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휴대폰 잠금 화면에는 ‘2:30’이라 숫자가 떠 있었다.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내 휴대폰의 낯선 모습에 일순 주춤했다. 지난 새벽, 난데없는 소란과 무례한 명령질로 레스토랑 직원들을 부려 먹으며 재차의가 던져 준 기기였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행위 끝에 닥쳐온 굶주림이 너무나 커서, 허겁지겁 빵이며 수프, 샐러드와 고기를 입에 욱여넣느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혓바닥부터 목구멍까지 온통 헐어 버려 음식의 맛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허기를 달래느라 재차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방으로 돌아와선 기절하듯 잠을 잤다.
그렇게 두 시 반,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새 휴대폰을 어색하게 들여다봤다. 박살 난 액정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인 구형 휴대폰이 익숙한 내게, 빤딱빤딱하단 느낌이 들 만큼 새것인 기기는 도통 눈에도 손에도 익질 않았다. 특히나 배경 화면으로 설정된 재차의의 셀카 사진이 너무나 어색하고 낯설었다.
휴대폰을 쥔 손을 얼굴 위로 올려, 하이 앵글로 찍은 그의 셀카는 남색으로 어두웠다. 한밤중에 숙소 안에서, 현관의 노란 센서 등 불빛만으로 코와 턱을 밝히며 찍은 사진이었다. 빤빤하니 잘생긴 재차의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고, 너무 어두워서 검어 보이는 귀 옆에는 내가 있었다. 이불을 목 위까지 덮어 놓고 세상 피곤하게 자는 얼굴이 남의 것 같았다.
‘…….’
그러니 이 사진은 내 방에 침입한 재차의가 내 몸에 대고 자위하기 전에 찍은 셀카였다.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는 유일한 사진이기도 했다.
재차의는 참 강렬한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나쁜 의미로는 더욱 그랬다. 그가 찍어 놓은 사진 한 장의 구도, 그의 표정, 또 자신의 얼굴을 내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해 놓은 행위까지 모든 게 너무나 재차의다웠다.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배경 화면을, 나는 구태여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대슈망에서 지급해 줬을 물건인데 내 취향대로 귀여운 강아지나 보기 좋은 바다 사진으로 교체하면 뭐 어떠냐 싶으면서도, 혹시 그랬다가 재차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혼쭐이 날 거란 짐작에 무서웠다.
액정 속 재차의의 이마에 뜬 숫자가 ‘2:31’로 변했다. 마침 나를 태운 승강기 문도 ‘땡’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본관 5층, 카페테리아가 코앞이었다.
애써 덤덤한 얼굴로 복도를 지나, 나는 카페테리아 내부를 물끄러미 살폈다. 사람 붐비는 점심시간을 피하느라 일부러 늦게 방에서 나왔는데도 카페테리아는 몹시 붐볐다. 너른 창가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고, 커피 그라인더 소리가 크게 울리는 작은 카페의 바 좌석이 그나마 비어 있었다. 눈짓으로 빈 스툴을 먼저 확인한 뒤에야 나는 뷔페 코너로 향했다.
접시를 들고 슬금슬금 살펴본 뷔페의 음식들은 전부 맛있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모든 음식을 한 입씩 맛보고 싶었지만, 하나둘 내 얼굴에 꽂히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걸음을 빨리했다. 파수꾼이고 가이드고 가릴 것 없이 ‘재차의’, ‘파트너’ 운운하는 소리들이 귓가에 맴도는 것도 같았다.
“야…, 듣던 대로네.”
그런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애써 흘려 가며, 익숙한 음식들로 접시를 채웠다. 우선 토마토파스타를 접시 가득 담았고 감자튀김, 햄버그스테이크를 가장자리에 얹고는 바 자리로 직행했다.
남들 하는 소리가 어찌 됐든 나는 밥을 꼭 먹어야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뒷담화도 배부른 뒤에 들어야 한결 나을 테니 말이다. 내가 밥을 굶는다고 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지도 않을 테고.
좁은 바 자리에 접시를 올려놓고 스툴 자리에 앉자, 커피를 내리던 직원이 나를 살폈다. 그리고 흰 머그잔을 꺼내어 잔을 채워 주었다. 인적 없는 자리를 원했을 뿐 커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갓 내린 커피 냄새가 진하고 따듯해서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꾸벅 숙이자 직원도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곤 하던 일을 하려는 듯 쉽게 등을 돌렸다.
‘됐어.’
그제야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삼삼오오 모여서 재차의 님 운운하는 가이드들과는 멀리 떨어졌고, 힐긋거리며 내 쪽을 살피는 파수꾼들도 구태여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카페 직원도 내게 큰 관심이 없으니 혼자 밥을 먹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파스타 가득 덮인 토마토소스를 포크에 살짝 묻혀 맛봤다. 그러자 입맛이 돌아 손이 분주해졌다. 부드러운 면을 실타래 감듯 돌돌 말아다가 한입에 털어 넣으려는데,
“안녕하세요, 송모래 님.”
