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22)화 (22/76)

22. 

“‘강간’?”

재차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뻔뻔한 얼굴에 내 기분은 다시금 처참해졌다. 내 골반을 부술 것처럼 세게 움켜쥐며 그가 말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못된 짓을 했다고 그래?”

그러면서 그는 내 바지를 찢어발길 기세로 벗겨 냈다. 뜯어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과격한 손짓이었다. 그저 바지를 벗을 뿐인데 허벅다리 살이 다 아팠다.

“내가 널 강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해? 송모래. 혹시 강간의 뜻을 몰라? 서로 좋아서 하는 섹스는 화간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내 팬티까지 움켜쥐기에,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몸을 틀었다. 시트에 엎드리며 그의 얼굴을 외면한 순간에는 그러나, 내겐 후회만이 남았다. 엉덩이를 내놓은 내 꼴을 재차의가 도리어 좋아할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재차의는 내 골반을 더럭 뒤로 당겼다. 볼기가 쑥 뒤로, 위로 끌려가며 허벅다리가 억지로 세워졌다.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노력해 봐도, 내 몸짓은 의미 없는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반항하기에는 체격과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사람 손이 아니라 배를 묶는 쇠사슬에 죄인 기분이었다.

“너, 싫다는 말도 안 했잖아?”

그 말이 꼭, 내 출렁거리는 기운의 욕조 마개를 뽑아내는 듯 느껴졌다. 마음 안에 회오리가 생기고, 대번에 힘이 쭉 빠졌다.

싫다는 말…. 그래, 하지 않았다. 그만두라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놔 달라는 말 한마디조차 행위 내내 꺼내질 않았다. 재차의의 조롱처럼, 그가 날 ‘인어 공주’로 알 만큼 침묵했다. 침묵하며 전부 받아들였다.

‘그런다고 강간이 아닌 게 돼?’

콧잔등을 구기며 나는 숨을 씩씩거렸다.

‘그럼 지난 일이 다, 다… 다 내 잘못이라는 거야?’

일순 치민 성화에 나는 양다리를 힘껏 버둥거렸다. 재차의의 손에 잡힌 골반이 허공에 뜨고 얼굴이 소파 쿠션에 처박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몰골이 우습게 보인대도 상관없었다. 안간힘을 써 반항하고, 반항하고, 또 반항했다. 이전에 못 한 만큼 힘껏, 오래도록 밀린 만큼 최선을 다했다.

일순,

“씁.”

재차의가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이내 엄청난 통증이 내 엉덩이에 밀려들었다. 철썩 소리와 동시에 볼기 양쪽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앞이 빨개지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

갑작스러운 아픔에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입술 새로 미처 못 삼킨 침이 흘렀다. 상체를 푹 고꾸라뜨린 채 나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달군 쇳덩이로 맞은 것 같다. 엉덩이 살이 피가 흐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뜨거웠고, 꼬리뼈는 물론이고 허리까지 온통 아팠다.

“아아….”

코끝이 시큰해져 앓는 건 나인데, 한숨 쉬듯 신음하는 건 재차의였다.

“이런…. 미안해. 살살 친 건데.”

그러더니 그가 내 엉덩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약한 손길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는 얼굴을 소파 시트에 아주 푹 파묻었다.

제 손으로 사람을, 그것도 볼기를 터져라 세게 쳐 놓고, 재차의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얼굴 그러고 있지 마. 뺨에 자국 나겠어.”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작은 빈정거림이 목구멍 위까지 솟구쳤다가, 이내 수그러들었다. 통증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허탈해졌다.

번개처럼 번쩍거리며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들이 많았다. 스물, 스물하나, 스물두 살의 많은 날들이…. 그 모든 기억 안에서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자리에 누워 존재만 할 뿐, 내 의지로는 꿈쩍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팔뚝에는 주삿바늘이 꽂히고 입 안에선 알약이 주는 특유의 갈증이 역겨운 밤, 혹은 낮, 혹은 새벽.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시절은 삼촌의 명줄만큼 짧고도 길었다. 햇수로는 4년인데, 그 4년이 내 평생을 잡아먹었다. 내 부동은 처음에는 저항할 수 없음이 이유였다. 나중에는, 저항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어 포기했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의지를 신경 쓰지 않아 그랬다.

몸의 힘이 쭉 빠지고 우울만이 남은 순간이 기억난다. 성기에 맴도는 역겨운 혈기, 내 샅에 앉아 다리를 벌린 삼촌의 몸부림 같은 움직임, 잡스러운 행위를 합리화하려 부르짖던 사랑한다는 고백, 가축 울음만도 못한 메스꺼운 신음…. 내가 백 번 억울하고, 천 번 슬퍼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걸 익히고 나면, 그저 견디는 것만이 답이 된다.

…그래서 그랬다. 그저 견딘 것이다. 재차의의 말에 따르면 절대 강간이 될 수 없다는 그 행위도, 몇 번이고….

