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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꼬리 휘면서 곱게 미소 짓는 제르펠에게 자책감이 들어서 고개가 푹 숙어졌다. 주위를 보니 나 때문에 건물도 무너진 게 보였다.
[주인아. 미안. 건물도 부수고…….]
“괜찮다. 너의 탓이 아니다.”
[그래도……. 하마터면 주인한테도 상처를 입혔잖아. 볼에…….]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볼에 있는 작은 생채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는 상처에 속하지도 않는다.”
제르펠은 대수롭지 않은 상처로 치부했지만, 나에게는 큰 상처로……. 응? 잠깐만? 풀이 죽어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르펠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고 있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응. 무슨 일이 있는 듯…….
[주인아. 내 말……. 들려?]
아무리 제르펠이 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방금은 마치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내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놀란 마음에 물어보자 제르펠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말이 통하니 좋구나.”
제르펠은 능청스럽게 내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기분이 좋기는 한데……. 뭐, 말이 통하면 나야 좋지. 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뱀의 몸이어도 말이 통하니 오래 있어도 되겠다.]
뱀이었을 때 딱 불편한 점 하나가 말이 통하지 않는 점이었다. 그것 빼고는 좋았기에 그에게 얼굴을 부대끼면서 말했다. 근데 제르펠의 손이 움찔했다.
[주인아.]
“아니, 난 사람일 때가 좋단다.”
[왜??]
“난 내 품 안에 네가 쏙 들어오는 것이 좋고, 얼굴을 붙잡아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올려다보는 것도 색달라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유혹하듯이 눈꼬리 웃음을 치면서 말하는데……. 얼굴이 새빨개졌다. 참고로 그에게 내 말이 들린다면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들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제르펠의 말은 다 듣고 있을 거 아냐??
난 제르펠의 시선을 피해 멍하게 황당해하는 황제 쪽 일행들을 봤다. 저 봐봐. 저 어이없는 얼굴을. 그리고 황제의 표정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도깨비처럼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고, 인상은 구겨진 종이처럼 찌푸렸다. 좀 이따가 소리 지른다는 것에 한 표를…….
“태자!”
한 표를 걸 새도 없이 소리를 지르네. 황제는 흉흉한 눈으로 제르펠을 노려보다가 나를 째려봤다. 설마 내가 수도를 부숴서 그런가……?
“사자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지금 이 상황을 모른 척 지나가겠다는 말인가? 국민이 이 비로 인해서 고통받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비를 피해서 서 있긴 하지만……. 그건 비에 젖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닌가? 대체 비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애초에 비를 내린 건 교황이었다.
여전히 불길하게 짝이 없는 신물은 아직도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 이 비를 막을 사람은 나뿐이라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큰일 난다고 했다. 내가 몸을 한껏 치켜세우자 밑에서 제르펠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웅웅거리던 신물은 덜덜 움직임이 보일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처럼.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신물에 들어갔던 뱀들의 기운이 응축되다 못해 터져 버린 듯이 사방으로 펴졌다.
[주인아!!]
나도 모르게 꼬리로 그를 감쌌다. 가장 먼저 이상을 안 것은 대치 상태였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고, 비로 인해 보호받지 못한 손에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마차 고도의 열에 화상을 입은 그것처럼 비가 떨어진 곳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시종은 황제를 황급히 마차로 대비시키고 기사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는 데 급급했다.
내 몸을 두드리며 놓아 달라는 제르펠의 말을 무시하고 그가 비에 맞지 않게 꼼꼼하게 내 꼬리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난 내성이 생긴 것인지 같은 힘의 근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다. 오로지 사람.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었다.
난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교황을 찾았다. 성기사에게 둘러업혀 가는 교황을 향해 소리쳤다.
[야, 야!! 일어나 봐! 이거 네가 했잖아!!]
하지만 교황은 기절한 상태였다. 성기사들도 피하기 급급해서 내 말을 듣지도 않았다. 속으로 어쩌지를 난발했다. 이런 모습인 것도 당황스럽고, 신물은 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동하고 있고, 아까의 목소리는 빨리 막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
그 와중에 정신 사납게 황제는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시끄러워!!]
내가 큰 소리로 포효하자 드디어 입이 닫혔다. 내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조용히 해! 정신 사납다고!!]
“저……. 저…….”
내 태도에 황제는 목을 턱 잡으며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주위에서는 폐하, 거리며 외쳤다. 황제는 기사에게 부축을 받았다. 비는 점차 심하게 내렸고 동시에 비의 성질도 뚜렷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슈이렌 비키거라.”
[안 돼! 다쳐!]
제르펠이 나오려 하자 난 기겁을 하며 막았다. 왜냐하면 푸시시거리며 무언가가 녹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비가림막도 마냥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산성 액에 놓는 듯이 건물이 허물어지려고 했다. 제르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점점 나에게 닿는 비도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제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없앨 분위기였다.
