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는 도대체 이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강간이고 폭력이라고, 되도록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행위를 모두 마친 재차의가 내 몸을 끌어안고 붙드는 게, 큰 손으로 내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또 토닥토닥 두드리는 게, 서로의 땀과 체액이 섞이도록 피부를 문지르며 나는 뒤가, 그는 앞이 빨개지도록 비벼 대는 게….
‘좋… 아.’
좋았다.
이 감정에 붙일 이름이 영 모호했다. 훔친 책에서 읽은 단어들을 전부 솎아 보아도 모르겠다. 그나마 어울리는 이름을 찾자면 그건 결연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결연. 소속…감. 동질감. 애정….
‘파트너?’
“아!”
화들짝 정신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두 팔을 허우적허우적 움직였다. 힘이 빠진 손으로 그를 밀어 내려 노력했으나, 내 팔은 허공에서 겉돌기만 했다.
그래서 부탁했다.
“이… 이제 놔, 놔주세요….”
내 평생, 이렇게나 한심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어영부영, 쉰 소리에 삑사리를 섞어 삐져 나갔다. 작금의 상황에 순전히 압도당한 탓이었다.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재차의를 받아들였다는 게, 멍하니 그의 품에 안겨 시간을 보냈다는 게, 도저히 재차의가 사람 같지 않고 그의 곁에 붙은 내가 나 같지가 않아서, 1초도 더 참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무섭다.
“어?”
벌벌 떠는 나를 내려다보며 재차의는 목소리를 크게 냈다. 황망히 올려다본 그의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환하게 번졌다. 아주 기쁜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웃으며, 그가 말했다.
“너, 말을 할 줄 알잖아? 하도 조용해서 인어 공주인 줄 알았어.”
조롱처럼 늘어놓는 농담이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겁이 났다. 나는 공포감에 질려 애원하는데, 그런 내 목소리를 들은 일로 기뻐하는 그는 말이 통할 상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크고 높은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벽이 내게로 무너지려 한다.
“더 말해 봐. 응?”
내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그가 독촉했다.
어지럽다. 머릿속이 핑 돌았다. 억지로 입을 열어도 나오는 말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익혀 온 무기력감이 내 혀를 굳혀 놓았다. 오래도록 헤엄치다 결국 지친 사람처럼 팔을 축 늘어뜨릴 따름이었다.
그런 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고서 재차의는 웃었다. 그저 해말갛게, 아름답게 웃었다.
“테스트 결과를 볼 필요도 없겠어. 송모래. 오늘부터 너는 내 거야.”
그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뭣 모르는 E급 가이드인 나조차도 그를 내, 파트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편안해서 더 무서운 결연을 뭐라 설명할까….
재차의가 원망스럽냐면 그렇진 않았다. 그를 향해서는 어떤 감정도 감히 생기지를 못했다. 내 불평은 다만 재차의를 제외한 모든 대슈망 직원에게로 향했다.
진작 내게 귀띔이라도 해 주지, 좀 조심하라고. 재차의는 또라이 새끼라고….
***
눈앞의 반은 하얗고 나머지 반은 그보다 훨씬 더 밝다. 힘껏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한 빛이 빨갛게 번져 들어왔다. 나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마저 파묻었다. 상체를 엎드리는 작은 동작만으로도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아, 뭐가 이렇게 밝아….’
무딘 생각이 줄을 이었다.
‘지금 몇 시지…. 아침 같은데….’
그럼 앞으로 네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다.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서야 한다. 오늘은 바쁜 날이다. 어제 게이트 청소를 완전히 마무리 지었으니까, 사무소에 들러서 작업 잔금을 받아야 한다. 그 돈으론 사채업자 형님들을 달래야 한다. 우선 이거라도 받으시라고, 이번 달 이자라고…. 아, 그러고 나면 진한 용병 대장을 찾아가야지. 날 보면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이든 변명이든 해야만 한다. 한건이 겪은 사고로 다들 슬퍼할 테고, 재차의 때문에 놀랐을 테니까.
‘…재차의?’
번뜩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한 세계 아래로 뚝 떨어진 듯한 강렬한 충격이 잠을 깨웠다. 내가 누워 있던 자리는 302호의 곰팡이 핀 매트리스 위가 아니었고, 눈앞으로 끼친 햇볕 또한 쓰레기촌의 어두침침한 기운 없이 해맑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살핀 방 안은 아주 깨끗하고 쾌적했다. 바닥엔 부드러운 격자무늬 러그가 깔렸고 벽 하나를 통째로 뚫어 놓은 창문은 오싹하도록 투명하고, 책상과 텔레비전, 공기 청정기는 모두 새것이었다. 대슈망 별관의 게스트 룸이다.
나는 얼른 협탁 위로 팔을 뻗었다. 보라색 목걸이 끈에 매달린 방문자 자격증을 확인했다. 게스트 룸 전용 카드 키 뒤에는 임시 신분증이 끼워져 있었다. 꺼내어 보니 상단에는 ‘단기 방문자 자격증’, 하단으로 ‘송모래’ 세 글자가 선명했다.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단 증거다.
