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팔뚝의 털이 오소소 직각으로 서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열심히 적당한 대답을 꾸려 냈다.
“신경 쓰겠습니다.”
그러자 윤희수가 ‘네’ 하는 짧은 대꾸를 들려주었다. 그대로 그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더는 대화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침대와 2미터쯤 떨어진 의자 자리로 가 몸을 앉혔다. 더는 윤희수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그의, 어딘지 꺼림칙한 태도며 눈빛에 내 마음은 스무 배로 불편해졌다.
‘뭐야? 나라고 뭐 자기가 좋은 줄 아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니 마니… 굳이 일본 속담 쓸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리고 뒤늦게 떠올렸다. ‘프리한’ 상태라는 건 구속복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었나 보다. 그 뒤에 수갑이란 단어가 붙는 걸 보면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가이드만 출입이 가능하다던 비품실에서 구속복과 수갑은 세트 상품인 양 걸려 있었으니까.
‘아, 준비….’
그제야 대슈망 호텔의 내 방 앞, 인터폰 너머에 선 직원의 지시가 이해됐다. 파견을 나갈 준비를 하라더니, 파트너에게 입힐 구속복과 채울 수갑을 챙기라는 뜻이었나 보다.
작은 한탄을 속으로 삭이느라 나는 한숨 대신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이렇게 눈치가 더뎌서야… 남은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순전히 체력이고, 일하는 이유는 그저 먹고살기 위함에 불과했다. 내 생활은 가난했지만 단순했다. 궁핍한 생활 속에 내가 감당해야 할 건 그저 나뿐이었다. 나 자신이 내게 가장 큰 문제이고 난제였었다.
그런데 대슈망에서는, 나를 감당해야 할 게 남들이 됐다. 돌변한 윤희수의 반응을 보면 내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는 눈치 없는 나.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고 말을 붙이며 싹싹하게 웃을 줄이나 알면 좋을 텐데, 타인의 냉담한 외면에 팔뚝에 소름이 끼치는 나. 이런 나를 남들 앞에 내놓아야 하고, 이런 나인 채 남들 속에 섞여야만 한다.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재차의한테 구속복을 안 입힌 거? 내가 입으라고 한다고 입을 사람도 아니잖아. 내 얼굴에 도로 집어 던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수갑을 안 가져온 거? 재차의는 나보다도 차분하던데? 수갑을 채울 만한 일은 생기지도 않았고…. 사실 구속복이고 지갑이고 다 핑계에 불과하고 좀 전에 일을 안 거들어서 화가 난 걸지도….’
답이 나오지 않는 추측만 연잇고 있자니 삐그덕 소리가 났다. 기절한 파수꾼이 자리한 침대 위에 그녀의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올라가 눕는 소리였다. 커다란 몸을 옆으로 돌려 가며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눕히더니, 그는 상처로 인해 퉁퉁 부어오른 손을 제 파트너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친밀하고 다정해 보이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 움찔하는 나 대신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 나는 잠깐 고민해야 했다. 짧은 뜸을 들인 끝에 고개를 한 번, 깊이 끄덕였다.
“저….”
내게 호의적인 상대의 태도에 힘입어,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뭘 해야….”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이제 우린 필요 없죠. 재차의 님께서 직접 와 주셨으니까요.”
그 여상스러운 목소리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 게이트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물음표에 갇힌 양 답답하게 느껴지는 나였다. 그토록 미지로 가득 찬, 앞도 뒤도 알아볼 수 없고 나를 부르는 존재가 누구인지조차 알 길 없는 어둠 안에 재차의는 혼자였다. 설명은 턱없이 부족하고 도와줄 손 하나 없는 암흑 안을, 그는 홀로 헤집으며 전투 중이었다.
‘송모래….’
나를 부르던 메아리 같은 음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섬뜩했다. 진득한 혼돈에 짧은 시간 시달린 나조차도 속이 갑갑한데, 진작부터 독한 수작질에 시달려 온 선발대라면 먼저 와 겪은 일이 많을 테니 잘 알지 않겠는가. 이곳은 A급 파수꾼이 넷이나 무기력해질 정도로 위험한 게이트였다. 그의 파트너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재차의가 왔으니까 이제 됐다고? 재차의를… 도와주러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막말로, 그의 파트너는… 기절을 했을 뿐 큰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어서 가이딩을 해서 이성을 깨워 주면 재차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살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온통 하얗기만 하니 재차의가 어디쯤에 있는지, 괴수들은 또 어디에 몇 마리나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재차의가 들려준 말을 복기했다.
‘나야 안 들리지, 게이트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말든. 나한텐 네가 있으니까.’
내가 곁에 없는 지금은 어떨까. 게이트가 부리는 악질 수작이 재차의에게도 영향을 끼칠까? 그렇다면 그는 누구의 목소리를, 어떤 메아리로 듣고 있는 걸까.
