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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94화 (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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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손을 모은 시녀가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방 안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깍듯하게 자세를 유지한 채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네리아가 있었다. 하지만 차는 줄어들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네리아는 시녀가 들어오자 질문부터 던졌다.

“밖의 상황은 어떻지?”

“여전합니다.”

“그런가.”

침착하게 말하는 어투와 달리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신의 사자라……. 사자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신의 사랑은 확실히 받고 있나 보군. 하필 들어간 곳이 그곳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인제 와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헤쳐졌다.

“……마마님도 벗어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네리아는 냉소적으로 조언한 시녀에게 말했다. 사납게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눈을 돌렸다. 그녀는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내 가문이 주동자니. 아무리 성을 버렸다 하더라도 3대를 멸하는 것이 보통이지.”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작성한 계약서가 빌미를 잡힐 줄은 누가 알았을까? 딴말하지 못하도록 작성한 계약서가 오히려 독이 됐다. 선명하게 찍힌 인장 때문에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금언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기에 후작의 이름이 나올 리는 없어서 안심했지만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말이 아니라 적게 하다니……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알고 행한 건지…….”

황후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감옥 생활이 힘들었던 귀족들에게 어떤 정보든 불면 나가게 해 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정보를 종이에 적게 했다. 감옥의 수가 모자랐기에 방도를 낸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 뒤로는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제르펠은 감옥에 가둬 두고 정보를 주는 대신에 감옥에서 해방해 줬다. 어떤 귀족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적어 주기도 했다. 이러니 너나 나나 제르펠에게 정보를 퍼주고 있었다.

후작이 잡히지 않았지만 프란시아 후작으로서 아이펠트에서 매장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지…….”

지그시 눈을 감았던 네리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에이든은 어떻지?”

“상태가 많이 심각합니다.”

“그래…….”

그녀는 온몸의 기력이 다 빠진 것처럼 소파에 기대앉았다. 여전히 화려한 금 장식품들이 가득했지만 어딘가 어둑어둑해 보였다.

몸이 건강해졌기에 안심했는데 그것을 비웃듯이 약으로 눌러 왔던 병이 터진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오르고 눈도 잘 뜨지 못한다고 들었다.

“이건 신이 내린 벌인가. 신의 영역을 침범해 뱀을 죽여 에이든의 병을 낫게 한.”

그녀는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교황의 손을 잡는다.”

“마마. 그자는 믿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서신에 적었던 그 물건도 진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짜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황가를 속였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시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녀로서는 교황의 손을 잡는 것만이 유일한 방도라 믿었다. 네리아는 탁자에 올려져 있는 서신을 유심히 보았다.

“황궁만큼 권력의 방향을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곳은 없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잘 봐달라고 빌었던 귀족들이 순식간에 뒤를 돌아섰지. 썰렁해진 황궁을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네리아는 더는 화를 낼 힘도 남지 않았다. 어릴 적, 후작 영애로 태어나 몸은 약했지만 황제와 결혼을 하고 순탄하게 인생이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제르펠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가 나타나도 제 곁에는 제국의 황제, 교황, 그리고 후작인 아버지. 그리고 마법사의 도움이 있었다.

“신의 사자가 그리 대단한가?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는다고? 그렇다면 왜 내게는 축복을 내려 주지 않는지…….”

“…….”

전담 시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네리아를 지켜본 그녀였다. 후작 가에서부터 그녀의 시녀였고, 궁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곁을 지켰다.

네리아는 어릴 때부터 무엇 하나 부럽지 않게 자랐고,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쉽게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었다. 황제의 사랑도,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침범하려는 위험 분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 손을 더럽히기는 싫어했다.

고귀하고 우아한 귀족으로 살고 싶어 했다.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입니까?”

교황은 네리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은 황가가 아닌 제국의 기반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면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죽든 그놈이 죽든.”

“마마님. 교황이 제안한 것은.”

“안다. 하지만 이 제국의 황후는 나다. 그리고 난 밑으로 떨어질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아.”

오만하고 독선적인 생각이었다.

네리아는 눈을 부라리며 황궁 내에 자리를 차지하는 성역을 보았다. 여전히 결계로 지켜져 있어 커다란 숲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저 숲으로 보이는 성역은 네리아에게는 황궁에서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숲이었다.

* * *

[아이야. 일어나 보렴. 아이야?]

난 계속 부르는 소리에 눈을 슬그머니 떴다. 내 몸은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었고 밑바닥은 낭떠러지였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떨어진다며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진정하라는 수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야. 진정하렴.]

“어? 수신?”

수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수신은 내 앞에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있었다. 호수에서는 목소리만 들었지 실제 모습을 본 적은 없었기에 신기했다.

