모르겠네. 아무 느낌이 없는데….”

“아, 비켜 봐. 나도 안아 볼래.”

이내 여자의 팔이 내게서 멀리 떨어지고, 보다 큰 치수의 운동화가 시야에 삐죽 들어왔다. 재차 뜻 모를 포옹이 이어졌다.

중력에 짓눌려 고개 숙인 채 눈만 끔벅이는 날 향해, 제삼의 목소리가 말했다.

“송모래 님. 재차의 님한테만 가이딩을 해 주신다던데 사실이에요? S급 미만 파수꾼한테는 일부러 못 하는 척 안 해 줬다고 여기, 이이재가 그러던데.”

‘이이재’?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대화며 상황의 맥락으로 유추하자니 여자 파수꾼의 이름인 듯했다. 나 원 참, 게이트에선 기절해서 잠만 자느라고 나와 대화 한번 나눠 본 적 없으면서…. 게다가 그녀를 다정다감하게 돌봐 주던 전속 가이드도 있지 않았던가. 나중 가서 누구에게 무슨 소문을 들었길래,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이야기로 친구들을 모아 온 건지 내심 황당했다.

가이드도 그렇지만 특히나 파수꾼에 대한 이미지는 대슈망에 대해 모를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 됐다. 이전에는 파수꾼이면 다 영웅이고, 강인하며 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체를 알고 보니 하나같이 인상이 기우뚱거린다. 지닌 능력들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힘이면서 성격들은 다 이렇게 한 군데씩 모자라거나 뒤틀렸거나 어리숙하다.

“왜 내 핑계만 대! 너도 그랬잖아, 후이 언니한테 전해 들었다며. 송모래는 기백이 장난 아닌 가이드라며?”

이이재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소리치자, 마른 팔로 내 몸을 꼭 껴안은 남자가 중얼중얼 대꾸했다.

“맞아.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헤드헌터 새끼들이 꼬드기는 걸 조건 따져 가며 우리 쪽으로 겨우겨우 모셨다고 그랬어.”

하나는 맞고 나머지 아흔아홉이 싹 다 틀린 얘기였다. 자칭 헤드헌터로부터 문자를 받았던 건 사실이다. 내가 안후이 부장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도 맞긴 한데, 순전히 ‘그래서 대슈망에서 온 연락도 스팸 광고인 줄 알았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대슈망에서 내게 그렇게나 대놓고 접근을 해 댔으니 채용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닌가 싶긴 하다. 헤드헌터고 매니지먼트고 나발이고, 전부 비싼 중계비를 뜯어내려 벌인 수작이었겠지.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샀다니…. 지난날 신문실에서 대화할 적에 안 부장이 보인 떨떠름한 반응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하필 말주변에 이어 눈치까지 없는 나라서, 여태껏 오해를 산 줄도 모르고 지냈다.

이쯤 되니 윤희수도 안후이도 아닌, 그저 내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문의 출처가 두 군데라니, 그들 모두가 이상한 사람인 것보다야 내가 문제아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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