‘하…. 답답하네.’
무기력증에 걸린 환자처럼 임시 기지에 처박힌 내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만약 파수꾼이었더라면, 하다못해 조금 더 능력 있는 가이드였더라면 재차의를 따라나섰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몽상 같은 가정을 하며 무턱대고 품는 헛된 충동이 아니었다. 진실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안개로 위장한 게이트의 미묘한 곳곳을 살펴보고 싶다. 괴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또 이곳의 심장, 핵이라는 건 어떤 모습인지 전부 알고 싶다. 암흑이 안겨 주던 환청이며 사방에서 딱딱 이빨을 악물던 괴수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랬다.
…긴긴 생각을 늘리는 날 향해 남성 가이드는 속 편한 소리를 건넸다.
“저기 식량이라도 챙겨 드세요. 곧 돌아가서 식사하지 싶긴 한데…. 배고프시면요.”
그 말에 걱정이 뚝 그쳤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움직였다. 가이드가 눈짓한 기지 귀퉁이로 가, 잠금장치가 풀린 상자를 열어 보니 에너지바 여러 개와 캔 커피가 가득했다. 주섬주섬 양손에 에너지바 다섯 개를 움켜쥐고 뒤를 한 번 살폈는데, 다행히 나를 지켜보는 눈은 없었다. 나는 얼른 식량을 점퍼 주머니에 두둑하게 챙겼다. 그리고 캔 커피를 살피는 척 연기했다.
그와 동시에 임시 기지 밖으로 나섰던 가이드가 돌아왔다. 그는 윤희수를 향해 무어라 귓속말을 하는가 싶더니, 기지 전체를 둘러보며 말했다.
“게이트 입구를 막고 있던 괴수가 퇴각했어요. 암흑 공간도 깨끗이 사라졌고요. 릴리가 다가오는 신호가 잡힙니다. 우리는 먼저 귀환합시다.”
어리둥절하니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워 나는 가만히 있었다. 불룩한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은 나를 대신하여, 다른 이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연구원은 바삐 짐을 챙겼고, 가이드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뻐했다.
창문 밖은 여전히 새하얬지만, 안개가 미묘하게 걷힌 듯 얼룩져 보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릴리의 전조등 불빛이며 우아한 몸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릴리는 오직 한 대뿐이었다.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윤희수가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송모래 님 먼저 탑승하세요. 재차의 님께선 스티치까지 마치시고 따로 복귀하실 겁니다.”
그에 당혹감이 더럭 들었다. 말인즉슨 재차의를 여기에 홀로 남겨 두고 나 먼저 도망치라는 소리가 아닌가? 재차의에게 어떤,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만에 하나라도 가이딩이 추가로 필요한 상태에 빠지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그분께 다시 가이딩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물으려 꺼낸 목소리는 릴리가 낸 클랙슨 소리에 묻혀 지워졌다. 윤희수를 비롯한 가이드며 연구원들은 온통 들것 위의 파수꾼을 챙기기 바빴다. 그러면서 그들 모두 나더러 먼저 탑승하라고 지시를 내려 댔다.
“송모래 님, 먼저 타세요.”
“다음 릴리도 곧 올 겁니다.”
어리둥절한 와중에 나는 우선 지시대로 기지 밖으로 나가, 떠밀리듯 릴리의 뒷좌석에 올랐다. 그리고 차량 내부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왔을 때 탔던 릴리와 거의 동일함에도, 이 차에 올라야 할 환자의 수를 생각하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됐다.
나는 머뭇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활짝 열린 뒷좌석 문 너머에 팔짱을 끼고 선 윤희수를 향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다음 릴리를 타겠습니다. 우선 다친 분들부터….”
“안 됩니다.”
돌아온 답은 재빨랐다. 윤희수는 내 말에 제가 더 놀랐다는 듯 회색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괴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은 재차의 님께서 몰아내 주셨지만, 계속해서 임시 기지 쪽으로 모여들고 있어요. 이상한 일이죠. 재차의 님을 보고도 다가오다니….”
“…….”
하긴 괴수들에게도 살고자 하는 본능은 있을 테니까… 재차의 같은 존재를 적으로 맞닥뜨리면 도망치는 게 당연하긴 하지. 나는 그런 파수꾼을 대체 왜 걱정했던 거지?
“이상 현상이 발견된 게이트이니 재차의 님께서 스티치까지 마치셔야만 하는데, 핵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저, 그럼… 저는.”
…더더욱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질문하려는 내 말을 윤희수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가로막았다.
“송모래 님은 S급 가이드십니다.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당신은 구조 대상 1순위입니다. 저희와 섞여 잔류하실 순 없는 몸이죠.”
그리고 릴리의 문이 부드럽게 밀려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