그 밖에도 현실 감각을 깨우는 불청객은 많았다. 당장 내 몸에서 물씬 풍기는 남의 살냄새, 향수 냄새, 밤 냄새…. 그리고 아랫배를 안에서 두들기는 듯한 묘한 복통, 뒷머리 거죽부터 징징 울리는 두통, 어깨며 팔뚝이 빠질 듯한 얼얼함에 이르기까지.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잘근잘근 뜯어 먹히고 나온 것 같다.
몸살 기운을 쏙 빼닮은 아픔은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육신보다는 정신이었다. 재차의가 그… 빌어먹게 커다란 물건으로 들쑤신 게 내 뒤가 아닌 뇌인 것만 같다. 그런 일을 겪고도 잠시 술에 취했을 뿐이었던 것 같고, 이 상황의 모든 게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또 뭐든 다 편안했다.
생소하도록 오랜만에 아침 햇볕을 쬐면서, 침대 한편에 발을 내리고 앉아 생각했다. 이 괴상한 기분은 도대체 뭘까? 그저 좋기만 해서는 안 되는데, 내 기분이, 그저 좋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 허벅다리를 주먹으로 퍽 소리 나게 쳤다. 한 대 힘껏 갈기고 나니 몽롱한 기운이 싹 가셨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지, 어제 본 안후이 인사부장이라도 찾아가 물어야겠다. 그러자면 우선 씻어야겠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지난 새벽엔 무슨 정신으로 바지를 추슬렀었나 모르겠다. 젤인지 정액인지 모를 액체가 딱지처럼 달라붙은 바지를 벗어 내리고 나니 바로 성기가 드러났다.
…팬티가 없다.
절로 눈살이 구겨졌다. 허둥지둥하느라 그 빌어먹을 방에 팬티를 벗어 놓고 왔다는 게, 어째선지 어제 당한 일 자체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겨졌다.
빨개진 몸을 식히느라 게스트 룸에 달린 욕실로 얼른 들어갔다. 샤워 부스에 놓인 보디 워시 한 통을 다 비우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빡빡 문질러 씻었다. 특히나 사타구니는 아예 샤워기를 대고 저릿저릿할 때까지 닦았다. 샤워하는 와중에도 엉덩이 골 새에 굳었던 정액이 녹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씻고, 또다시 씻어야만 했다.
그래도 허벅지 살을 타고 뿌연 액체가 흘러나왔다.
“…….”
배 아파.
아랫배를 꽉 쥐고서 샤워 부스에 이마를 기댔다. 평생 처음 겪어 보는 복통이 뭉근했다. 그렇게 한참 간 물을 맞으며 호흡을 정리했다. 밀려드는 자괴감을 추스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담배 생각이 났다. 머리칼을 말릴 새도 없이 욕실 밖으로 나와, 벗어 둔 옷더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담뱃갑은 점퍼 주머니에서 나왔다. 구강암 환자의 입술 사진이 인쇄된 모습이 구깃구깃했다. 한참을 아끼고 아껴 온 돗대를 꺼내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열흘 만에 가진 확신이 있어 그랬다. 그 어떤 날보다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좆같고 힘들다는 확신.
“하아….”
알몸으로 우두커니 서 돗대를 다 태우고 나자 기운이 돌아왔다. 입술에 묻은 담배 냄새를 할짝거리며 입을 만한 옷을 찾아 헤맸다. 방문 바로 옆의 캐비닛을 열자 마침 흰 셔츠와 바지 세트가 걸려 있었다. 비닐 포장된 속옷과 양말도 전부 백색이었다. 이것들은 나 입으라고 준비된 옷이겠지. 여긴 게스트 룸이고, 어찌 됐든 나는 방문자 자격증을 가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흰옷들로 알몸을 포장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퍽 낯설었다. 하얀 옷을 입어 그런지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손바닥으로 두 뺨을 두들기다가, 셔츠 가슴팍에 박힌 자수를 발견했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역삼각형 하나가 엉킨 모양새의 자수는 다름 아닌 대슈망 로고였다. 어제 오는 길에 터널에서도 보았고, 안후이 부장의 명함에서도 보았다. 별것도 아닌 주제에 가슴팍에 붙이고 다니자니 머쓱하다 못해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지만, 넝마가 다 된 내 옷을 입는 것보단 낫다.
‘검사 결과가 어떻든 간에 옷값은 배상받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노려봤다. 젖은 머리칼이며 파리한 볼, 푹 꺼진 눈빛이 꼭 물에 빠져 죽은 귀신 같다.
뜯어먹고 살 거라곤 상판뿐인 인생이었다. 낯짝 잘생기고 허우대 멀쩡한 덕에 못 구할 일도 구했고 외상도 더러 받아 냈다. 사채업자들도 그 점 하난 인정했다. 꼴에 사금융 사장님이라는 작자를 형님이라 부르면서, ‘한 달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빌린 돈도 아니잖아요’ 하고 부탁하던 겨울에, 그도 내 얼굴을 뜯어보곤 인정했다. 두고두고 살려 두는 게 돈이 될 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