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19)화 (19/76)

19. 

천천히 뒤돌아, 나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차의의 방이구나 확신한 공간이었다. 화려하고, 멋지고,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이 내 방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니 대뜸 모든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날 위해 구비했다는 전제 하나만으로 화려하고 편안하고 좋은 것들이 죄 빛을 잃었다.

다시금 일렬로 쌓인 책 앞으로 가, 나는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백로 어린이 도서관’

버려진 게이트에서 이 도서관을 발견했던 날엔 횡재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낡은 트럭에서 후다닥 뛰어내려 도서관 정문을 밀고 들어가서는, 꽤나 그럴싸한 열람실을 구경하며 ‘오늘 참 운이 좋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배터리가 바닥난 탓에 연신 깜빡거리는 손전등 손잡이를 입에 물고, 두 팔 가득 챙겨 온 책들이었다. 껌껌한 폐건물 바닥에 비스듬히 내리꽂히던 동그란 불빛이 아직 기억난다. 그때는 이 책들이 선물 같고 보물 같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폐지 같다….

낡은 소설책의 커버 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방의 중앙에 서자, 욕실로 통하는 복도에 놓인 전신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둔했다. 내 것이 아닌 흰 셔츠와 흰 바지를 입은 채였다. 깔끔한 순백의 유니폼보다 내 본질에 더 가까운 건 발이었다.

신발도 양말도 신지 않아 빼꼼 드러난 두 발 모두 새끼발톱이 닳아 버려 발톱이 각각 네 개뿐이고, 발가락은 굳은살 덩어리였다. 지난 2년간 275mm 발에 280mm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나면 큰 신발이 좁아지도록 발이 붓기 때문이다.

유독 더럽게 느껴지는 발로 터벅터벅 걸어, 나는 푹신한 침대가 아닌 작은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몸을 모로 눕히고 구겼다.

전과 같이 편안한 잠은 더는 오지 않았다.

***

이튿날, 내 키와 체격에 맞춘 유니폼이 상하의 각각 15벌씩 지급됐다. 구두 세 켤레와 운동화 다섯 켤레도 함께 받았다. 옷장을 온통 하얗게 덮어 놓으면서 직원이 하는 설명에 따르면, 대슈망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가이드의 건강이라 했다. 충동을 조절할 줄 모르는 파수꾼이 가이드를 상처 입히는 일이 더러 있는데, 그때마다 남들이 얼른 알아챌 수 있어야 하기에 피가 잘 보이는 흰옷을 입히고 호텔의 복도 또한 백색이란 말이었다.

친절하게 알려 준 이야기에 나는 도리어 의아해져서, 피가 흐를 정도로 상처가 났으면 가이드가 알아서 신고하면 되는 일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애매한 미소만 흘려 보냈다.

“송모래 님은 꼭 그런 가이드가 되시길 바라요.”

모호한 말을 남겨 놓고 그는 정돈을 마친 내 방을 떠나려 했다. 나는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매칭 테스트를 하느라 제 사복이 다 망가졌습니다. 센터에서 배상해 주세요.”

그러자 직원은 꽉 찬 옷장을 한 번, 뻔뻔한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알겠습니다’ 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떠났다.

옷에 대한 배상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지급됐다. 빳빳한 봉투 안에 든 10만 원 상품권이 열 장이었다. 낡다 못해 닳아 빠진 비루한 사복의 값이라기엔 큰 액수였지만, 나는 최대한 덤덤한 척 그 돈을 챙겼다. 사실, 금액 자체보다는 나를 직접 찾아와 상품권을 건네주는 이가 안후이 부장이라는 게 더 신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방문 목적이 있었다는 듯, 그녀는 상냥한 인사말과 함께 두툼한 파일을 얹은 묵직한 가방을 내게 안겨 줬다.

“송모래 님,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했네요. 대슈망 전속 가이드 입사를 축하해요. 이건 입사 선물이고요, 요건 우리 계약서 사본.”

꾸벅 고개 숙인 인사로 안 부장을 돌려보낸 뒤 들여다본 입사 선물은 비싸 보이는 케이스에 담긴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와 두꺼운 커버의 노트, 만년필, 넥타이와 손수건, 그리고 조그마한 유리병이 매달린 목걸이였다. 두 방울이나 될까 싶은 용액이 담긴 병의 푸른빛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도로 가방을 잠갔다.

이 선물은 되도록 건드리지 말고 고스란히 묵혀 둬야겠다. 나중에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대슈망 입사 선물 패키지’로 내놓으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기대됐다. 당장은 새로 입사한 신입이 나뿐인 듯하니 다음 공채를 기다렸다가 남몰래 팔아야겠다.

그보다도 내 시선을 세게 잡아 끈 건 보라색 철제 파일에 단단히 꿰인 계약서 사본이었다. 오전 내내 그 서류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내가 공들여 확인한 건 연봉에 붙은 0의 개수였다. 열두 달로 나누어 월급을 계산해 보면, 한 달 뒤엔 사채 빚과 이자를 다 갚고, 6개월 뒤엔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돈이었다.

