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리고,
“재차의 님!”
차가운 회색 문이 재차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 귓가에 맴돌던 메아리가 싹 가시도록 큰 소리였다. 그런데도 재차의는 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뒤를 돌아보질 않았다. 뛰어 들어온 이를 살피는 건 내 몫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새에, 목에는 명찰을 건 여자가 나를 한 번, 재차의의 등을 또 한 번 쳐다봤다. 그러더니 조바심이 난 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재차의의 옆에 섰다. 발뒤꿈치를 올리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서, 그녀는 재차의에게 무어라 귓속말했다. 그러더니 둘 다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야?’
당혹감에 눈 굴리기도 잠시, 여자 직원이 다시금 회색 문을 열었다. 나와 시선을 빤히 맞추면서 그녀는 책자 하나를 철제 책상 위에 올리더니, 내게로 주르륵 밀어 보냈다.
“이거라도 보면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송모래 씨.”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뭐라 질문할 새도 없이 직원이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다닥 문짝 앞으로 가,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문고리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밖에서 잠긴 모양이었다.
그제야 찬물을 맞은 듯 현실 감각이 날을 세웠다. 고개를 돌려 살펴본 방은 4평 남짓한데, 속을 채운 가구가 적고 천장도 바닥도 벽지도 하얀색이라 허전하게 느껴졌다. 방 중앙에는 회색 철제 책상이 하나, 양방향으로 놓인 철제 의자가 두 개 있었고, 한쪽 벽면은 거울로 채워져 책걸상이 한 세트 더 놓인 듯한 착시 효과를 냈다.
이 방의 용도는 분명했다.
‘신문실이잖아.’
눈살을 구기며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진짜’ 대슈망에서 나를 잡아 올 이유가 있나? 게이트에서 주운 가짜 지폐를 쓴 게 그만한 잘못인가? 답은 ‘아니요’다. 만에 하나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살인이 질 나쁜 연쇄 살인이라 할지라도 대슈망이 움직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차의가 직접 출동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문득 창문이 생각났다. 사람을 던져 넣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 5층 창문, 그 창문을 등지고 선 재차의가 뱉은 말이 있었다.
‘이제 새 파트너를 맞을 차례네?’
맨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책상 자리에 앉았다. 거울을 노려보아도 보이는 건 내 모습뿐이고, 고민을 해 보아도 낼 수 있는 답이 없었다. 대신에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소매며 멱살이 구깃구깃해진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두 발을 한데 모았다. 그제야 바지 버클이 풀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젠장….’
지퍼와 버클을 얼른 추스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건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잊어버리거나, 그럴 수 없다면 잊어버린 척을 해야 했다. 그러자면 눈 돌릴 데가 필요한데, 볼 것이라곤 직원이 두고 간 책자뿐이었다.
검지로 코끝을 훔치며 책자를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대슈망 센터의 건물 외관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온통 대슈망에 대한 홍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유명한 이야기라 구태여 새로 익힐 것도 없었지만, 생각을 지우기 위해 무감각하게 읽어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첫 번째 게이트 발견. …이후 초인간적인 힘을 얻게 된 신인류를 뉴타입이라 명명, A-급 이상의 뉴타입은 게이트 붕괴와 괴수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활동한다. 어쩌고저쩌고…, 이건 유치원생도 아는 이야기고.’
지루한 현대사가 실린 낱장을 휙휙 넘겼다. 그러자 대슈망 유니폼을 입은 재차의의 사진이 나왔다. 오른편에는 ‘재차의’ 세 글자와 그 이름의 유래까지 실려 있었다.
하기야 재차의를 빼놓고서 어떻게 대슈망을 설명하겠는가. 대슈망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자긍심인 그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파수꾼이자, 대슈망 전체를 아우르는 마스코트요, 세계 평화의 아이콘…. ‘재차의’라는 이름마저 대슈망에서 붙여 주었다. 동해에서 벌어진 게이트 사고로 당시 바다 위에 사망자가 섬을 이뤘다는데, 그는 개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래서 ‘재차의(在此矣)’가 됐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되살아난 시체’의 이름이자, ‘여기 있다’는 의미를 담아서.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더니 그도 그랬다. 그는 늘 ‘여기’ 있었다. 늙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면 뼈마디에 녹 하나 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최상의 미모를 뽐내며 군림했다. 그 세월이 20년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책자 속의 사진을 흘겨보았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았을 때 재차의는 그리 위압적이진 않았었다. 오히려 세계를 지켜 주는 영웅으로서 존경스러운 이미지가 더 강했다. 외형만 따져 보아도 그는 감탄이 나오도록 아름답고 아주 잘생겨 호감을 쉽게 끌어내는 남자였다. 그러나 실물을 마주하고 그의 손아귀에 잡혀 보고 나니 그를 향한 감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재차의는 무섭다.
