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형 마트의 텔레비전 코너에서 본 적이 있다. 화면이 U 자로 휘어지는 아주 비싼 텔레비전 속에 초고화질의 재차의와 그의 파트너가 움직이고 있었다. 재차의의 외모가 워낙 압도적인 탓에 당시 파트너의 얼굴까진 생각나지 않는데, 별명이 ‘백구’인 건 분명하게 기억난다. 알비노인지 염색을 한 건지 머리카락이 흰색인 한국인 남자였고… 이름은, 윤도곤이었던가.
“한번 착용하면 다시 뺄 일이 없을 거야.”
어렵사리 낯선 이름을 떠올리는 내게 재차의가 말했다.
“보통 사퇴할 때에나 전용 기계를 써서 빼는데, 넌 평생 내 가이드로 살 테니까.”
“그럼 윤도곤은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고,
“윤도곤?”
재차의가 빠르게 되물었다.
반 박자 늦은 후회가 내 입 안에 담겼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 파트너를 언급할 자격은 내게 없을 터였다. 이제까지 내게 재차의가 보여 준 행동을 보면 필시 그 파트너와도 몸을 섞었을 테고, 아주 오랫동안 합을 맞춘 상대일 텐데 괜히 언급해서 좋을 리가 만무했다. 가뜩이나 재차의는 그, 유명하고 유능력하던 가이드와 그의 대체품으로 끌려온 나를 비교 중일 텐데, 절대로 내게 유리한 상황이 못 되었다.
늦게나마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려 입을 여는데, 재차의의 목소리가 나보다 빨랐다.
“걱정하지 마, 송모래. 너는 실종될 일이 없을 테니까.”
그 상냥한 목소리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차의는… 이중인격자인가?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 궁금해서 시선을 들자, 재차의는 내게 제 얼굴을 아주 가까이, 자세히 보여 주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보기에 좋았다. 미운 마음을 품고도 감히 폄하할 수 없는 미모였다.
아주 낮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입바람을 내며 내 인중을 간질였다.
“어떤 게이트에 가게 되더라도 널 두고 오진 않을 거야.”
그 다정한 말에 가슴 안이 허물어졌다. 빈 주먹 안에 허상으로나마 쥐고 있던 방패를 내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간절히 원할 때조차,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
불현듯 시큰한 고통에 눈이 콱 감겼다. 재차의가 기습적으로 내 귀에 귀걸이를 박아 넣은 것이었다. 단순히 살점에 구멍을 뚫는 수준의 통증이 아니었다. 도구에 집힌 귓불은 물론이고 왼쪽 귀 전체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게 아팠다.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강렬한 공포심으로 달려왔다.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빼내려는데, 재차의가 내 턱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소파 팔걸이에 내 뒤통수가 닿도록 강하게 내리눌렀다.
주르륵 미끄러진 몸이 소파 위에 가로로 넘어졌다. 골이 쪼개질 듯한 아픔에 콧잔등이 다 시큰거렸다. 날 속였구나. 주의를 돌리려고 지어낸 말이었던 거야…. 치미는 배신감에 이를 악무는데, 재차의가 말했다.
“송모래, 잘 들어. 이 귀걸이를 제거하는 날에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울 거야.”
“…….”
“그러니 함부로 빼낼 생각 하지 마. 네 예쁜 귓불에 항상 차고 다녀.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찾을 수 있게. 알겠지?”
머릿속이 온통 너무 아파서 이마가 차갑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턱을 잡힌 탓에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어, 잇새로 흐르는 신음과 함께 대답을 억지로 뱉었다.
“네.”
그제야 왼쪽 귓가에서 틱 소리가 들렸다. 귓불 살을 콱 물었던 도구를 떼어 내는 소리였다. 망할 귀걸이가 준 막대한 고통도 서서히 흐려졌다. 둔한 심장이 뒤늦게 벌렁거렸다. 소파 위에 드러누운 채 호흡을 고르느라 나는 크게 헐떡였다. 재차의는 그런 내 몸 위를 제 상체로 덮다시피 했다.
평생 개미 한 마리 죽여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는 웃었다. 웃는 얼굴로 내 귓불을 구경하기 바빴다.
“채워 놓고 보니 또 잘 어울리네.”
그런 재차의가 문득 둘로 보였다. 하나는 내 몸 위에 실재하는 그였고, 다른 하나는 차창에 비친 그였다. 거울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게 재차의가 비치는 차창 너머는 어느새 새카맸다. 릴리가 터널 안에 진입한 모양이었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나….’
내 귓불을 연신 만지작거리는 재차의가 부담스러워, 나는 차라리 빨리 게이트에 도착하길 바랐다. 그의 엄지에 붙들린 살점에 낯선 이물감이 더해져서, 꾹 누르는 손짓에 귀걸이 고리가 움직이는 느낌이 소름 돋았다.
