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20)화 (20/76)

20. 

그가 아주 귀여운 것과 별개로, 마음 한편으로 아리송하기도 했다. 아무리 뉴타입과 가이드가 하는 일이 다르다고는 해도, 어제 갓 입사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인수인계조차 받은 게 없는 나도 파견을 나가는데…. 신기하고 멋진 능력을 가진 문소여가 왜 파견을 못 나갈까? 그 정도 능력이라면 전투 시에도 도피 시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뭐, 자세한 사정이야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왜 오셨습니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문소여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누가 뒤통수라도 툭 쳤다간 톡 떨어지겠다 싶게 커다란 눈으로, 그가 외쳤다.

“형 긴장할까 봐 걱정돼서요! 응원하려고 왔죠.”

“…….”

응원…? 초등학교 입학식 가는 것도 아니고 뭘 굳이 이렇게까지…. 나는 진짜 초등학교 입학식도 혼자 잘만 다녀왔는데.

“근데 괜찮아 보이네요, 다행이에요. 어제도 느낀 거지만 형은 담력이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

글쎄다. 긴장되고 무서워서 손발이 차가워지다 못해 딱딱해질 지경인데. 겉보기엔 덤덤해 보인다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제가 종종 도와드릴게요. 전 대슈망에서 제일 한가한 파수꾼이거든요…. 혹시 궁금한 거 없어요? 뭐든 물어보세요, 형.”

그 말에 곧바로 떠오른 궁금증이 있기는 했다. 앞으로 대슈망 센터에서 일하자면 가장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호텔방에, 냉장고가 있던데. 음식이랑….”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살펴보기로 내 방 안에는 진녹색 병으로 꽉 찬 전용 와인 보관장과 맥주 냉장고, 위스키 바가 따로 존재했다. 대슈망 가이드들은 다 알코올 중독자라도 되나 궁금할 정도로 술이 많았다.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 마련된 부엌 공간도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고, 양문형 냉장고 안엔 김치를 비롯한 반찬이 가득했다. 냉동실에는 데우기만 하면 완성되는 밀키트가 많았고,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혹시나 하고 열어 본 찬장도 전부 꽉 채워져 있어 보기만 해도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는데, 과자와 초콜릿은 하나같이 비싸 보였고 그나마 친근한 즉석 밥과 라면도 한 달은 거뜬히 먹고 살도록 많았다. 조리대와 전자레인지까지 준비된 걸 보면, 카페테리아나 식당을 이용하지 않아도 방 안에서 혼자 취식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것이었다.

“…그 식비는 따로 내야 합니까? 월급에서 차감되나요?”

그러자 문소여가 큰 소리로 ‘아하하’ 웃었다. 도대체 내 말의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는 제 배를 잡고 눈물이 날 때까지 한참을 웃어 대더니, 거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혀엉! 네네, 그럼요. 당연하죠! 월급에서 다아 차감되는 거죠.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 그런 파수꾼을 지키는 대단한 가이드를 위해서는 옷도 공짜, 방도 공짜인데… 식비만 신기하게도 유료겠죠?”

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하긴, 어떻게 전부 다 무료로 제공할까. 좀 실망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다음으로 궁금하던 게 방세 부분인데, 그건 무료 제공이라니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마친 뒤, 나는 ‘릴리’를 손가락질했다. 여기에 타면 되냐고 눈짓으로 묻자 문소여는 기꺼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다소 멋쩍은 마음으로 나는 얼른 차에 올랐다.

바깥에서 보이는 차체가 높고 긴 만큼이나, 릴리 뒷좌석은 아주 넓고 쾌적해서 거의 방 같았다. 본래 살던 빌라 집보다도 훨씬 좋았다. 좌석은 소파 형태로 기다랬고 차량 내부에 유리문으로 된 음료 냉장고가 들어 있었다. 다른 무얼 살피기 전에 나는 냉장고에 꽉 찬 이온 음료를 노려봤다.

‘이건 마셔도 되는 건가?’

마음 같아선 문소여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코팅된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이라곤 지상층으로 향하는 승강기 계기판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우선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른 가이드며 파수꾼들이 와서 냉장고를 건드리면, 눈치껏 나도 한 병 마셔야겠다.

그런데 뜻밖에, 이 커다란 차에 나와 동행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퉁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커다란 존재감으로 넓은 공간을 꽉 채웠다.

“잘 잤어? 송모래.”

그 상쾌한 얼굴을 마주하자니 문소여가 왜 허둥지둥하며 주차장을 떠났는지 대번에 이해됐다. 재차의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하필 그의 전속 가이드가 아니었더라면 당장 릴리 밖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

대책 없이 도주하는 대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생겼다. 얇은 창 너머의 운전석은 텅 비어 있는데, 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혹감에 좌석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자 창밖의 풍경이 주차장 내부에서 야외로, 밝은 터널과 차도로 변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속도까지 빠르니, 절로 안전벨트를 찾아 꽉 쥐게 됐다.

