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13)화 (13/76)

13. 

긴 잡념은 지루한 사진 촬영을 견디는 데에 도움이 됐다. 아무런 변화도 표정도 없어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피사체를, 사진사는 백 장 가까이 찍어 댔다. 긴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낸 뒤에는 그와 문소여 모두 모니터 앞에 달라붙어 A컷이니 B컷이니 하는 것들을 분류하는 데에 열중했다.

나는 배가 고팠다.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나서 억지로 복근에 힘을 주고 위장을 조여야 할 정도였다. 슬슬 밖으로 나가서 조금 전 구경했던 카페테리아 음식을 맛보고 싶은데, 문소여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해 볼까? 뭐라고 해야 하지. 배고프냐고 물어보면 되나? 아니면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각자 볼일을 보는 건가? 아니지. 재차의 말처럼 문소여랑 계속 붙어 다녀야 하나?’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분위기라는 걸 읽겠지만 내겐 그런 눈치가 없다. 참 애석한 일이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고 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애써 헛기침 소리를 한번 내 보았다. 그러나 잠깐 사이 사진사와 엄청나게 친해져 버려 그의 어깨동무까지 하고 선 문소여의 시선을 끌긴 역부족이었다.

“아, 이거! 이 사진이 제일 좋은 거 같아요. 눈빛이 멋있잖아요.”

신난 듯 의견을 펼치며 문소여는 웃는 낯이었다. 사진사도 그의 말에 고개 끄덕이며 마우스를 바삐 움직여 댔다.

“어디 공개할 날이 기대되네요. 히야…. 오랜만에 걸출한 인물이 들어왔어.”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선 채 나는 스튜디오를 구경했다. 그러잖아도 종일 화려하고 멋지고 비싼 것들만 눈에 담았는데, 조명 아래에 놓인 여러 가지 세트장은 더더욱 멋져 보였다.

여태껏 알아 온 것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모습일 수 있었으면서, 세상은 나에게만 어째서 그렇게나 박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종일 아무도 못 만났는데, 뭐.’

거의 두 시간이 지나도록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라곤 없었다. 별관도 본관도, 이곳 호텔 건물의 로비에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그러니 문소여의 주장처럼 그가 나를 지켜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스튜디오 밖으로 선뜻 나섰다. 그게 실수였음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로비 중앙의 커다란 호랑이 조각상을 생각한 내 시야는 순 녹색이었다. 무언가 내게로 쏟아지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몸을 비켰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더럭 쏟아부은 가루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고통은 처음엔 차가움으로 닥쳐왔다. 예리하게 깎은 드라이아이스로 살갗을 쑤시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느낀 감각은 피부가 녹는 공포였다. 그리고, 청록색 불꽃.

얼굴이 타고 있다.

“…….”

고통으로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당한 공격에 정신이 아득했다. 지옥에 뚝 떨어진 심정이었다. 팔뚝에 털이 서고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크게 휘청거리며 나는 복도 벽면에 크게 부딪쳤다. 안면 위를 뛰어다니던 녹색 잔불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번뜩 눈을 떴다. 고통을 무시하며 억지로 앞을 봤다. 그러자 아지랑이 사이로 나를 공격한 작자가 보였다. 죄지은 사람 특유의 지레 겁먹은 눈빛을 달고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가 범인이 틀림없었다. 뜻밖에 호텔 로비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오가는 이들이 나를 대신해서 비명을 내지르고, 경호원을 불러 댔다.

나는 침묵했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다만 달아나려는 작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악!”

흐린 시야가 주는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며, 나는 그를 체중으로 눌러 제압했다. 헐떡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나뒹구는 검은 주머니가 보였다. 활짝 열린 입구 밖으로 흘러나온 연두색 분말 같은 것이 수상쩍은 소리를 내며 타닥, 타닥… 바닥을 태우고 있었다.

내 얼굴에 붙은 열기의 원인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저…걸 나한테, 부었구나. 진짜로 내 얼굴이 타고 있구나….

현기증이 훅 끼쳤다. 고개가 뒤로 꺾이는가 싶더니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기절하지 않으려 정신을 붙드는 게 고작인 내 앞에서, 범인은 기회를 틈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선 채로 머뭇거렸다. 그러곤 뭘 다짐하기라도 한 듯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구태여 올려다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비웃음 섞인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사기꾼. 너처럼 급 낮은 가이드가 재차의 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진 몰라도, 그 잘난 얼굴이 없어졌으니 대기조에도 들기 힘들 거다.”

들려오는 말들이 순 어리둥절했다. 헉 소리를 내며 놀라는 구경꾼의 숨소리도 그랬고, 소리를 크게 지르며 달려오는 문소여의 비명도 그랬지만, 나를 사기꾼이라 지칭하는 말은 더욱 그랬다.

