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한 인간이 나를 찾아와 척박한 이곳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지. 그때의 난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더군. 그래서 내 힘이 담긴 구슬을 주었지. 그것으로 비를 내리라고.]
[그……. 구슬이 왜?]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더는 내 힘이 담겨 있지는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만……. 아이들의 힘과 너의 힘을 빼앗은 것 같구나. 내 힘이 담겨 있던 구슬이니 힘을 빨아들이기도 쉬웠겠지. 그리고 그 구슬은 이미 오염이 되어 버렸지.]
[교황이 들고 있다고?]
[……그리되겠구나. 너의 힘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힘과 뒤섞인 것이겠지. 내가 그리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너에게 갔을 가능성이 있다.]
벙쪄 버린 난 입이 벌어졌다. 교황이 왜 비를 내리기를 재촉하고, 이상하게 힘이 차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교황도 성역의 일에 동참했으니 구슬로 뱀들의 힘을 빼앗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고 구슬이 오염된 마당에 내 힘을 빼앗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섞이면서 내 힘이 구슬에 간 것처럼 구슬에 있던 뱀들이 힘이 친숙함을 찾아서 나에게 왔다는 말이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해!]
경악한 난 큰소리로 소리쳤고 안절부절못했다. 암울한 내용만 말한 것과 다르게 방법은 간단하다고 수신이 말했다.
[그 방법이 뭔데?]
[구슬을 깨부수면 된다. 물론 그 전에 에이든이라는 아이에게 있는 아이들의 힘을 흡수한 다음에 말이지.]
[깨부수면 끝이야?]
[……지금으로선 그 방법뿐이지. 넌 깨부수기만 하면 된다. 그 뒤는 나에게 맡겨라.]
비장해 보이는 수신의 말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그는 더는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어보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수신이 콧등으로 내 머리를 툭 건드렸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혹시나 해 말하지만 난 신이다. 인간 세계에 관여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 힘이 터진다면 후폭풍이 어마할 것이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겠지. 그때는 잘 부탁한다.]
[뭘 부탁한다는 말이야?]
[빨리 서두르는 것이 좋겠구나. 부디 몸조심하렴.]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을 요구했지만, 수신은 점점 멀리 사라져 갔다.
* * *
난 수신의 의식 세계에서 쫓겨났고 눈이 번쩍 떠졌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내 몸은 딱 알맞은 온기에 감싸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자 뻗어 오는 손길이 있었다. 난 자연스럽게 손에 얼굴을 비볐다.
“슈이렌?”
제르펠의 목소리였다. 그는 걱정이 연연한 기색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며 눈을 마주치려고 했는데 그의 눈가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또 안 잤어?? 난 난리를 치며 잠 좀 자라며 소리를 쳤지만 말 대신 쉭쉭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제르펠은 내가 힘차게 소리를 내자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다행이구나.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네가 다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디에 가둬 둘 수도 없고. 다음에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알겠느냐?”
[……미안.]
제르펠은 이번에는 따끔하게 나를 질타했다. 숨어 있는 말의 뜻이 짐작이 간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고.
난 그의 눈치를 보면서 화를 풀라면서 애교를 떨었다. 내가 먼저는 잘 하지 않는 입맞춤도 해 주면서 화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풀렸나……?
“다음부터는 꼭 나와 같이 가자꾸나.”
[…….]
앞으로 절대 나 혼자 움직이는 건 무리인 듯싶다. 단호한 얼굴로 봐서는 내 말이 씨알도 안 먹힐 확률이 100%였다.
“그리고 선물 고맙구나. 잘 쓰마.”
그는 보란 듯이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 만년필은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다. 내가 잡혀가는 바람에 만년필이 전해졌을까 걱정했는데 폴과 월이 그에게 전달했는지 그가 쓰고 있는 만년필은 내가 선물을 해 준 것이었다.
그는 내 목을 살살 긁어 주었고, 난 별말씀을 이라며 골골거렸다. 제르펠이 서류에 집중하려는 찰나 아직 그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난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서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게 한 다음 수신에게 들었던 말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다.
그런데 제르펠의 미소가 좀 어색했다. 아차…… 지금 나는 뱀이니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풀이 죽은 내 모습을 보며 그가 나를 보며 살짝 고민하더니 말했다.
“설마 다친 곳이 있나?”
한껏 걱정스러운 베르펠의 목소리에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픈가?”
또 고개를 저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해 미안하구나.”
미안하기는……. 난 한숨만 푹 내쉬었다. 수신이 마지막에 빨리 서두르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이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게 왜 말을 통하지 못하게 해놔.
