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88화 (8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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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이렌 님!! 괜찮으십니까??”

“슈이렌 님!”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귀에 들리는 목소리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거…… 좀 이상한데? 이제 상황도 끝나고 분노가 가셨는데 머릿속의 목소리는 나의 분노를 계속 부추겼다. 내가 분노에 몸을 맡겨 모든 것을 부수기 바라는 것처럼.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하렴…….]

수신의 목소리?? 잠이 들었다던 그의 목소리였다. 수신의 힘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청아한 기운이 머리에 흘러들어왔다.

“……좀 괜찮아졌나?”

“슈이렌 님?”

내가 멍하게 고개만 숙이고 있자 이상함을 느낀 월이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확 돌려 그들을 째려보았다.

“이제 오냐? 내가 다 정리했어!”

내 고함에 기사들이 흠칫했다. 기사들은 울고 있는 사람과 쓰러져 있는 귀족들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동요를 무시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명령했다.

“이 사람들은 집에 보내 주고, 여기 있는 귀족들은 깡그리 잡아가!! 아, 특히 이 상인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해!”

“넵!!”

우렁찬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하여튼…… 그리고 발을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울리는 속과 머리를 달랬다.

수신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던 걸까?

[이 정도로 끝낼 거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휩쓸릴 느낌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일단 저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 일이나 하자.

기사들은 내 명령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노예가 될 뻔한 사람들은 피신시키고 반항하는 귀족들과 고용되었던 사람들을 제압해 끌고 가기 시작했다. 상인도 꼼짝없이 제압을 당해 끌려가는 것을 내가 막았다.

“잠깐. 걔는 이리로 데려와.”

손을 까닥거리자 기사가 재빠르게 상인을 내 앞에 대령했다. 상인은 내가 노려보자 옆으로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누구야?”

“네??”

“주동자가 있을 거 아니야?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귀족들을 불러 경매를 열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겠지? 그리고 노예들을 판 문서는 어디 있어?”

팔려 나간 다른 노예들도 구해야 했다.

상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만큼은 알려 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의미 없는 저항에 난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사태 파악이 안 돼? 너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거든? 덤터기 씌워지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불어라? 솔직히 샅샅이 뒤지면 되는데 기회를 주는 거야. 정말 혼자 죽을래? 그래도 같이 죽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내 협박이 통했는지 상인의 입술이 열렸다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자 상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벙끗거렸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난 이 자식이 여기까지 와서도 수작을 부리는가 싶었지만 상인 역시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목을 부여잡고 계속 입을 벙긋거렸다.

“……얘 왜 이래?”

뒤에 서 있던 기사에게 물었지만 그도 알 수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했지만 여기서 상인이랑 더는 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물을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손을 저어 끌고 가라고 했다. 상인은 질질 끌려가는 순간까지 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난장판이었던 것이 차례로 정리되고 있었다.

“……혹시 주인한테 말했어?”

“단장님이 전하께 알리러 갔습니다.”

“세드릭이? 주인한테??”

“네.”

“아놔…….”

내심 몰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려고 했지만 벌써 이 사달이 일어났다. 혼나는 건 100% 확정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가 없다. 결국 월을 데리고 수상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손이 남는 기사들까지 동원해서 이 잡듯이 건물 곳곳을 뒤졌다.

“여기 묘한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한 기사의 말에 그쪽으로 가 보니 커다란 명화가 있었고 그 그림을 떼어내자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몸을 구겨서 어두컴컴한 통로를 해치고 걸었다. 숨겨져 있던 비밀의 방으로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많은 종이가 빼꼭하게 쌓여 있었다.

“증거물은 절대 훼손되지 않게 옮기는 거 알지?”

“네!”

내 지시에 따라 한 장도 빠짐없이 전부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담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론 경매 물건도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챙겼다. 내 주위를 윙윙거리는 모기를 한 번에 탁 잡은 것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문 쪽으로 걸어갔는데 시끌벅적했다.

“뭔 일 있어?”

내 뒤에 있던 기사들은 증거품을 수집하고 있었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소란의 정체는 정신 차린 귀족들이 반항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전하의 직속 기사단이라고 해도 절차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귀족들을 잡아가시면 안 됩니다.”