“역시 용이었네…….”

역시 내 예상대로 용이었다. 내가 뱀이니까 이무기 아니면 혹시나 용이 아닐까 생각은 했었다. 내가 호기심이 서린 얼굴로 바라보자 수신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왜 그러니?]

[아냐, 아무것도. 그것보다 여기는 하늘이야?]

내 주위에는 하얀 솜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아이펠트 제국이 펼쳐졌다. 제국을 모형으로 나타낸 듯, 커다랗게 보였던 황성도 조그맣게 보였다.

[흠…….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의식 속의 세계다. 난 호수에 잠들어 있지만, 원래의 일은 이렇게 내 땅을 보면서 인간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비를 내리는 존재니까 말이다.]

[그렇구나…….]

혹시나 떨어지지 않을까 발로 바닥을 툭툭 치려고 했지만 발이 아닌 꼬리였다. 바닥은 투명한 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팅팅 거리는 소리가 났다.

[뱀이 됐네…….]

[그것보다 아이야, 몸은 괜찮니? 한동안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을 쓰는 것도 버거울 거다. 폭주 상태와 비슷하여 내가 잠시 잠재웠다. 아마 넌 아이들에게 감응한 것 같구나…….]

그리 말하는 수신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그래서 수신이 말하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쉬웠다.

[나한테 들리던 목소리가 아이들이었다고? 죽은…… 아이들 말하는 거지?]

[그래…….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는 아이들 말이다. 아이들을 만났니?]

[만났다기보다 에이든의 곁에 머무는 걸 봤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경매장에서 계속 들렸던 목소리가 죽은 애들이었나……. 하긴 분노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 머릿속에서 내 분노를 부추기는 소리가 들릴 턱이 없을 텐데……. 그것이 죽은 뱀들이라면 말이 다르다.

[나를 부추길 만했네. 사람들이 다 싫었겠지……. 그런데 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지?]

이상했다. 키르가 우려했기에 난 에이든의 저주를 가져오자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곁에 있는 것으로 감화된 건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렸다. 정황상 수신이 나를 구해 준 모양이었다. 난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좀 이상했거든. 그래도 네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했어.]

실제로 휩쓸리다 못해 나도 모르게 희한한 말을 뱉기도 했다. 수신은 잠시 나를 관찰하다가 말했다.

[아니다. 내 죄인 것을……. 오히려 내가 감사를 표해야지. 네 덕분에 더 이상의 숲의 피해는 없단다. 키르와도 사이좋게 지내어 주어서 고맙구나. 항상 나 대신 숲을 지키게 해서 언제나 신경을 쓰고 있었지.]

수신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신을 모시는 자가 성역을 침입하고 뱀들을 죽였으니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수신은 참담함을 감추고 말했다. 하지만 눈은 슬프게 잠겨 있었다. 난 수신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교황은 걱정 마. 주인이 더는 성역에 침범하지 못하게 막았고, 키르는 에이든이랑 잘 지내고 있어. 사실 내가 키르한테 도움을 받는걸?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할 거면 내가 아니라 주인한테 해. 나는 사건을 목격한 걸 주인에게 말한 것뿐이야. 아마 손을 쓴 건 주인일걸?]

[그래도 너의 덕이 포함된 것은 변함없지.]

수신은 자상한 미소로 나에게 말했다.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데 쑥스러워 머쓱하게 꼬리로 목덜미를 긁었다. 신에게 받는 감사라…… 언제 이런 경험이 있을까 싶어 재미있기도 했다. 머쓱하게 웃었던 난 에이든의 상태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너를 보고 싶었는데. 에이든 알지?]

[…….]

[신물! 신물 같은 거 없어?]

[…….]

[왜 답이 없어?]

[운명이란 가혹하구나.]

난 꼬리로 바닥을 치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수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수신은 힘겹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조마조마하게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신물은 있다. 하지만 이미 오염이 돼 버렸지.]

[……무슨 말이야?]

[키르에게 들었다. 너의 힘을 빼앗아 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키르에게 교회의 종에 대해 말했으니……. 수신은 긴 한숨을 내리 쉬었다.

[너의 힘은 특별하다. 내 힘을 직접 준 것과 같기에 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그런 너의 힘을 빼앗겼다고 하면 내가 아주 오래전에 인간들에게 준 선물을 이용했을 거다.]

[뭔 말이야?]

수신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나와 눈높이를 마주하며 몸을 숙여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자 난 목을 한없이 뒤로 젖혀야 했다. 수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지금은 제국이라고 불리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 오히려 비가 오지 않아 땅은 척박하기까지 했다.]

수신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체 몇 년, 몇백 년 전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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