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힘이 돌아올 때까지 소식을 전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사람으로 변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수신의 말처럼 힘이 바닥이 났다고 하더니 푸른빛이 보일락 말락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빨리 힘을 회복하자며 심신을 다스리며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대체 언제 힘이 돌아오는지 갑갑한 마음에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제르펠의 옆에는 산더미만 한 서류가 쌓여 있었고, 그것을 일일이 읽고 있었다. 난 눈대중으로 대충 보았는데 카지노에 관한 이야기였다. 난 서류 종이를 하나 물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 너에게도 설명을 해 줘야겠구나.”
내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제르펠은 나에게 간결하게 설명해 줬다. 프란시아 후작이 무슨 짓을 했고, 어떤 후폭풍이 왔는지. 그 말을 들은 난 꼴좋다며 낄낄 웃었다. 아주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설마 프란시아 후작과 관련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안은 마탑으로 세드릭은 귀족들의 저택을 조사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후작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라도 교황은 황후랑 연관이 있었으니까 뭔 짓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수신이 서두르라고 했나? 하지만 기껏 들고 온 소식은 누구에게 전달되지 않으니…… 한숨만 계속 푹 내쉬었다.
제르펠은 풀이 죽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다시 서류를 검토 중했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 한 생각. 난 수신의 힘 덕분인지 아이펠트 제국 언어의 듣기, 읽기, 쓰기가 완벽했다. 내가 글자를 적어서 보여 주면 되잖아! 큰 깨달음에 옳다구나 하며 제르펠에게 기어갔다.
그는 내가 선물해 준 만년필을 쓰고 있었고, 평소에 쓰던 펜은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 난 꼬리로 그 펜을 꺼내서 돌돌 말아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했다. 제르펠은 내 돌발행동을 주시했고 의아하게 나를 불렀다.
“슈이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종이를 입으로 물고 와서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최대한 집중을 하면서 글씨를 적어 갔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꼬리의 힘이 달려 제대로 펜을 부여잡지 못했다. 놓인 결과물을 제르펠에게 보여 주기가 힘들었다.
“……급한 말인가?”
제르펠은 내 행동으로 생각을 유추했다. 맞아! 상기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르펠은 나름 내가 적은 글자를 읽어 보려고 열중했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읽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
나도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힘이 달려서 만년필을 잡지 못했으니까……. 만년필을 놓는 과정에서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였다. 만년필로 말고 다른 매개체가 있잖아?
그건 내 꼬리였다.
내 꼬리가 더러워지지만……. 난 열려 있는 잉크통에 꼬리를 담근 후 조심스럽게 글자를 적었다. 수신과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었지만 적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난 가장 중요한 교황과 신물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꼬리를 세워서 적은 글자는 나름 잘 적혔다. 지렁이 글씨체였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꼬리에 묻은 잉크를 털어 내고 뿌듯하게 종이를 입으로 물어서 그에게 전해 주었다.
제르펠은 유심히, 차근하게 읽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랬군……. 그래서…….”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제르펠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데?]
제르펠을 짙은 탄식을 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 전에 이 말을 해야겠구나……. 에이든의 상태가 좋지 않다. 너의 글을 읽으니 이해가 됐구나. 아마 에이든도 감화된 것이겠지……. 그걸 빌미로 황후가 교황을 황궁으로 불렀다.”
[뭣이라??]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르펠을 보았다. 그는 달래 주는 듯이 나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놀란 마음에 펄쩍 뛰었다. 그는 진정하라며 나를 토닥거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잉크가 묻은 꼬리를 부드럽게 닦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라. 감시는 붙여 두었다. 에이든의 병세가 안 좋은 건 맞는 말이니, 막을 빌미가 없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감응했다. 그 의미는 반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빌미보다는 에이든이 걱정됐겠지……. 난 물끄러미 제르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썹이 비뚜름했다.
“교황이 에이든의 상태를 보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결단이 내려졌지.”
난 당장 에이든의 상태를 보고 싶었다. 그의 옷깃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주인아 에이든을 보러 가자! 그도 내 생각을 알았는지 내 머리를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라. 이상하게 교황이 에이든의 궁에 머물지 않고 황후 궁에 머문다고 했더니…….”
그는 급하게 서신을 적었다. 세드릭을 부를 생각인가? 제르펠은 다 적은 서신을 돌돌 말더니 창문을 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커다란 매가 쏜살같이 날아와 창문턱을 잡았다. 번뜩이는 매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번뜩이는 매의 눈빛에 기겁하고 제르펠의 뒤에 숨었다. 그는 매의 발목에 쓴 서신을 잘 매달아 준 다음 그 매를 다시 날려 보냈다.
매가 잘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제르펠은 나를 들어 올리더니 에이든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가 내민 손을 향해서 얼른 기어가 그의 팔을 타고 목까지 올라갔다. 제르펠은 내가 자리 잡기 편하게 자세를 잡아 주고는 문을 열었다. 제르펠은 지나가는 시종 한 명을 불렀다.
“에이든의 궁에 찾아가도록 하지. 전보를 전하도록.”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