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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89화 (8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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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이 이 꽃집에서 항상 꽃을 샀다는 사실을 안 슈이렌은 월에게 돈주머니만을 건네주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월은 얼굴을 붉히며 뛰쳐나가는 슈이렌을 잡으려 했지만 마침 꽃다발이 완성됐다는 꽃집 주인의 말에 멈췄고, 제값을 치르고 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꽃집을 나온 월은 슈이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월의 입에서 허망하게 그의 이름이 나왔다.

“슈이렌 님?”

월은 마차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폴에게 다가갔지만 정작 폴은 슈이렌이 어디 있냐는 물음뿐이었다.

“안 오셨다고?”

“선배님이랑 같이 가지 않았습니까?”

폴과 월은 서로 어리둥절하다가 슈이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슈이렌이 사라진 것이다. 둘의 얼굴색이 송장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둘은 서둘러 꽃집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슈이렌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특이한 외모는 눈에 띌 만하지만 마법으로 외모를 바꿨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슈이렌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맞은편에 있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닦고 있었고, 그때 슈이렌을 보았다고 월에게 말했다.

“아, 조금 전에 꽃집 옆에 서 있던 남자라면 보았어요.”

“정말입니까?”

“네,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 주는 듯했어요. 지도를 들며 곤란해하던 여성이 있었거든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일행인데 사라져서 곤란하던 참입니다. 작은 정보라도 괜찮습니다.”

“어…… 저도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그 남자에게 길을 물었던 여자분이 골목길로 들어가는 걸 보았어요. 거기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도 않고…….”

가게 주인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월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고 손짓했다.

“그 골목길 안 좋은 사람들이 다닌다고 말이 많아요. 수도에 그…… 말 많은 거 아시죠? 행방불명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혹여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려요.”

“……감사합니다. 그쪽으로 가봐야 하겠네요.”

가게 주인은 염려스러운 표정의 월에게 힘내라고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 월은 눈을 번뜩였다. 행방불명…… 설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슈이렌이 범상치 않은 일에 휘말린 것은 확신했다. 폴도 이리저리 수사했지만 별다른 정보는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왔다.

“……납치를 당했을 수도 있다.”

“네?!!”

“궁에 사실을 알려서 도움을 요청하지.”

월은 한시라도 급하다며 폴을 재촉했고 빨리 돌아가기 위해 마차와 말을 분리한 뒤 각자 말을 타고 궁으로 향했다. 문지기는 문을 뚫을 듯이 달려오는 말에 기겁하며 말했다.

“멈춰라!!”

“급한 일입니다!”

월은 기사단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문지기에게 던져 주고는 지나쳐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황태자 궁으로 곧장 갔고 정문 앞에 도착했다. 말은 급한 숨을 몰아쉬었고 월과 폴은 재빠르게 내렸다. 지나가던 시종이 그들을 발견하고 눈을 느리게 껌뻑거렸다. 월은 시종의 당황함을 무시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 님을 불러 주십시오! 폴 너는 어서 단장님께 가거라!”

“네!”

폴은 세드릭에게 달려가고 시종은 급한 볼일임을 짐작했다. 시종은 영문은 몰랐지만 급한 표정에 예사롭지 않은 일임을 느꼈다. 그들이 슈이렌의 호위 기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설마 사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며 재빨리 이안을 데리고 왔다.

서류를 정리하던 이안은 월의 큰 소리에 놀라 창문을 열어젖혔고, 시종이 이안의 방에 노크했다. 시종의 굳은 표정을 본 순간 이안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안은 다시 창문 밖을 내려다봤고 슈이렌의 호위 기사일 그들의 옆에는 슈이렌이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당장 옷 안에 있던 주머니를 살피고는 손에 집히는 물체가 있자 바로 뛰쳐나갔다. 월을 눈앞에 둔 이안은 격양된 소리로 월에게 물었다.

“오는 동안 시종에게 들었다. 슈이렌 님과 떨어졌다고?”

월은 침묵으로 답했다. 곧 폴에 이끌려 온 세드릭도 도착했다. 이안은 미간을 부여잡으면서 급히 조금 전 옷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보았다.

제르펠이 혹시나 하는 일을 대비해 위치 추적 기능이 목걸이에 첨부되어 있었다. 회중시계는 슈이렌의 위치를 빨간 점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다행히 수도 안이지만……. 이상하게…… 외각 쪽인데…….”

“정황상이지만 납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안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이안은 카지노의 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월에게 회중시계를 건넸다.

“……이건 슈이렌 님의 위치를 알려 준다. 이 위치를 보고 따라가도록”

“전하에게는…….”

“내가 전하께 가지. 너희는 기사들을 데리고 슈이렌 님을 찾도록.”

“알겠습니다!”

