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창문 밖으로 대슈망 센터 본관 건물이 보였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저 건물의 옥상에서 재차의를 맞이했었는데, 내가 누운 자리는 어느새 그와는 멀찍한 건물의 침실이었다. 본관 건물의 각도를 보아 호텔 안인 듯했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졸음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지금 눈을 감고 다시 잠들면 아주 기분이 좋을 것을 알아서 그랬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면이었다. 피로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머릿속을 꽉 채운 매연 같은 고민도 하나둘 지워지는, 아주 멋진 휴식….
그렇게 한참을 푹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에 스미는 볕의 양과 색이 달라졌다. 창문 밖의 하늘은 푸르렀다가, 하얗게 번졌다가, 주홍빛이 됐다.
평화로운 안식은 밤이 되자마자 멀리 떠났다. 대신에 뜨거운 불씨가 내 얼굴에 확 번졌다.
“으, 윽….”
녹색 불꽃이 사납게 튀는 악몽을 짧게 꿨다. 불 뿜는 괴수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내 얼굴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와그작’ 소리가 들리고 고통이 내 안면에 들러붙어 평생 가시지 않게 됐다. 아, 너무 뜨거우면 오히려 차갑구나….
“허억…!”
그리고 파드득 사지를 떨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경련하는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내 얼굴이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도록 비현실적이던 상처는 이제 없다. 이마부터 코, 광대뼈, 턱을 덮은 피부는 온통 매끈매끈하고 부드럽다.
그렇게 한참을 확인해도 안심이 되질 않아, 나는 거울을 찾았다. 마침 협탁 위에 탁상형 거울이 있기에 집어 들고, 창문 밖에서 스며들어 오는 달빛에 기대어 얼굴을 비췄다. 그러자 본연의 피부색을 되찾은 내 얼굴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
거울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너른 침대 위,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헤드보드 위에 팔뚝을 받치고 허리를 반쯤 튼 채 진작부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전등이 모두 꺼져 있어 형태만 그림자로 보일 따름인데, 날렵하면서 우아한 콧대만 봐도 그 정체는 뻔했다. 재차의였다.
‘왜, 내 옆에….’
그렇게 물으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살면서 봐 온 중 가장 큰 사이즈의 침대, 고급스러운 협탁,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높다란 샹들리에, 천장에 새겨진 묘한 무늬들과 바닥의 러그, 또 저 멀리 놓인 소파 자리에 이르기까지… 이 방은 애초에 내 방이 아니다. 방이라고 부르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넓어, 고급 아파트 혹은 저택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공간은 나보다야 재차의에게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재차의가 제 방으로 잠든 나를 데려왔나 보다 싶었다.
아직 나에게는 재차의를 어떻게 상대할지 세워 둔 계획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질 생각은 없었는데….
어둠 안에서 재차의가 휙 손을 움직였다. 작은 리모컨을 찾아 쥐더니 그는 엄지로 딸깍 소리를 냈다. 그러자 샹들리에를 비롯한 모든 전등이 동시에 빛을 밝혔다.
“악몽이라도 꿨어? 자면서도 무서워하던데.”
재차의가 말했다. 나는 환한 빛에 시큰거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급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고개 숙였다. 재차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랬다. 그러잖아도 눈에 담기 버거운 외모를 가진 그인데, 나로서는 증오해야 좋을지 고마워해야 좋을지 내 입장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은 상태니까. 한 침대에서 얼굴 마주 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재차의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실이 거의 없는 나지만, 그가 내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으음’ 하는 탐탁잖은 침음성이 그러했고, 굵은 목구멍 깊숙이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송모래는 말수가 적은데… 게다가 거짓말까지 하네.”
나는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리고 화두가 옮겨 가기만을 기다렸다.
뜻밖에, 침묵은 아주 길게 이어졌다. 자진해서 낮춘 시야 안에 재차의의 한 손만이 보였다. 구겨진 시트 위에 툭 놓인 그의 손이 툭, 툭, 리모컨의 옆구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여태 나는 우아하다는 것들은 모두 작고 마르고 정교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늘에서야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재차의의 손은 크고 두툼하고 투박했다. 그런데도 우아했다.
“…….”
“…….”
다시 이어진 침묵이 내 가슴을 조여 왔다. 침묵 자체는 싫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고요함을 즐기는 나였다. 문제는 이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차의와 대면하는 시간도 길어진다는 데에 있었다.
어디 누가 먼저 말을 하는지 두고 보자는 듯한 그의 태도를 못 이겨,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재차의 님.”
소리 내어 부르자,
“응?”
기꺼운 응답이 돌아왔다.
사실 재차의에게 묻고픈 말이 있기는 했다. 솔직히 아주 많았다. 그가 선뜻 사실대로 대답해 줄지 모르기에 민망스러울 뿐이지.
