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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90화 (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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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은 영상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기에 후작과 무의미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어찌한 일로 오셨습니까? 초청된 손님은 다 왔다고 주최자에게 들었습니다만.”

핵심을 찌르는 베르트 공작의 말에 후작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우연히 초대장을 얻었기에 왔지. 공작도 알다시피 내가 사업에 관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지 않은가.”

“우연히 말입니까…….”

“저번에도 우연이 아니었나? 우연이 참으로 많군.”

비꼬는 제르펠의 말에 후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후작의 심기를 뻔히 알았지만 제르펠은 대수롭지 않게 베르트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난 이만 가 보지.”

“벌써 말입니까?”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자가 있어서 말이지.”

“기다리는 자가 사자님이신가요?”

공작은 즐거운 미소를 짓는 제르펠을 보고 슈이렌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기분 좋게 떠나는 제르펠을 우뚝 서게 한 것은 후작의 단 한마디였다. 그 말은 제르펠의 기분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기 충분했다. 후작은 단단히 벼르고 왔는지 떠나려는 제르펠을 향해 도발했다.

“연회에서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사자님답게 기품이 있는 자세였지만 발언은 다소 경솔했습니다. 폐하께 무례한 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혹여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염려가 됩니다. 지금 사자님을 뵐 수 있는 건 전하뿐이시니 언급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무례한 언사라…….”

제르펠은 후작의 도발을 어떻게 받아칠지 고민이었다. 다른 것은 다 넘길지언정 슈이렌에 대한 모독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무례한 언사라니? 후작이 말하니 웃음이 나오는군.”

“…….”

후작은 제가 들은 것이 제르펠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지 의심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후작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오랫동안 귀족의 수장 자리에 머물러 제국을 번성하게 해 주었나? 전쟁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한때 그 부유했던 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쟁은 길어질 뿐 끝이 나지 않았지.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지?”

이때부터 후작의 주위에 불길한 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높낮이 없는 제르펠의 말은 잔잔했지만 속에 날카로운 칼날을 감추고 있었다. 제르펠의 시퍼렇게 빛나는 안광이 프란시아 후작을 주시했다.

주변 귀족들도 노골적인 비판에 두 귀를 의심했다. 베르트 공작만이 제르펠이 카지노 건을 밝힐 의향인지 궁금해했다.

“무능해 빠진 귀족들 탓 아닌가. 그 귀족들의 수장인 후작에게 묻지. 내가 틀렸는가?”

“저, 전하께서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전쟁에는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그 돈을 장만하는 것만으로도 힘듭니다.”

제르펠의 살기와 기백에 후작은 어깨에 커다란 바위를 짊어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후작은 직접적인 모욕에 떨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제국을 모욕하는 것은 후작이 아닌가? 법으로 금지된 일을 행하여 돈을 끌어 모은 자에게 들을 이유는 없군.”

비웃음이 가득한 제르펠의 말에 분위기가 요동쳤다. 동시에 후작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경고와 같은 그의 말에 낯이 잔뜩 굳었다. 들켰나? 이 생각이 후작의 머리를 지배했다.

이내 생각을 지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카지노는 마법으로 인해 지켜지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카지노나 경매에 대해 말을 전달받지만 문제가 없다고 말하였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

그가 귀족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저질렀던 비리들이 많아 어느 하나를 콕 집어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는 제르펠이 자신을 떠보는 심보라며 불안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면 속에 잠겨 있던 일이 드러날 때가 되었지. 아마 이들 중에도 관련이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초대장을 제시하지 않으시면…….”

제르펠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분위기가 연회장 문이 열리면서 문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켜라. 내 전하께 할 말이 있다!”

세드릭은 막아서는 시종을 뒤에 줄줄이 달고는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리는 귀족들 사이를 비집고 세드릭은 제르펠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고했다.

“전하, 고할 것이 있습니다. 잠시 귀를…….”

세드릭의 출현과 행동을 주시하던 제르펠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고, 가볍게 손을 까닥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벌떡 일어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방금 후작에게 뿜었던 살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린 살기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어떤 자는 추워진 공기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르펠에게 다가가던 공작도 흠칫 뒷걸음을 칠 정도였다.

“그것이 사실이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듣는 이가 차갑게 얼어붙을 정도로 살기가 진동하는 말이었다. 심각한 상황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 세드릭의 대답이 울렸다.

“네…….”

“당장 간다. 말을 준비해라.”