“송모래?”

온 세상이 내 귓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 같다. 뻔한 부름에 대답도 할 수가 없다. 고개를 처박고 숨을 참고, 소리를 참는 게 고작이다. 치가 떨린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완벽히 체감했다.

거봐, 반항해도 안 봐주잖아. 이럴 줄 알았어.

“…….”

입이 얼어붙어 나는 침묵했다. 재차의가 무슨 짓을 하든 손 놓고 견딜 수밖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싫다, 그만둬라, 놔 달라. 그런 말들이 얼마나 무능한지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배웠다. 이제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게 됐다.

“무슨 짓이야.”

그런데 대뜸, 재차의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몸이 뒤로 휙 넘어가며 재차의의 상체에 기대어 붙여졌다. 힘껏 각오한, 뒤를 쑤시고 들어오는 이물감은 없었다. 대신에 깊은 포옹이 내 배를 조였다.

이미 충분히 놀란 와중에도 새로운 사실이 내 뺨을 쳤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입이 크게 벌어진 채 막혀 있었다. 잇새를 채운 건 다름 아닌 내 손목이었다. 언제부터 악물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재차의는 제 무릎 깊숙이 나를 세게, 아주 푹 앉혔다. 그리고 내 팔뚝을 부드럽게 움켜쥐더니, 천천히 잇새에서 떼어 냈다. 어찌나 세게 악물고 있었던지 손목 살점이 동그란 모양 그대로 떨어져 나올 것처럼 빨갛게 부었고, 이는 물론이고 잇몸까지 얼얼했다.

“왜 자해를 하지?”

재차의가 물었다.

…자해라니. 좀 깨문 것 가지고 비약이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송모래. 넌 내 거라니까. 내 걸 함부로 흠집 내지 마.”

그 목소리가 아주 속상한 사람처럼 들렸다.

“앞으로 자해하고 싶으면, 나한테 허락받아.”

…허락을 구하면 알겠다 할 생각인가?

“그럼 손가락 대신 내 좆을 물려 줄게.”

그럼 그렇지….

소리 없이 재차의를 돌아보자, 그는 양손으로 내 뺨을 잡더니 눈가를 문질러 닦아 주었다.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건만 우는 아이 달래 주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섹스는 안 할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못내 안심됐다. 내 무어에 그가 동하고 어떤 행동에 또 가라앉는 건지, 머리를 굴려 고민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당장은 다행이었다. 콧김으로 긴 한숨을 대신하는 내 앞에서, 재차의는 홀로 말을 늘렸다.

“흐음…. 이 머리통을 열어 볼 수도 없고.”

그러면서 두 손바닥으로 내 뺨을 꽉 누르더니, 이내 놔 주었다. 그의 기세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도 조금 전에 비해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벗겨진 팬티며 바지를 눈치껏 빨리 올려 입었다.

주섬주섬 바지 버클을 채우면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지금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냐고 상황을 환기하고, 게이트 파견이 늦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다. 응답이 없다던 선발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고, 다른 파수꾼도 아닌 재차의를 긴급 파견할 정도라면 게이트 내부의 괴수가 보통 강력한 게 아닐 테니 다시금 긴장됐다. 그렇게 속으로 두 번, 세 번 할 말을 곱씹은 뒤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게이트는 아직입니까?”

내 말에 재차의가 창밖을 힐끔 살폈다. 나도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차창 너머의 풍경에는 변함이 없었다.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릴리는 아직도 어두운 터널 안이었다.

나는 심각한데, 재차의는 입술 끝을 올렸다. 아주 이상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아 보여서 내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재차의가 말했다.

“알겠다. 그래서 삐진 거구나?”

그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삐졌다고? 누가 누구한테…?

“송모래. 내가 아무 도로 위에서나 널 따먹으려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랬구나, 서운해서 그랬어?”

“…아니….”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라 가뜩이나 없는 말솜씨가 아주 꺼져 버린 것 같다. 머릿속이 벙쪄 버려 목소리도 잘 나오질 않는다.

재차의의 얄궂은 농담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차창을 다시 바라봤다. 터널을 오가는 다른 차량의 노란 전조등이 휙, 휙, 다시 휙… 릴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뜸, 재차의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차창 가까이 내 얼굴을 가져다 대게 했다. 목덜미 물린 짐승처럼 쑥 끌려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움직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똑바로 살펴본 차창 너머에는 다시금, 휙, 휙… 노란 불빛의 움직임이 빠르고 규칙적이었다.

다만 다른 차량의 실루엣은커녕 그와 비슷한 덩어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잘 봐, 송모래. 여긴 이미 게이트 안이야.”

웃음기 가득한 밝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맴 돌았다.

“우리 둘이 갇힌 지 꽤 됐어.”

그런 끔찍한 말을 왜 그렇게 상큼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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