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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87화 (8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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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뚫은 벽은 경매장의 벽이었다.

무대 위에서 거의 종잇조각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사회자가 귀족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귀족들은 서로 저 여자를 사겠다며 가격을 올렸다. 하지만 우리가 보이자 일동 행동을 멈추었다.

사회자와 귀족들 모두가 당황해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귀족들의 물음과 함께 놀란 사회자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퍼졌다.

“노, 노예?”

“뭐?”

경매를 지켜보던 상인도 어이가 없는 광경에 잠시 넋이 빠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면서 주위의 사람에게 소리쳤다.

“당장 노예를 잡지 못해!”

사회자도 깜짝 놀라 마이크에 대고 잡으라고 소리를 쳤고 그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뒤에서 소란을 듣고 온 건지 한눈에 봐도 덩치가 큰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사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난 큰 물 덩이를 생성했지만 나에게 덤벼오는 사람들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 마법?”

내가 물 덩이를 생성하자 마법사라고 착각한 귀족들이 저마다 나를 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상인은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듯했다.

“저 노예 빼고는 다 제거해도 좋다!”

사회자는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이 능청스럽게 귀족들을 진정시키면서 오히려 나를 소개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한낱 노예들의 발악일 뿐입니다. 원래는 예정에 없었던 노예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의 마법사로 소장 가치는 충분합니다.”

소장 가치??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결국 포위망이 뚫렸는지 힘없는 여자나 아이는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고 고용인은 상인의 말을 듣고는 검까지 들이대며 죽고 싶지 않으면 항복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무기 하나 없는 사람들은 날이 선 검을 보고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고 주저앉아 버렸다.

“까악!!”

그러다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검을 들고 있던 자가 노예가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검을 보고 동요한 사람들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행렬을 벗어나 정신없이 달렸고, 고용인들은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내가 대형을 이탈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그저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달렸다. 귀족들은 자리를 피하고 나가려는 자와 고용인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고용인은 나 몰라라 도망치는 사람을 끝까지 쫓았고, 절망감에 무릎을 꿇은 자도 있었다.

난 망연자실하게 제압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가 아드득 갈렸다. 더 화가 났던 일은 어느새 뒤로 다가온 상인이 마치 너의 운명에 굴복하라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상인은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도 해 주었지만 여기까지군. 난 정말 운이 좋군.”

“글쎄…… 과연 운이 좋은 걸까?”

그를 노려보며 말하자 잠시 뒤로 주춤했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발버둥은 그만 치라고 말했다. 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동시에 푸른 기운이 술렁였다.

“너희는 왜 이 짓을 하지? 돈을 위해??”

“뭐?”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노예 상인은 아직까지 여유가 넘쳤다. 난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속으로 진정하자, 진정하자고 되뇌었지만 내 감정은 시소처럼 널뛰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게?”

“귀족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거라고 오히려 더 좋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가? 감사해야 마땅한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이제 슬슬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하시지.”

“기가 차서…… 너나 귀족들이나 구제불능이네? 타지 않는 쓰레기는 치워 버려야 하지 않겠어?”

내가 싱긋 웃자 그제야 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뒤로 주춤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머릿속으로 묘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를 부추기는 듯한 목소리.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성을 잃고 분노에 몸을 맡길 것 같았다.

[……가만히 있을 거야? 아니지? 복수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속삭이는 목소리에 응했다.

“당연한 소리를.”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폭발적인 힘이 흘러나왔다.

* * *

“저게 뭐지?”

“건, 건물이 무너진다!”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한 건물 천장 위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기둥은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얼마나 높은지 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 여파로 건물의 천장은 뚫리고 주변에 천장의 잔재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기둥은 멀리서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수도 하늘 위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비가 주르륵 내리기 시작했다. 그 건물 근처로 천둥이 내려앉았다.

이안이 준 위치 추적기로 열심히 따라가던 월의 눈에도 물기둥이 똑똑히 보였고, 기사들은 저곳에 슈이렌이 있다고 확신했다.