그렇게 한참간 넋을 놓고 창밖만 쳐다보는데, 문득 시야가 가려졌다. 재차의가 내 얼굴 앞에 대고 손을 휙휙 흔든 것이었다.

“네.”

그저 그렇게 말했다. 자동 주행 시스템에 한눈 팔린 내가 몹시도 못마땅한지, 재차의는 나를 거의 흘겨보다시피 했다. 그러더니 좌석 팔걸이 옆 서랍에 구비된 흰 상자를 꺼냈다.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쓱 끌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길게 뻗었던 다리가 단숨에 직각을 그리도록 접혔다. 그의 검은 바지는 눈에 보이는 질감이 아주 빳빳해서, 구겨진 주름의 수가 적고 굵었다. 까만 무릎이 내 오른쪽 허벅지에 바짝 닿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뭐가 됐든 그가 ‘해야 할 일’을 마치길 기다렸다. 애석하게도, 내가 외면이 특기인 사람이라면 재차의는 무시를 절대로 못 견디는 존재였다. 그는 내 아래턱에 엄지를 대더니 꾹 누르며 위로 밀었다. 불만스러운 손짓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그의 손가락이 이제는 내 입술에 닿았다.

“송모래 입에 딱지가 다 앉았네. 말을 너무 안 해서 그런 거 아냐.”

남의 입술 살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말을 안 한다고 딱지가 앉겠냐, 당신 때문에 화가 나서 씹어 대어 그런 거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재차의는 다시 내 얼굴을 정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양쪽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불안해져 눈치를 살피는데, 재차의가 말했다.

“송모래. 귀는 좀 못나도 괜찮았을 건데, 뭐 여기까지 예쁘게 생겼어?”

나를 조롱하는 헛소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이래서야 어느 쪽에 구멍을 내도 아깝겠는데.”

그제야 재차의의 허벅다리에 놓인 상자가 똑바로 보였다. 납작한 상자 속에 특이하게 각진 집게가 들었는데, 그 용도를 추측하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옆에 까맣고 작은 귀걸이가 함께인 걸 보아 귀를 뚫는 기계인 듯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안후이 부장도 가이드였구나….’

뜬금없이 그녀의 귀에 박힌 까만 귀걸이가 기억났다. 동일한 디자인의 귀걸이를 커플 아이템이라도 되는 양 각각 한 쪽씩만 끼고 있던 대기조 가이드들도 떠올랐다. 그러니 그게 가이드의 상징, 뭐 그런 건가 보다 싶었다.

그렇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조금은 달갑기까지 했다. 어느 조직에 속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무엇을 공유하는 일을 해 본 지, 너무 오래된 나였다. 성냥팔이 소녀가 아니라 괴수 시체 팔이 청년으로 살면서, 용병단 사람들이 저들끼리 하하호호 발맞추는 소리를 골방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들어 오지 않았던가.

차내에 거울은 없었지만, 차창을 통해 어느 정도 얼굴이 비치긴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껍게 말했고, 재차의의 반응은 영 뜻밖이었다.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그는 안광 하나 들지 않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속삭였다.

“송모래, 너는 내 거야. 네 몸에 뚫린 구멍도 다 내 거야.”

“…….”

“새 구멍을 뚫는 일도 내가 할 거야.”

“…….”

대단하신 파수꾼이자 변태다운 선언이었다. 그 진지한 태도에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딱히 기가 눌려서는 아니었다. 나까지 심각해져 말대꾸를 했다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차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그럴 바에야 가만히나 있자 싶어 그랬다.

재차의는 내 턱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왼쪽 귀와 오른쪽 귀를 비교해 댔다. 그러더니 마침내 무얼 결심한 듯, 집게 모양의 도구 안에 까만 귀걸이 고리를 끼워 넣었다. 저 집게 사이에 귓불을 넣고 콱 집어다가 귀를 뚫고, 동시에 귀걸이를 끼우는 모양이었다.

‘간단하네.’

가만히 귀를 내놓고 기다리는 나에게, 재차의는 뜻밖에 친절했다.

“게이트 안에서 가이드가 실종되는 일이 가끔 일어나서 말이야. 전파가 통하지 않는 구역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하는 위치 추적기야. 보기엔 조그맣고 하찮아도 이게 아주 끈질겨. 어지간한 파수꾼이 당겨도 살에서 안 떨어지지.”

신기한 이야기에 고개 끄덕이며, 나는 재차의를 눈에 담았다. 자연스럽게, 게이트에서 실종된 가장 유명한 가이드를 떠올리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