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31)화 (31/76)

31.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 목 막히게 퍼석퍼석한 에너지바를 아끼고 아껴 속을 채우면서, 나는 본관 카페테리아에 갈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당장 이 방의 부엌에 구비된 기름진 음식들만 해도 눈에 밟혀 고역이었다. 전기세를 포함한 관리비를 낼 일이 없음에 안주하며 냉장고를 몇 번이나 열어 보았는지 모른다. 설탕 가득한 음료들이며 맛있어 보이는 롤케이크를 눈으로만 감상하며 에너지바를 질겅질겅 씹었다. 스테이크, 파스타, 장어덮밥 밀키트 세트며 사치품으로만 여겨지던 비싼 아이스크림, 고급 초콜릿, 사탕에 이르기까지…. 그것들 중 무엇 하나도 먹지 않고 꾹 참았다.

어젯밤에는 라면 한 봉지만 끓여 먹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 값이 한 달 뒤에야 받을 월급에서 빠지는 게 아니면 어떡하나 싶고 당장은 주머니에 천 원 한 장 없는 사정이 걱정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너절한 염려에는 재차의의 탓도 소분 있었다. 그가 윤희수에게 뇌까린 말이 비수가 되어 내 머리통에 꽂혀 있었다. 내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윤희수는 나를 싫어하는 데다 음해하고도 남을 만한 남자라고. ‘송모래는 재차의가 없으면 무능력자다’, ‘E급인 데다 거지 출신이다’하는 소문이 진작 파다할 거라고…. 구태여 그 소문에 미끼를 던져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지나간 내 인내심과 굶주림이 그저 허망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쉽게 사라질 허탈함이지만, 당장은 지나온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허망하고 허무해서 한숨만 푹푹 쉬는데,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어?”

재차의가 물었다.

“그야, 문소….”

…여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하려다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재차의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을 크게 뜬 채 재차의는 몇 초간 움직이지 않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허둥지둥했다. 그가 지금 당장 문소여의 숙소를 찾아가 살인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게 엄습해서는, 허둥지둥하며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붙잡고 끌어 내렸다.

그러자 더욱 놀랄 일이 생겼다. 재차의가 내 손힘에 이끌려, 순순히 자리에 풀썩 앉은 것이었다. 내가 발악을 하며 발버둥을 치고, 주먹질을 날리고, 없는 손톱을 세워 피부 위를 긁어 놓아도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던 남자가 쉽게 몸을 앉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천사 같은 미소를 방긋 띠며 제 팔뚝을 더욱이 가까이, 내 품 안에 밀어 넣기까지 했다.

마저 잡으라는 듯 내밀어 보인 굵은 팔뚝을 나는 어거지로 떠안았다. 그리고 무진 떨떠름했다. 난데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니 미처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당장은 재차의가 기뻐 보여서, 그 기분을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뭇머뭇 그의 팔뚝을 안았다. 어릴 적에도 가져 본 적 없는 곰 인형을 안듯이, 재차의의 팔뚝을 두 팔로 감아 안았다.

“송모래.”

그러자 재차의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 질문엔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용건이나 할 말이 있어 부름이 아니라, 그저 기분이 좋아서 ‘송모래’ 하고 내 존재를 확인하는 소리 같아서였다. 아주 드물게도, 이번만큼은 내 추측이 맞았다.

“송모래. …송모래. …송모래.”

연이어 내 이름을 부르는 재차의를 나는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재차의가 이가 보이도록 크게 웃더니 대뜸 내 코를 깨물었다.

“…….”

너무 놀라서 나는 꼼짝조차 못했다. 순간 그가 내 머리통에 대고 박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놀랐다. 그러나 재차의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내 코끝을 살짝 깨물더니,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밥 먹으러 가자.”

그의 굵은 왼팔이 내 허리에 감기고, 왼손은 어서 잡으라는 듯 눈앞에 내밀렸다. 그가 뻗어 온 손을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부담스러워 구경 한번 해 보지 못한 본관의 뷔페며 호텔 최상층에 위치하는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가 줄 것이란 걸 너무 잘 알아서였다. 그건 매우 강렬하고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지… 금은 새벽 세 시인데요.”

재차의가 던져 주는 스웨터를 곧이곧대로 받아 입으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재차의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새 바지를 내 품 안에 던지듯 건넸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귀환했는데.”

그리고 마른 수건 한 장을 들고 내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그 뻔뻔하고도 당당한 대답에 감탄할 새도 없이, 나는 사타구니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손을 허둥지둥 막았다. 재차의는 내 반응에는 아랑곳도 않고 정액으로 더러워진 내 허벅지와 볼기를 쓱쓱 문질러 닦았다. 수건을 장갑처럼 덮은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골 사이에 닿자 겁이 나, 나는 몸을 급히 웅크렸다.