“재차의 님은, 정신계 능력자십니까?”
“맞아.”
“…….”
내 짐작을 엎어 치기라도 하는 듯, 뚝딱 나온 대답이 손쉬웠다. 그러나 그 속뜻은 그러질 못했다.
마른 잇새를 혀로 축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신계…. 정신계 능력자라니. 그런 뉴타입이 존재할 수 있나? 내 상식에 기대어 답을 찾자면 ‘아니요’다.
모든 뉴타입은 자신만의 능력을 지니게 마련이었다. 사소하게는 물컵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지진이 일 정도로 큰 진동을 만들어 낼 줄을 알았다. 후자의 경우 지구 물리학적 재난 코드를 부여받았다.
능력이 빼어나 파수꾼으로 활동하는 뉴타입은 모두 재난 코드를 지녔다. 이 코드는 20년 전, 기존의 자연 재난 등급을 본떠 만들어졌다. 지진을 일으키면 지구 물리학적, 공기를 얼려 얼음을 만들어 내면 기상학적, 해충과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면 생물학적으로 나누는 식이었다. 딱 하나, 해당 지표에 포함되지 않는 번외의 능력이 있었다. 사람을 조종하고 움직이는 힘. 다른 말로 정신계였다.
대슈망에서 재차의의 정신계 능력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은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절대적인 입지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를 모두가 의심하기 시작할 텐데, 신뢰를 잃는 순간엔 아무리 잘난 뉴타입일지라도 파수꾼이 아닌 침입자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고등학생 시절 과학 잡지에서 본 일화도 그와 비슷했다. 십여 년 전, 생물학적 재난 코드를 부여받은 파수꾼이자 생물학 박사, ‘노달’이 암세포에 대항하는 백신을 개발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암세포만을 공격하던 항원이 종국에는 ‘암세포로 변이할 가능성이 있는’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며 더 큰 바이러스로 자라난 것이었다. 언론이며 학계에서는 이 실패를 바이러스만큼이나 공격적으로 다뤘다. 그녀를 두고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려 했다’, ‘사기꾼이자 테러리스트다’ 화를 내며 떠들어 댔다. 그 말들이 진실성 있는 고발인지 혹은 오명인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결국 당사자가 편지 한 통 남기지 않고 실종되는 것으로 증명도 해명도 없이 끝나 버렸다.
‘이런 비밀을 나한테 알려 줘도 되는 건가…? 내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런 생각이 더럭 들었다가, 어차피 그럴 마음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결론으로 가라앉았다.
심각해진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재차의는 딴소리로 나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텔레파시 같은 건 안 통하니까. 네가 입 꼭 다물고 속으로 무슨 생각 중인지 훔쳐 듣는 일 같은 건 못 해. 참 아쉽게 됐지.”
‘아, 네. 그러시군요….’
내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재차의가 정신계 능력자라는데, 내가 왈가왈부하며 이러네 저러네 따지는 게 더 웃기는 일이었다. 그저 그렇구나 하며 헬기장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릴 따름이었다.
‘마음은 못 읽어도 행동은 조종할 수 있다니, 굉장히 실용적인 능력이네.’
홀로 고개만 끄덕거리는 나에게로, 재차의는 제 그림자를 더욱 크게 드리웠다. 그리고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붙였다.
“송모래?”
“…….”
비인간적인 인상과 달리 재차의의 이마는 따듯했다. 푹 잠들었다가 깬 나보다 더 따듯해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열이 나나 싶을 정도였다.
그의 속삭임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오늘 다쳤던 기억, 전부 없애 줄까?”
“…예?”
“CCTV 돌려 봤어. 대기조 가이드 하나가 널 공격했잖아. 게이트 추출물을 빼돌렸더군.”
왠지 귀가 달아올랐다. 내가 잘못한 일은 없음에도…. 대번에 급습해 오던 정체 모를 녹색 가루가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그 빛깔이며 사납게 타닥타닥 살을 태우며 내는 소리, 녹아내린 단백질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 그것이 안겨 준 끔찍하던 고통까지도. 전부 생생했다.
아픔이야 익숙하다. 다치고 구르고 망가지는 일이라면 자주 해 봤다. 어지간한 고통은 금세 잊혔다. 그런데 오늘 겪은 그 통증은 어지간한 수준을 떠나 끔찍하고 처참해서, 내 뇌리에 아주 세게 자리 잡았다. 못처럼 아주 콱 박혀서는 떠나질 않았다. 지금도 그 고통을 생각하니 오금이 꽁꽁 얼기라도 한 듯 저릿저릿했다. 또 한 번 그런 일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송모래, 대단하던데?”
웃음기 섞인 그의 말에 내 생각이 뚝 끊겼다. 재차의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하며,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손길로 내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성질부리면서 복수도 할 줄 알고. 깜찍하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