내 지독한 현실을 구제해 줄 비현실적인 연봉을 손끝으로 더듬거리길 한참, 내겐 아리송한 질문만이 남았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하면 되지?’

어제저녁 재차의가 건넨 말로 오늘부터 아주 바쁠 것이라 했는데, 안 부장이 안내하기로는 ‘나흘간은 적응 기간이니 오후까지 휴식하세요’랬다. 둘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갈등되던 차, 시침이 숫자 12에 닿자마자 답이 나왔다.

내 방문을 똑똑 두들기는 노크 소리와 함께, 낯선 직원의 얼굴이 인터폰 화면을 채웠다. 마이크 버튼을 누르며 ‘네’ 대답하자, 그는 인터폰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송모래 님. 긴급 추가 파견입니다. 신규 게이트 탐색을 위해 보내진 선발대가 무응답인 상황입니다. 30분 내로 준비하시고 지하 2층 주차장, 릴리에 탑승하세요. 아, 릴리는 게이트로 진입하는 차량입니다. 보시거든 바로 구분할 수 있을 거예요.”

…재차의 말이 맞았네.

“네. 알겠습니다.”

급한 대로 긍정하며 대화를 마치고 나니, 직원이 말한 ‘준비’가 무언지 모호했다. 다시 마이크 버튼을 눌렀을 때 문 앞의 직원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넓은 방 안을 둘러보며 고민한 끝에, 나는 새로 받은 명찰부터 챙겨 목에 걸었다. S급 가이드라는 민망한 직급 위를 만지작거리며 바라본, 연보라색 명찰은 말끔한 광채로 나를 어색하게 했다. 스튜디오에서 찍었던 프로필 사진…, 아주 잘 나왔다.

다음으로는 옷장에서 유니폼을 찾아 입었다. 하얀 폴라 넥 스웨터에 하얀 청바지, 하얀 운동화를 신고서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그대로 방에서 나서려다가, 내 꼴이 우습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낯선 복장으로 낯선 파견을 가려니 겁쟁이처럼 떨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옷장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직원이 서랍 안에 접어 넣어 둔 항공 점퍼를 꺼내 입었다. 햇수로 7년도 더 된 낡고 해진 옷이지만, 이 시커먼 점퍼만큼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도 없다. 원래는 내가 아닌 형의 옷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형이 부모님께 대입 선물로 받은 명품 점퍼.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이 점퍼를 형 몰래 자주 입곤 했다. 아침 일찍 교복 위에 입고 나서면 밤늦게 형에게 덜미를 잡혀 딱밤을 맞았었다. 그러면서 형은 ‘남의 떡이 괜히 더 좋아 보이는 거다’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틀린 소리였다. 형이 죽어 오롯이 내 것이 된 뒤에 이 옷은 더 귀중해졌으니까.

시커멓고 해진 옷을 갑주 삼아 방에서 나서자마자 나는 문소여의 위대함을 체감했다. 지하 2층으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짧은 루트 안에 마주치는 사람이, 정말이지 너무 많은 탓이었다. 전부 흰 유니폼 차림인 걸로 보아 가이드 같은데,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동작은 살가운 한편 전신을 대놓고 훑어 내리는 눈길에선 뭉근한 호기심과 그보다 큰 경계심이 느껴졌다.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열 번의 인사를 넘겼다.

‘속지 말자.’

친절한 척 웃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절대 경계를 풀지 말아야지. 누가 달려들거든 내가 먼저 코뼈를 부러뜨려 주고 말 것이다. 대슈망의 가이드라는 것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못될 수 있는지를 내 얼굴의 피부가 기억하므로.

긴장으로 어깨를 굳히며 지하 2층에 내려갔다. 그리고 ‘릴리’를 발견했다. 재차의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몰고 온 차와 아주 비슷한 외형인데 특이하게도 차체 자체가 아주 길고 컸다. 디자인이 눈에 띄게 특이한 데다 차체의 재질이 옥상에서 보았던 헬기와 동일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릴리에 올라야 하는지 혹은 아마도 곧이어 모여들 팀원들을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되던 차, 등 뒤에서 승강기 문이 땡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친근한 얼굴이 보였다.

“형.”

과하게 거리감 없는 호칭을 쓰며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그는 문소여였다.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재차의를 포함한 낯선 이들과 파견을 나서려니 아는 것도 없고 어디서 어떻게,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몰라 두렵던 차였다.

“문소여 님도 같이 가십니까?”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문소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하얀 어금니까지 다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요, 형. 그냥 ‘소여야’ 하셔도 돼요.”

“…….”

“근데 이걸 어쩌죠, 나는 같이 가려고 내려온 게 아닌데.”

그 말에는 내심 ‘아’ 하고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재차의가 문소여에게 뱉은 악담이 있었다. 파견도 못 가는 주제에 파수꾼이라 할 수 있냐 그랬던가? 하도 못된 말을 심하게 뱉어 대기에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그저 욕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쩌면 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나 보다. 그렇게 알고 보니 문소여가 꼭, 아직 수영을 못 배운 새끼 수달 같았다. 두 손을 배 앞에 공손히 모아 쥐고, 방긋방긋 웃는 상인 입매를 꾹 다물고 선 모습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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