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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93화 (9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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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이 명령한 준비물을 가지고 온 이안이 도착하자 수용소 향했다. 외진 곳이고 방음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수용소 앞에서 지키던 기사는 피곤한지 하품을 쩍 하고 있었다. 기사는 제르펠을 보자 피곤이 감돌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말똥하게 눈을 뜨고는 벌떡 일어났다.

“따로 문제는 없느냐?”

“네! 없습니다.”

당차게 말한 기사에게 제르펠은 ‘하’ 하고 짧게 탄식했다.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르펠을 보았다.

“정녕 문제가 없었다고?”

제르펠은 기사를 쏘아보았다. 기사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렸다. 제르펠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는 사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석금을 받고 몇 귀족을 풀어 주었다. 많은 귀족이 감옥에 수용되었기에 설마 들키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기사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제르펠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의 자택에 수색하는 쪽으로 제 기사단을 배치하다 보니 인력이 부족해 다른 기사단에 요청했더니 일어난 일이었다.

“되었다. 나중에 알아보면 되는 일이지.”

경고장을 날리면서 기사를 스쳐 지나갔다. 기사의 어깨가 움찔했고 조심히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 온갖 비명과 고함이 들렸다.

“가지.”

제르펠은 소음을 무시하며 묵묵히 걸어갔고, 갇혀 있던 귀족들은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혹시나 자신을 구하러 온 자인가 싶어 철창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과 다르게 하는 말은 같았다. 갇혀 있는 모두가 자신은 죄가 없다며 떠들었다.

저번의 에이든의 유모를 떠올렸다. 이안이 조용히 하라며 고함을 쳤지만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지 끊임없이 말했다.

“들리지 않는가 본데요?”

다들 이성을 잃었는지 눈이 흐리게 풀려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혀를 찼다. 혹여 슈이렌이 깨지는 않을까 시선을 내렸지만 규칙적인 숨소리로 자고 있었다. 그는 곧 있을 소리의 충격을 대비해서 조심히 슈이렌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뒤를 따라오던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네?”

기사는 귀족들을 처리할 생각인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지만 더는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없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검을 건네었다. 검을 받자 이안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르펠은 검을 높이 들었고, 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르펠은 검을 돌려 날 부분이 아닌 검 등으로 힘껏 철창 쪽으로 내리쳤다. 깽. 하는 철과 철이 부딪쳐 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철창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졌다. 그것을 본 기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벌레가 샤샤샥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이제 조용하군.”

제르펠은 조심히 슈이렌에게서 손을 떼었고 검을 그에게 던졌다. 기사는 허둥지둥 그 검을 다시 받았다.

“이안, 상인은?”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상인은 중죄로 가장 깊숙한 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제르펠 일행들은 곧 상인의 앞에 우뚝 섰다.

“귀족인 걸 다행으로 여겨라.”

상인은 후작의 하수로 높은 지위는 아니라도 남작이라는 귀족의 지위를 지닌 자였다. 상인은 온갖 수모를 당했는지 다른 귀족과 달리 해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제르펠을 보고 있었다.

“이안, 내가 준비하라고 이른 것을 주거라.”

“네.”

이안은 말없이 챙겨 온 종이와 펜을 상인의 눈앞에 던졌다. 그리고 제르펠은 나지막이 상인에게 고했다.

“네가 아는 모든 사실을 불어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상인의 고개가 점점 올라갔다. 상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말할 수 있다면 진작 말했다.

“저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슈이렌의 말에 넘어간 그가 입을 열고 말을 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후작이 수를 썼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후작은 마법사의 도움을 받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안에게 들은 그는 후작이 구하러 온다는 일말의 희망조차 버린 지 오래였다.

제르펠은 상인을 응시하다가 턱짓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그럼, 적어라. 왜 내가 종이를 들고 왔다고 생각하지? 네가 금언에 걸렸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입은 움직이지 않아도 손은 움직이겠지.”

조용한 공간에 그의 말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이안은 멍하니 제르펠을 보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상인도 마찬가지였는지 허겁지겁 종이를 바닥에 깔더니 펜을 들고 적어갔다. 입과는 달리 제 뜻대로 움직이는 손에 유유히 후작의 만행을 적어 나갔다.