한밤중에 궁에 비상이 걸렸다. 그중 세드릭은 누구보다 빠르게 제르펠에게 알려 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시종들은 말과 안장을 준비하고 기사들은 긴급 소집했다. 제3 기사단들은 슈이렌을 찾기 위해 총출동을 했다.

* * *

제르펠은 무료하게 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제르펠에게 조금이나마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생각은 먼 곳에 가 있었다.

제르펠은 슈이렌에 대한 걱정으로 말을 흘려들었다. 오늘 슈이렌의 첫 외출이었다. 슈이렌은 일이 생기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성격이라 다소 걱정이 되었다. 원래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제르펠은 슈이렌이 나가려고 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요즘 슈이렌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고, 사람이 되고서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공물 주머니를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슈이렌은 단단히 숨기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공물 주머니를 눈과 손이 닿지 않는 등 위쪽에 올려 두었고 그는 완벽하게 숨겼다고 자찬했지만 제르펠은 진작에 등의 밝기가 미묘하게 어두워진 것을 눈치챘다.

더군다나 슈이렌은 아직도 혼잣말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아, “선물이라…….” 하며 중얼거리기도 했으며 넌지시 “혹시 받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가 사 준 선물을 물끄러미 보는 슈이렌을 통해 눈치챘다. 제르펠은 과연 슈이렌이 어떤 선물을 줄 것인지 생각하면 기대가 됐다.

슈이렌이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것은 제르펠에게 준 적은 있어도 그가 스스로가 직접 골라서 주는 선물은 처음이었다. 슈이렌은 모르지만 장신구, 꽃, 먹을 것 종류 불문하고 그가 준 선물들은 전부 금고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꽃은 시들고 음식 같은 경우에 썩기 때문에 이안에게 찾아가 따로 금고에 마법을 걸어 썩지도, 상하지도 않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자님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도중 그의 집중을 깨는 낯선 목소리가 들렷다. 더군다나 그 목소리는 슈이렌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제르펠은 불청객을 향해 눈을 희번덕였다.

“그건 왜 묻지?”

시퍼렇게 날이 선 눈초리로 째려보는 제르펠에 기가 죽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귀족은 제르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요즘 사교 회에 도는 소문으로는 ‘전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사자님의 이야기를 꺼내라.’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단지 기분에 따라 못마땅하게 쳐다볼 수도 있다는 거였다. 심기 불편한 제르펠의 기색을 재빨리 눈치챈 귀족이 헛기침하며 넌지시 말했다.

“저번 황궁 연회 때 사자님에게 인사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안부를 전달하고자…….”

“너의 안부는 필요 없다.”

딱 잘라 거절하며 옆에 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제르펠의 태도에 귀족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 그렇습니까. 그저 황궁 연회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전하와 사자님께서 같이 등장한 날은 쉽게 잊기 힘들지 않습니까? 사자님은 전하를 무척이나 신뢰하더군요. 멀리서 보아도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런가.”

제르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경직된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귀족은 내심 놀라워하면서도 노련하게 표정을 감추었다. 슬슬 대화에 집중하는 제르펠을 보고 귀족은 제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가문에서는…….”

귀족은 제 가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열심히 떠들어 댔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도중 옆에서 낮은 구두 굽 소리가 옆에서 들렸고 제르펠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제르펠은 제 눈앞에 내민 와인을 주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옆을 보니 프란시아 후작이 보였다. 제르펠은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서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종 연회에 참석하다 보니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만남도 많았다. 그는 후작이 건네는 와인을 받아 살짝 돌리면서 향을 맡았다. 하지만 절대 마시지는 않았다.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보게 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황궁 연회 이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리 자주 마주칠 줄 누가 알겠습니다. 신의 장난 같은 운명이군요. 허허.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그, 그것이…….”

번뜩이는 후작의 눈에 말을 하던 귀족이 주춤거렸다. 후작의 견제에 제르펠은 그가 건네준 와인을 테이블 위에 보란 듯이 돌려놓았다.

“평범한 사업 이야기다. 후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저처럼 사업에 관해 관심이 있는 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혹시 괜찮은 아이디어라면 나와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귀족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태자와 후작. 사업만 본다면 어디에 붙어도 상관없었다. 단지 정치적으로 관여되기에 골치가 아픈 것이었다. 그때 귀족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는 인물이 등장했다. 깜짝 놀란 귀족이 뒤를 돌아보았고 뒤에는 베르트 공작이 서 있었다.

“제 동업자를 데리고 가시다니요. 후작, 오랜만입니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저기서 자네를 찾고 있더군. 어서 가 보시게나.”

“아! 그렇습니까? 전하, 각하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족은 구원자라도 만난 눈으로 공작을 보았고 정중하게 예를 표한 뒤 재빨리 사라졌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제르펠은 지긋지긋한 상황에 골머리를 앓았다.

연회 이후 계속되는 반복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기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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