“말 한번 잘하는구먼. 전하를 믿고 나대는 모양인데. 너희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당장 놓아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건 물론이고 신분을 내세워 협박도 일삼지 않았다. 심지어 어디서 나온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기사단을 막고 있었다. 옆에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기사인 것 같지만…….

“아주 난리구먼. 근데 대체 저 녀석들은 누구야?”

“수도 치안대입니다.”

“치안대? 그런데 왜 저래? 내 눈이 이상하지 않다면 귀족들의 편을 드는데?”

“……수도에 머무는 자들은 대부분 귀족에게 뇌물을 먹고 편의를 봐주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수도 치안대가 특히 심하죠. 수도에 진출했다는 것 자체가 연줄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친분이 있는 귀족들의 잘못은 눈을 감고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치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제 일은 똑바로 하지 않고, 심지어 뒤늦게 와서는 일이나 방해하고 말이야. 제르펠의 기사단이 강경하게 대하고 있지만 막무가내였다. 연행해야 하는 다른 귀족들과, 집으로 안내해 줘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증거를 수집하느라 기사를 데려갔기에 치안대보다 남아 있던 기사가 적었었다.

“자기네들이 숫자가 많다고 으스대는 꼴이야? 뭐야?”

아니면 신분이 더 높은 게 대수인지 으스대며 귀족과 치안대는 서로 쿵 짝이 아주 잘 맞아 보였다. 귀족은 이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며 말하고 치안대는 고생 많으셨다며 말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아니꼬운 눈초리는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내가 간 줄 안 건가? 내가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노려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두 팔 걷고 나서야지. 여기서 신분이 젤 높은 사람은 나거든??

협박하는 귀족 뒤에 가서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치안대는 나를 보고 놀랐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귀족은 내 손짓을 눈치채지 못하고 앞의 기사가 고개를 숙이자 협박이 통한 줄 알고 기고만장했다. 귀족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바로…… 누가 계속 나를 건드는 것이냐!”

내가 뒤에서 끝없이 쿡쿡 찌르자 드디어 눈치를 챈 것인지 귀족은 내 손을 ‘탁’ 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다. 왜?”

뒤를 확 돌아본 귀족의 얼굴이 노랗게 뜨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애들한테 뭐 하냐? 죄를 지었으면 감옥에 들어가야지. 또다시 물에 확 잠겨 줘? 그리고 너는 뭐야? 치안대라면서 국민을 보살피지는 못할망정 귀족들에게 아부나 해? 창피하지도 않아? 그럴 거면 치안대 하지 마.”

“…….”

“…….”

내 말에 합죽이가 되었다. 하지만 얼굴을 씰룩이는 것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대? 여기에 있는 게 문제인데? 경매 참가하러 온 거 아니야?”

“…….”

“응. 공범이야. 방관 죄도 죄거든? 조용히 기사 따라가지?”

귀족의 눈이 점점 매섭게 빛났지만 그에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주위에 있는 기사나 뒤에 있는 폴과 월이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바로 제압할 게 분명했다. 겁을 먹을 이유 따위 없지. 턱을 치켜들면서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팩 돌려서 치안대 쪽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방해만 할 거면 꺼져. 이때까지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얼굴을 쓱 내밀더니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야? 방해는. 저것들도 업무 방해죄로 못 끌고 가나?”

내가 협박하자 치안대도 주춤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소란을 듣고 나온 기사들이 치안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치안대 중 가장 앞장서 있던 자의 입이 열리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하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낀 채로 쳐다보았다.

“함부로 귀족들을 잡아가는 것은 법에…….”

“법? 응. 나도 법 중요하게 여기지. 꼭 지켜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에게 답을 종용하자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법대로 하자고. 노예. 어떻게 생각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건지 입을 떡 벌리고 주위를 보았다. 아니, 그럼 상황도 모르고 무조건 귀족 편~ 이랬던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저기 저 사람들 보여? 오늘 내가 아니었으면 이 많은 귀족 중 노예로 잡혀갈 뻔한 거. 어이없게도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네. 내가 빡치겠어? 안 빡치겠어? 사태 파악돼? 네가 할 일이 뭔지? 그래도 모르겠으면 당장 꺼져.”

내 말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헙하며 놀랬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기 바빴고 구경하러 온 백성들은 깜짝 놀라며 분개했다. 오히려 내 말에 동참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물건들을 치안대에게 던지고 있었다. 평소 그들의 행실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한마디 더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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