[이건 내가 해야 해…….]
다짐을 한 건 좋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방도를 몰랐다.
이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수신은 나에게 신물을 깨부수면 된다고 했지만……. 과연 내가 부술 수 있을까?
황제는 기겁하며 비를 피했고, 한껏 지쳐 버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정말……. 제국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성역이 불타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건가…….”
그도 눈으로 비에 의해 모든 것이 녹아들고 있으니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처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황제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성역이 불탄다고? 그럼 수신은?? 성역의 호수에 수신이 잠들어 있다고 아는데?
여차하면 수신을 부를 생각이었던 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난 마른침을 삼키고 주위를 살폈다. 눈에 들어온 가장 안전해 보이는 건물 안에 제르펠을 피신시켰다. 그 안에는 미리 대피했던 카사 일행들이 있었다.
내가 제르펠을 놓아주자 카사가 황급히 옆으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제르펠의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스스로 자책을 하는지 움켜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난 찌릿찌릿한 고통에 눈이 파르르 떨렸지만 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 없구나…….”
난 눈을 멀뚱멀뚱하게 깜짝거렸다.
[그럴 리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에게 힘이 되는걸?]
나는 제르펠에게서 점차 멀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 홀로 비가 내리는 중앙에 서 있었다. 아래에서 하늘 위로 치솟아 있는 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힘이었다.
난 살짝 꼬리로 땅을 친 뒤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난 입을 크게 쩍 벌리고 신물을 입으로 물었다. 안간힘을 쓰며 신물을 깨트리려고 했지만 물리적인 힘으로는 잘되지 않았다. 단단한 신물은 내 턱 힘으로는 깨지지 않았고, 오히려 턱만 얼얼해졌다.
결국 난 신물을 깨트리지 못하고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신물을 무느라 얼얼한 턱을 부여잡았을 때 조심하라는 소리와 함께 내가 안간힘을 써도 부서지지 않았던 신물의 깨진 조각들이 내 눈에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멀리서 날아온 아주 작은 단검이 신물을 정확히 관통했다. 방금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른 밑을 내려다보니 제르펠이 검을 던진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난 제르펠을 향해서 싱긋 웃었다.
‘해 줄 수 없는 게 없다고 하더니.’
신물이 깨지자 모든 힘이 분출되었고 난 몸을 재빨리 길게 늘어트려 떨어지는 신물의 파편들을 몸으로 휘감아서 주변에 피해가 없게 했다. 어미 닭이 달걀을 품에 안듯이 부서져 버린 신물의 파편들을 내 몸으로 감싸고 얼마 뒤, 수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져서 미안하구나. 힘을 모으느라 늦었구나. 홀로 애써 주었다.]
[수신?]
[그래, 정말 너는 너의 역할을 잘해 주었다. 이제 나에게 맡기렴.]
수신이 내 몸을 점령하는 느낌이 들면서 의식의 주가 내가 아닌 수신으로 바뀌었다.
* * *
지그시 눈을 감은 슈이렌이 눈을 뜨자 석류처럼 붉디붉은 눈동자는 어디 가고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슈이렌의 모습이 하늘로 떠올랐다. 코 주변에는 기다란 콧수염과 머리에는 사슴과 비슷한 뿔이 솟아났고 날카로운 발톱이 선명하게 자리 잡은 발이 생겼다.
콧구멍으로 큰 숨결이 뿜어지면서 꽈리를 튼 슈이렌이 몸을 풀자 깨졌던 신물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채 둥둥 떠다녔다. 신물은 언제 더럽혀졌냐는 듯이 맑은 바다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비가 왔다는 건지 먹구름이 사라지고 햇살이 비추어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사자님……?”
너무나 다른 모습에 사람들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리고 햇살을 받으며 신물을 입에 문 채 하늘을 나는 슈이렌의 모습은 성스러웠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절을 하기 시작했다. 황제도 멍하니 입을 벌리면서 슈이렌을 쳐다보았다.
[무사해 보여 다행이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아닌, 머릿속으로 울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까 들린 슈이렌의 어조와 목소리와 확연히 달랐다.
수신을 알아본 자는 교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이라는 자리에 있는 그가 가장 수신과 가까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기절했던 교황은 거대한 성력의 요동을 느끼고 일어났다.
“수신님?”
교황에 속삭이다시피 한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들었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신관들도 수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구나.]
하지만 수신의 어조는 무척이나 슬펐다. 그 괴리를 눈치챈 이들은 누구도 아닌 스스로였다. 찔리는 일이 많은 신관은 자연스럽게 숙연해졌다. 신이 눈앞에 있어서일까 눈물을 글썽이는 자도 있었다.
[아이가 열심히 해 주었어……. 그 애가 있기에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거겠지.]
슈이렌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이렇게 현신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예외라는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이 힘들고 괴로웠구나……. 이리 오렴. 나와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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