솔직히 억울하다. 난 한 번도 내 자격을 올려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내겐 이곳의 모든 게 과분해서, 피부 밖의 것들이 온통 낯설어서 무섭던 차였다.

“송모래. 너 같은 족속들 아주 뻔해. 몸이나 팔아서 등급 올리려는 질 떨어지는 고깃덩어리지.”

와, 진짜 미치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에게 달려들고 싶은데, 시선이 자꾸만 휙휙 돌고 정신이 깜빡깜빡했다.

“그러게, 누가 얼굴만 믿고 까불래?”

…누가 얼굴만 믿고 까불었다는 거야?

복도에 뒷머리를 기대고 가까스로 숨만 고르는 내 앞에, 그는 자진하여 다가왔다. 망가진 얼굴이며 비루한 몰골을 자세히 구경하고 비웃기 위해 자세를 낮추기까지 했다. 그 멍청한 오만함이 내겐 기회였다.

두 팔 뻗어, 나는 그의 머리통을 힘껏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두피까지 뜯을 기세로 온 힘을 다하자 연두색 불똥이 눈앞에서 튀어 댔다.

당황한 듯, 그는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뒤로 빼내려 했다. 그러나 잘되진 않았다. 내 몸이 그를 따라 흔들거려도 나는 잡은 머리채며 구겨 쥔 귀를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당기고 또 당겼다.

그는 욕설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내 어깨며 팔을 때리고 긁어 댔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내 이마가 닿을 때까지, 산 채로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지옥 불을 얹은 것처럼 아픈 코에 그의 콧대가 뭉개질 때까지, 녹아내려 이가 드러나진 않았을까 걱정스럽도록 피 흐르는 입술에 그의 입술이며 턱, 뺨이 무분별하게 맞닿을 때까지.

그리고 두 손을 놓았다.

“아아악!”

나로부터 튕겨지다시피 뒤로 나가떨어지며, 그는 제 얼굴을 붙잡아 쥐고 나뒹굴었다. 생명력을 지닌 듯 파다닥파다닥 튀는 녹색 불꽃은 이제 그의 얼굴에 자리했다. 어억, 어어억… 엉엉 우는 그와 같은 고통을 겪으며 나는 웃었다.

그럴싸한 웃음소리 따윈 없었다. 잇새로 픽픽 새는 숨소리만 빠져나갈 따름이었다.

미친놈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모자라게 웃고 있자니 문소여가 보였다. 날 선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온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제 두 뺨을 적셨다. 엉엉 울며 무어라 말하는 소리보다도, 나는 문소여의 능력이 신기했다. 그가 내 옆에 서자마자 로비를 가득 채운, 불안할 정도로 많던 구경꾼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고 누구의 웅성거림도 들리지 않게 됐다.

‘되게 좋은 능력이네. 나한테도 그런 멋진 게 필요한데….’

그리고 나는 기절했다.

***

인생이란 게 참 못났다. 누가 만든 물건인지 몰라도, 내 삶에는 재정비가 필요하다. 지나온 순간들을 조각조각 뜯어다가 제 위치에 옮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가능한 바람을 쓸모없이 품을 만큼 나는 허탈했다.

고요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땐 지난 오전이 꿈 같았다. 아지랑이처럼 눈을 가리던 녹색 불똥이 사라졌고, 뇌까지 녹일 듯하던 끔찍한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악몽을 꿨던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안도 어린 착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눈에 들어오는 방의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우뚝 선 링거대와 침대 주위로 사각형을 그리는 아이보리색 커튼, 콧구멍이 절로 건조해지는 소독약 냄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이곳이 병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슈망 센터 별관 B 동의 의무실이었다. 문소여의 안내를 받아 처음 둘러본 게 바로 조금 전 일인데, 곧바로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참 희한한 우연이다.

뻐근한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자 문소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며 뒤돌아 앉은 채였는데, 고개는 곧 떨어질 것처럼 푹 숙였고 연신 한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을 움직거리는 듯 팔꿈치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얼떨떨한 정신에 나는 팔뚝에 꽂힌 링거 주삿바늘부터 확인했다.

‘…….’

머릿속이 핑 돌고 속이 역겨운 기분이 들어, 얼른 카테터를 움켜쥐고 쑥 빼내어 바닥에 던졌다. 주삿바늘이 떨어지는 소음에 문소여가 홱 뒤를 돌아봤다.

아무 감각이 느껴지질 않는 입을 열어, 내가 말했다.

“저….”

“송모래 님! 일어나셨군요.”

큰 소리로 내 음성을 잡아먹으면서 문소여는 바퀴 달린 의자를 도르륵 끌어 가까이 다가왔다. 두 손에는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이 들렸고 커다랗던 두 눈은 퉁퉁 부어 가늘어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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