“그새 부어서 통통해졌네.”

굵은 손가락으로 내 뒷구멍 주위를 한참 쓱쓱 닦아 내더니, 재차의가 쓰읍 하며 공기 빠는 소리를 냈다. 마음이 조여 나는 그의 입술을 올려다봤다. 슬며시 벌어진 입술 새로 빨간 혀끝이 비져 나와,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꼬르르륵….

긴장으로 수축한 아랫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

“…….”

방 안이 워낙 넓고 고요한 탓에 그 소리는 내 목소리보다 더욱 크게 울렸다. 전과 다른 빛깔의 수치심에 나는 고개를 스르륵 떨궜다. 아랫입술을 꾹 씹으며 위장을 힘주어 조이는데, 꼬르륵, 꼬르륵… 눈치 없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댔다.

“바지 입어.”

이내 간절히 기도해 온 명령이 내게 떨어졌다. 혹여 재차의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나는 허둥지둥하며 흰 바지로 다리와 엉덩이를 가렸다.

홧홧한 열기가 느껴지는 얼굴을 들어 눈치껏 살펴본 재차의는 나를 등진 채 길게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구릿빛 피부로 뒤덮인 그의 전신은 짐짓 완벽해 보였다. 삶에 아무런 고민도, 갈등도, 원망도 상처도 불안도 없이, 그는 아주 완벽한 존재처럼 보였다. 척추를 기준으로 쩍 벌어진 등의 근육과 넓은 어깨, 탄탄한 팔과 다리는 온통 빽빽하고 험해 보이는데, 나른한 기운이며 여유로운 움직임은 우아하고 자신만만했다. 그야말로 이 큰 방의 주인 같다. 오히려 내가 시중을 들러 온 외부인이 된 기분이었다.

재차의가 지닌, 그의 여백이 나는 부러웠다. 그 여백은 마음 안이 바쁜 문제와 고민들로 꽉 차서 동동거리는 나로서는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다가 제 옆자리에 대충 던져 놓고, 내게 평생 맛본 적 없는 모멸과 고통, 수치심을 처박아 놓고도 그는 멋있었다. 대범하고, 능력 있고, 매력적이었다.

그런 재차의는 아주 좋아 보였다. 메스꺼운 부러움, 야릇한 호감. 그건 오늘날 재차의의 앞에 놓인 내가 느끼기엔 상당히 부조리한 마음이었다.

‘앞으론 볼일이 생기거든 새벽에 외출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호텔 복도는 온통 조용했다. 하품하는 재차의를 따라, 나는 승강기에 올랐다. 최상층 버튼을 꾹 누른 뒤 재차의는 내 뒤에 붙어 섰다. 그리고 나를 세게, 아주 와락 끌어안았다.

“…….”

누구의 품에 안겨 내 정수리 위에 상대의 턱이 놓이는 감각이 낯설어도 싫진 않았다. 승강기의 반질반질한 문에 비친 재차의의 실루엣은 어른스러우면서도 나사가 하나 빠진 듯 요상해 보였다. 어쩌면 나는 이 남자에게 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꽤 잘 맞는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랬다.

나는 평생 내 생각이며 감정, 의견을 똑바로 내놓지 못하면서 살았다. 너무 바쁜 부모님도 수다스러운 남매들도, 말로만 사랑을 뇌까리는 삼촌도 내 마음 따위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모두 항아리 속 뼛가루가 되고 나니 남은 세상 사람들은 내게 질문만을 던져 댔다. 나는 그들이 건네 온 어떤 말에도 답을 하기가 어려운 머저리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평생 대답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아 그랬다. 그래서 여러 번 실패했다. 사람을 사귀는 데에 실패하고 소통에 실패하며, 나를 이상한 존재 보듯 흘기는 시선을 받으며 살다 보니 절로 과묵해졌다. 간이 작아졌고, 자신감이 소멸했다. 최소한 얼굴과 몸은 멀쩡해 그런 내 성격을 ‘남자다움’으로 포장할 순 있었지만, 그건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이쑤시개 방패였다.

그런 나… 에겐 재차의가, 어울린다. 재차의는 내 의견이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를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구처럼 움켜쥐고 휘두르니까.

애초에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섹스 토이로 태어났으면 무난했겠다. 뒷구멍에 박는 딜도나 좆 박는 구멍이 뚫린 자위 도구, 애초에 둘 중 하나로 태어났더라면 아무 감정도 느낄 필요 없이 잘 쓰이고, 잘 버려졌을 텐데.

“…….”

승강기 문을 통해 재차의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진작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입매를 굳힌 채 그는 날 봤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그 검은 눈동자를 나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최상층에 도착해 승강기 문이 열리고, 더는 서로의 얼굴을 비출 데가 없어질 때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