생소한 공포감에 속이 떨떠름했다. 홍보물 안의 순 멋지기만 한 재차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 쉬며 책자를 덮었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아시겠어요? 여기가 어디인지.”
당혹감에 몸을 굳히며 고개를 휙 들었다. 회색 문은 어느새 열려 있었고, 문틈 새에 팔짱을 끼고 선 아까의 여자 직원이 보였다. 조금 전 함께 나간 재차의 대신, 보라색 파일철을 품에 든 채였다.
“대슈망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고,
“모르시는 것 같던데요.”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 아시고도 우리 쪽 제안을 무시해 왔단 의미일까요? 송모래 씨를 이 자리에 한번 모시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그러면서 직원은 내 맞은편 자리로 가 앉았다. 구시렁거리는 목소리는 신문을 위한 핀잔이라기보다 한탄 섞인 혼잣말에 가까웠다.
보이지 않는 경계심을 주먹 안에 꽉 쥐고서 나는 그녀를 침착하게 살폈다. 재차의와 함께 섰을 땐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다시 보니 그녀도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얼굴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머리칼은 회색에 가깝게 군데군데 새치로 물들었고, 손목엔 나뭇가지 문신을 새겼으며 조그만 검정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목걸이 형태로 건 명찰 상단에는 ‘인사부장’, 하단에는 ‘안후이’라 쓰였다.
빤한 시선을 의식한 듯, 직원… 아니, 인사부장이 자신의 명함을 꺼냈다.
“안 부장이라고 불러 줘요. 후이 씨라고 불러도 되고요.”
“예…. 송모래입니다.”
교환할 명함도 내세울 직업도 없어 머쓱하니,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받은 명함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연보랏빛 색이며 플라스틱처럼 딱딱한 질감이 신기했다.
고개 숙인 나를 향해 안 부장은 쉼 없이 말했다.
“이렇게 끌려오시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우리는 최대한 송모래 씨 의사를 존중하며 기다렸거든요, 아시겠지만….”
내가 뭘 안다는 건지… 뜻 모를 소리였다. 대슈망에서, 그것도 인사부장이 왜 나를 기다리지? 내 의사 따위를 뭘 존중한다는 거지?
떠오르는 문장들이 있기는 했다. 우편함을 비좁게 하며 켜켜이 겹친 편지들, 통화 기록에 한가득 쌓여 있던 부재중 수신 기록들, ‘읽지 않음’ 표시로 번쩍이던 문자들…. 여태 그것들이 전부 사기 시도 혹은 함정 수사인 줄 알았다. 사실 여전히 그 제안이 사실이라 믿기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불신 또한 없었다. 진짜 재차의를 보았으니까. 그, 얼굴이며 목소리, 태도, 분위기는 문자에 쓰인 자기소개와 달리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대슈망은 재차의 님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르지만, 재차의 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대슈망의 뜻과 일치하진 않아요.”
빙빙 둘러 건넨 말의 속내를 알아채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차의가 한건을 창밖으로 집어 던져 죽인 일이며 나를 억지로 끌고 온 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말 같다.
“아무튼, 자. 반갑습니다, 송모래 씨.”
안 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손목 위의 나뭇가지 문신이 더욱 잘 보였다. 보라색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손톱 위에는 진주 모양 큐빅이 붙어 있었다. 신경 써 가며 관리한, 화이트칼라의 깨끗한 손이었다.
시선을 힐끔 숙여 살핀, 내 손은 핏기 없이 파리했다. 손가락 등에는 한건이 흘린 코피가 묻었고 손톱 밑에는 먼지가 꼈다. 온몸으로 구린내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내 상태는 충분히 나빴다. 그래서 고개를 내저으며 악수를 거절했다.
대신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네?”
“재차의가….”
뱉으려던 말을 뚝 끊으며 나는 입매를 구겼다. 그리고 얼른 고쳐 말했다.
“‘재차의 님’께서 왜 절 여기까지 끌고 온 겁니까? 대슈망이 저에게 했다는 제안은 또 뭡니까.”
“네? 우리 쪽에서 계속 연락드렸잖아요. 메일도, 전화도, 편지도 보내 드렸는데요. 모시러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집에 안 계시는지 응답이 없어 헛수고도 여러 번 했어요.”
“저는….”
머쓱한 마음에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저는 함정 수사인 줄 알았는데요. 제가 게이트에서 주운 돈으로 컵라면을 사 먹었거든요.’
오해를 풀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야 만다. 보통 이야기도 아니고, 좀스럽고 창피한 이야기였다. 그러잖아도 번지르르한 본사의 풍경에 기가 눌려서 손발이 다 시릴 정도였다.
“제가 받은 연락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요.”
그래서 그렇게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