제르펠은 제가 던진 폭탄은 생각하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말을 거침없이 몰아서 슈이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슈이렌!!”

“어? 이 목소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아보니 말을 타고 나에게 달려오는 제르펠이 보였다. 그는 비에 젖은 것이 아무렇지 않은지 말을 몰아세우면서 비 사이를 맹렬하게 뚫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 비로 인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그가 내 곁에 있다는 생각에 안심됐고 안도의 웃음도 나왔다.

제르펠의 뒤에서 세드릭이 힘겹게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사람들 사이를 넘어 버리고는 말을 세워 번개같이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잔뜩 굳은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제르펠은 가로막는 귀족을 옆으로 밀쳤다. 쿵 하는 소리와 귀족이 옆으로 넘어갔다. 밀쳐진 귀족이 바닥을 뒹굴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 팔을 붙잡고는 말도 없이 숨을 고르더니 위에서부터 아래로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를 잡고 가볍게 뒤로 돌려세우더니 앞뒤로도 살펴보았다. 열정적인 태도에 내가 당황해 그만하라며 손으로 가슴을 밀었다.

“주인아. 나 괜찮거든? 어디 다친 데도 없어.”

“……다행이구나.”

제르펠은 얼굴을 내 어깨에 기대더니 꼭 끌어안았다.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비를 맞는 것도 고사하고 말을 타고 곧장 달려왔으니…….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화가 나기보단 걱정이 앞서던 모양이었다.

하긴, 주인이 나한테 화를 낼 리가 없지. 그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사라졌다는 소식에 심장이 내려앉았을 것 같은 그의 표정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금까지 그런 표정이었다.

“미안…… 많이 걱정했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는 내 어깨를 잡더니 얼굴을 확 떼었다. 갈 길을 잃은 손이 공중에 멈추고 그는 섬뜩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내 입이 다물어지고 눈이 살짝 떨렸다. 역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서리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처져 있던 그의 눈매가 확 사나워졌다. 난 눈을 데굴데굴 구르며 주위를 살폈고 바쁘게 움직이던 주변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눈을 돌리는 내 태도가 못마땅한 것인지 제르펠이 내 턱을 잡았고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막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고개 돌리지 말고.”

“…….”

“내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어디 다친 곳이 없어서 망정이지.”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풀이 죽어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

제르펠은 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가 이제 화가 풀렸어?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큰일 날 뻔한 건 아느냐? 내가 분명히 말했지. 조심, 또 조심하라고. 호위랑 떨어지면 어떡하느냐? 꼭 붙어 다녔어야지.”

아주 거한 사고를 친 아이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말을 해도 길게 하지 않았던 제르펠이 옆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 냈다. 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주인 선물 사러 왔다가 이게 뭐야? 속상함에 점점 고개가 내려갔다.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제르펠은 다정하게 머리에 손을 얹고는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걱정이 엿보였다. 왠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기분이라 나는 그를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그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미안…… 많이 걱정했지? 하지만 내가 누군데? 혼쭐을 내주었지. 아주 악질이더라고, 사람들을 납치해서는 귀족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라면서 노예로 팔려고 하는 거 있지? 지하실에는 사람들 잡아서 철창 안에 가두고 말이야.”

“노예? 설마…… 너를 노예로 삼으려 했나?”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만천하에 울렸다. 기사들에 의해 잘 연행되던 귀족들이 그의 눈빛에 이제는 얼른 데려가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잘 돌아가는군.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내 말이. 이 정도면 그냥 전부 죽여 버려야 해.”

분노에 차 음산하게 말하던 제르펠도 그에게 맞장구쳤던 나도 순간 멈칫했다. 죽어야 한다니. 난 사람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슈이렌?”

“잠, 잠시만…… 뭐가 좀 이상한데……?”

[왜 그래?]

제르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잠잠하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갑자기 머리를 툭 치고 들어왔다.

[너도 동의한 거 아니야?]

[맞아, 나도 들었어!]

머릿속이 왱왱 울렸다. 다가오는 제르펠을 피해 뒤로 물러갔다. “그랬잖아!”라며 동의하는 모르는 이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워졌고 가시에 콕콕 찔리는 것처럼 두통이 일었다.

[나쁜 사람들이잖아?]

[아이야.]

이명 소리에 내가 귀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버렸다. 다시 한번 엄중하게 울리는 수신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아…… 진짜 요즘 왜 이리 자주 기절해…….

내 몸의 주인은 난데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점령한 것처럼 서로 대립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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