몇 초간 그의 손길을 참아 내려 노력하다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리고 재차의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쥐고, 멀리 밀어 떨어뜨렸다.
그러자 재차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순히 손을 뒤로 물려 주나 싶던 그는 내가 제 손을 허공에 놓은 게 대단히 이상한 짓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눈썹 근육이라는 게 그렇게 말을 잘 들을 수가 있나 싶게 인상적인 표정이었다.
“왜 날 거부하지?”
재차의의 질문은 나를 크게 황당하게 했다.
“…지금 가이딩은 필요 없으실 텐데요.”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무조건 내 말이 옳은 상황이었고, 앞으로 내가 취해야 할 입장에 매우 걸맞은 태도였다. 재차의에게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다면 나는 그와 스킨십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순수하고 도의에 맞는 ‘업무’니까.
당장 우리는 파견 임무를 마치기는커녕 게이트에 도착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재차의도 공황 상태는커녕 약간의 흥분 상태조차 아니었다. 조금 들뜬 듯 열 오른 기색을 풍기기는 해도, 위력으로 남을 누르길 좋아하는 가학적인 변태인 것과 뉴타입으로서의 흥분 상태는 다른 법이다. 그러니 나와의 스킨십은 불필요하다. 그에게 마땅히, 나를 납득시킬 만한 사유가 있질 않고서야….
“나야 괜찮지. 근데 송모래, 네가 불안하잖아.”
“…뭐라고요?”
“내가 만져 주면 기분 좋아지잖아.”
이내 재차의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와의 악수를 거부하고자 손가락을 펴며 팔을 뒤로 빼내려니, 그는 손깍지를 끼며 내 손을 소파 위에 내리눌렀다. 그와 함께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두통이 걷혔다.
“…….”
나는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재차의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와 손을 잡고 있으니 모든 걱정이 날 떠났다. 파견에 대한 아리송한 불안도 괴수를 맞닥뜨릴 일에 대한 공포도 더는 없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온몸의 근육이 느슨해진다. 조금 전 맛본 배신감조차 어느새 날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이 이상야릇한 안도감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재차의에게서 위안을 얻는 건 내 ‘업무’가 아니다. 내 기분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파트너십은 온전히 재차의만을 위해 맺어졌다. 나는 그에게 무얼 주는 사람이지, 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다짐하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잡혔던 손도 애써 빼내었다.
“그래도 불필요한 접촉입니다.”
“‘불필요’? 서로 좋으면 됐지, 왜 필요를 따져?”
재차의의 질문은 다시금 내 속을 답답하게 했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그 주장의 전제부터 부정했다.
“저는 안 좋습니다.”
그러자 재차의가 ‘하!’ 하고 아주 크게 웃었다. 릴리 내부가 울리고, 내 귓가에 메아리가 돌아올 만큼 엄청나게 큰 비웃음이었다. 측정기를 들이밀고 재 보았더라면 어지간한 호통만 한 데시벨이 나왔을 것이었다.
“송모래. 왜 인정하지 않지? 내가 예뻐해 주고 만져 주는 걸 너도 즐기잖아. 딸을 쳐도 발기 못 하는 물건, 뒷구멍에 박아 줄 때는 줄줄 울던데. 좆 받으면서 좋아 죽는 주제에, 손잡기가 싫다고?”
대뜸 닥쳐온 천박한 말에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두 뺨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고 속에선 약이 올랐다. 폭언에 정신이 혼미해져 대답은커녕 어떤 반응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위장이 뒤집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주… 긴… 침묵 끝에 나는 고개를 돌려 재차의를 외면했다. 그게 이 순간 한없이 비루해진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재차의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덥석 내 턱을 움켜쥐더니 억지로 고개를 돌려 저를 올려다보게 했다.
어느새 재차의의 몸은 내 몸 위에 거의 올라탄 채였다.
“말해 봐. 내 말이 사실이라고. 아주 좋아 죽겠다고 말해. 너는 날 좋아한다고.”
그가 재촉할수록 내 입은 아주 꽉 다물렸다. 그런 말을 나에게서 듣고자 하는 그가 이상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사랑하든지 증오하든지 그까짓 게 재차의에게 왜 중요하지? 도대체 뭘 얻겠다고, 내 기분 따위를 신경 쓰면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그에겐 그럴 필요가 없는데…. 나 외에도 그를 죽도록 좋아하는 추종자는, 내 얼굴에 게이트 추출물을 끼얹도록 지독하게 존재하는데. 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턱이 잡혀 뭉개진 발음으로 내가 말했다.
“당신이 날 강간한 게 없던 일이라도 돼요?”
오기로 똘똘 뭉쳐 뱉어 놓은 대꾸였다. ‘충동’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다면, 이 질문은 최우선 순위에 자리한 채 연거푸 자세를 틀며 손톱을 씹어 대던 난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