“저기다!”

슈이렌을 찾고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물기둥이 솟았던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상인은 당황했다. 어째서 제 눈앞에 사자님이 있는 것인가?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한순간에 폴싹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슈이렌의 후드는 폭발적인 힘의 여파로 벗겨져 있었고 주변에 푸른빛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주위를 맴도는 물기둥이 채찍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사람들을 날려 버렸다. 그의 감정에 동화하듯이 더욱 맹렬하게 요동쳤다. 상인은 고용된 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난장판이 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겁에 질려 버린 상인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다리가 덜덜 떨렸다. 휘청이는 상인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상인의 입술이 주체도 하지 못할 정도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후작이 어떤 책임을 물을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를…….”

당연했다. 노예 매매를 들킨 것도 모자라 목격자가 슈이렌이었다.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한다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후작에게 죽기 전에 황태자에게 죽을 것이다! 그만큼 엄격하게 노예는 금지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상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끈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상인은 무릎을 꿇으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였다. 너의 뜻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대로 해 버리자고, 음산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헤집어 놓았다.

난…….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평화로운 생활이 지속하는 것. 피가 흐르고 추악한 세상보다는 평화로운 세상이 좋았다. 사람이 죽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보기 싫었다. 죄 없는 자들이 이기적인 자들에 의해 피해 보는 것이 싫었다. 기다란 물줄기는 주위의 적들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더니 도망하려는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다.

물은 곧 나의 의지였다.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상인은 비굴하게 손을 싹싹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그는 넙죽 엎드려 내 분노가 풀리기를 바라며 머리를 땅바닥에 찍었다. 몇 번이고. 살짝 그의 이마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분노가 가시지는 않았다. 노예가 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그 누구도 보상해 주지 못했다.

난 천천히 걸어가서 쓰러져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물방울에 스며들자 빛을 내며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상처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상처가 낫기 시작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사, 사자님?”

“사자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상인과 다른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도와주어서, 구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방금의 충격으로 건물이 반쯤 날아가 버렸다. 벽이 부서져 밖과 연결이 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망칠 거면 빨리 가세요.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도 건물이 박살이 나자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천장을 바라보니 공간의 뒤틀림이 보였다. 부서진 벽면을 본다면 허름하고 작은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건물의 안은 넓고 높이 또한 길었다. 확연하게 안과 밖이 달랐다. 그 증거로 내 눈동자에 먹구름을 통해 내리는 비가 보였지만 그 비가 내 얼굴에 닿는 일은 없었다. 밖에서 내리는 비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막에 갇혀 있는 것처럼.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네.”

계속 넙죽 엎드린 채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상인을 무심하게 지나갔다. 귀족들이 내 모습을 보자 한껏 떠들던 입이 꾹 닫혔다.

“왜? 안 떠들어? 나를 산다고 했잖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귀족들이 나 살려라, 하며 허둥지둥 도망가려고 했다.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인제야 도망가는 꼴이 우습게 보였다.

“어딜 가? 너희 때문에 주인이 쉴 틈이 없잖아!!”

귀족이라는 자가 선동해서 백성을 노예로 만들고 부리고 있으니…… 내 뒤에서 커다란 파도가 형성되었다. 내가 손을 살짝 까딱거리자 해일처럼 경매장을 쓸어버렸다. 귀족들은 물에 휩싸여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파도에 휩싸여서 어푸어푸하며 살려 달라는 귀족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고 물이 사라지자 혼절한 귀족들이 수두룩했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널브러져 있는 귀족들의 모습에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머리에 너무 열이 올랐는지 아니면 살짝 무리했는지 힘이 빠져 몸이 휘청했다. 아픈 미간을 부여잡았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몽롱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더 할 수 있잖아.]

이제 조용히 해라…….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자 폴과 월이 소리를 지르며 다른 기사들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한발 늦은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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