낯선 인사말과 함께 내 옆자리가 채워졌다. 당혹감에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인상의 여자가 하나, 그녀 뒤로 남자가 셋 보였다. 네 사람 모두 백색 정장 차림새에 미소를 뺨에 건 채였다.
“인사가 늦었죠? 처음 뵙겠습니다. A+급 가이드 이상록이라고 해요. 저희 모두 가이드 식구들이에요.”
‘가이드 식구들’의 대표자처럼 맨 앞에 선 이가 그렇게 말했다. 높은 등급만큼이나 외모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깨끗한 이마며 둥근 눈썹, 자를 대고 자른 듯 깔끔한 단발머리에서 단정하고 바른 인상을 풍겼다. 옅은 화장기가 감도는 입술에 걸린 미소도 상냥해 보였다.
‘예쁘다.’
나는 쥐고 있던 포크를 천천히 내렸다. 혹시 식사 자리에 합석하려는 건가 생각되어 마음이 조이면서도 반가웠다. 아는 가이드 친구는커녕 지인 하나 없다 보니, 새로운 무리에 낄 수 있다면야 내겐 달가운 기회였다. 아주 잠시간은 그랬다.
“희수 씨한테 전해 들었어요. 첫 파견부터 과잉 진압으로 기절까지 하셨다면서요.”
“…….”
대뜸 뭔 소릴 하는 거지?
내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반쯤 실눈을 뜨고서 나는 이상록이라는 여자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벽을 치듯 우르르 선 세 남자의 옆구리쯤에 탁한 금색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윤희수였다.
키 큰 동료 뒤에서 눈만 이리저리 굴려 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내 직감이 맞았네.’
그뿐이었다. 진작 예감했었다, 윤희수는 나를 싫어하는 데다 뒤에서 허튼 소문을 돌릴 만한 놈이라고.
그런데 희한했다. 내 이야기를 안주 삼아 동료들을 끌어모아 놓고, 윤희수는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양 멀찍이 발을 빼고 있었다. 오히려 나서서 내게 상황을 설명하는 일은 A+급 가이드라는 이상록 몫이었다.
“함부로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요. 요즘 많은 가이드들이 인사이동으로 속 시끄러운 때라 발 없는 말이 많이 돌거든요. 아시죠? 저번 사건으로 재차의 님 전담 대기조가 없어진 거.”
“…….”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라 눈만 끔벅일 따름이었다. 대슈망에 온 이후 하도 이런저런 일을 연달아 겪어서, ‘저번 사건’ 자체가 전생의 일인 양 멀찍하게 느껴졌다.
‘게이트 추출물을 훔쳐다가 나를 공격한 건 한 명이었는데, 왜 대기조 전체가 없어진 거지…?’
이상록은 그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투로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일에 반영된 내 의지나 책임을 수치로 따지자면 단언컨대 0이다. 그 가이드가 나를 공격한 건 그 가이드가 책임질 잘못이고, 그로 인해 대기조 자체가 휘발된 것이야 대슈망 센터의 간부들, 혹은 재차의의 선택일 테니 그들 책임이다.
“송모래 님.”
결과만 놓고 봐도 그렇다. 대기조가 사라져서 내게 조금도 득 될 게 없다. 재차의의 하나뿐인 가이드가 되어서야, 내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사달이 난다는 뜻이니까. 재차의의 신변에 달린 세계 평화라는 목줄이 내게도 묶인 꼴이다. 나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면 좋지 않은데.’
입맛이 뚝 떨어져 나는 아예 포크를 놓아 버렸고,
“저기요, 송모래 님?”
무리 지은 남자 가이드 중 하나가 다시금 내 이름을 불러 댔다. 그에 퍼뜩 짜증이 치밀었다. 이 사내새끼는 또 뭐야, 왜 끼어들어서 남의 이름을 불러 대? 이상록은 내게 자기 이름이라도 알려 줬지, 이 새끼는 어디 사는 누군지 내가 알 게 뭐야?
“뭐요.”
불퉁한 마음에 인상을 구기며 그를 직시했다. 상판 편편하니 평생 들어본 물건 중 제일 무거운 게 컴퓨터 마우스일 새끼가 남의 대화에 왜 끼어들어, 기분 잡치게.
그러자 ‘송모래’, ‘송모래’ 노래를 부르던 놈이 입을 다물고 눈길을 흘린다. 그 시선 끝에 다시금, 똑단발을 한 이상록이 있었다.
‘대슈망 소속도 별거 아니네. 저런 한심한 새끼도 여기 가이드라고….’
할 말 있으면 직접 나서서 말하라고, 저 멸치는 물론이고 윤희수의 멱살까지 양손으로 잡아 흔들고 싶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봐서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구겼던 미간을 펴며 나는 이상록을 향해 말했다.
“마저 말씀하세요.”
그러자 이상록이 고개를 휙 돌려 제 뒤에 선 동료들을 한 번 살피더니, 다시금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게… 송모래 님께서는 재차의 님 전속 가이드로 대슈망에서 특별히 모셔 왔잖아요.”
“…….”
그에 나는 의아했다. 대슈망에서는 파수꾼에게 납치당하듯 질질 끌려와 신문실에 집어넣어지는 걸 특별 대우라 생각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