“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적는다면 좀 더 선처해 줄 수도 있지. 너희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냐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은가? 라는 제르펠의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제안에 관해 물었다.

“선, 선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곳에서 나가게 해 주마.”

“정,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감옥에서 나가게 하는 것은 물론, 법정에서도 죄를 참작할 수도 있지.”

그들로서는 이곳은 버티기 힘든 곳이었기에 제르펠의 말은 한 줄기의 빛과는 다름없었다.

“단, 정보를 나에게 준다면.”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나가게 해 준다는 말에 상기된 귀족 중 한 명이 재촉하듯 물었다.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제르펠은 벽에 기대선 채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어떤 것이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이 일에 관련된 자들. 너에게 경매를 주선한 자도 좋고. 노예를 사 간 자들도 좋다. 어떤 정보라도 쓸모가 있다면 죄를 참작해 주지.”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워낙 많은 귀족이 동시에 갇혀 옆에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관여된 자들이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귀족이 그것을 들고 있을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한 귀족이 번쩍 손을 들어 응하겠다고 말했다.

제르펠은 이안에게 눈짓을 주어 그 귀족에게도 종이와 펜을 주었다. 독방으로 갇힌 감옥이기에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글을 적어 가는 서걱거리는 소리와 어두운 감옥 생활로 심적으로 힘들었던 귀족들이 제르펠의 조건에 응하기 시작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던 귀족은 혹시나 제 이름이 적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하면서 그럴 바에는 먼저 고발하여 죄를 참작 받겠다고 생각했고, 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귀족도 있었다.

“저, 전하. 다 적었습니다!”

상인은 어느새 종이에 빽빽하게 글씨를 채웠다. 아는 한에서 모든 걸 적은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더는 없느냐?”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적었습니다. 그럼 저는…….”

상인은 기대감에 얼굴을 상기한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르펠은 그를 힐끗 바라본 다음에 기사에게 눈짓을 주었다. 기사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열쇠를 넣어 돌렸다. 덜컥하는 소리와 철창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나가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상인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렸다.

“밖에 가면 기사가 있다.”

“네!”

그는 고개를 꾸벅이며 누가 잡지도 않는데 후다닥 달려 나갔다. 진짜로 나가느냐고 의심했던 귀족은 상인이 나가는 소리와 모습에 난리가 났다.

전하 어떤 정보라도 괜찮은 것입니까? 제가, 제가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니 누구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또다시 감옥이 시끄러워졌다. 갇혀 있는 공간이다 보니 소리가 울렸다. 제르펠의 미간이 좁아졌다. 철장 사이로 손을 내밀면서 종이를 달라고 소리쳤다.

“조용.”

귀족들이 얼마나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말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하지 마라. 소란스러워 잠에서 깬다면 어찌할 것이냐?”

귀족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비는 처지였다.

“이안, 한 명씩 차례대로 종이를 주어라. 한 장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겠군. 넌 열쇠를 이리 주고 가서 종이와 만년필을 더 챙겨 와.”

기사는 황급히 물건을 가지러 나갔고 이안은 다른 귀족에게 종이와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이안은 감옥 사이를 오가며 종이와 펜을 나누어 주었고, 기사는 작성이 완료된 종이를 제르펠에게 주고 감옥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둘씩 정보를 대가로 감옥을 나가게 됐다. 귀족들로 시끌벅적했던 감옥은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다시 생긴 수두룩한 자료들로 눈물을 삼켰다. 그는 종이를 탁탁 치며 가지런히 모았다.

“전하도 참 거짓말에 능통하시군요. 참작해 주실 생각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르펠은 이안을 흘끔 보며 말했다.

“할 수도 있다고 했지.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거짓은 아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감옥에서 나가지 않았는가? 세드릭한테 전하도록. 감옥의 자리는 넘쳐나니 귀족들을 잡아 오라고.”

“다음에도 반복할 생각입니까?”

“당연한 것을 묻지 마라.”

귀족들은 듣지 못한 그들의 대화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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