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86화 (86/103)

-86-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노예 상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행동을 개시했다. 난 힘을 모아 물방울을 만든 다음 칼날처럼 얇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손가락을 휙휙 돌리자 칼날이 빙그르르 돌았다. 휘리릭 도는 물의 칼날은 살짝 손만 대어도 베일 것 같았다.

내 손과 발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로 만든 칼날을 족쇄에 갖다 대었고 매끄럽게 족쇄를 베어냈다.

“됐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무거웠던 짐을 덜어 냈기에 손과 발이 가벼웠다. 살짝 가볍게 뛴 다음 팔을 풀고 기세 좋게 창살도 베어냈다. 내 기운만큼이나 중력에 의해 기운 좋게 창살이 떨어지면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난 몸을 움찔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며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차……. 조용히 베어내야 했었는데.”

반대편에 있던 여자아이는 내가 감옥 창살을 베어 버리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오빠. 어떻게 나왔어?”

“이걸로 쓱싹하고?”

난 아이의 눈앞에서 철창을 베어내는 물의 칼날을 보여 줬고 아이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겸사겸사 아이의 손에 달린 족쇄도 가뿐히 잘라 냈다.

“풀렸다…….”

아이의 순진한 음색과 창살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주위에서 난리가 났다.

“풀, 풀렸다고?”

“어이! 나도 구해 줘!”

“나, 나도! 집에 남편과 아이가 기다려요!”

주위에서 서로 꺼내 달라고 아우성치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소란스러움을 눈치채고 사람들이 내려오면 큰일이었다. 나는 얼른 부서진 철창을 넘어 건너왔다.

“쉿!! 조용! 사람들이 온다고!”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조용히 하라고 입가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러자 소리치던 사람들이 제 입을 턱 막았다. 이제 조용하네. 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주변에는 나와 같이 잡혀 온 자들이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꼬질꼬질한 옷 상태를 봐서는 대체 언제 잡힌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노예 상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중요한 건 탈출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풀어 주기 전에 당부, 또 당부했다.

“제가 풀어 줄 테니까. 제발 조용히 하세요. 상인에게 들키면 큰일 나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난 공중에 물을 생성하여 창살과 족쇄를 베어냈다. 물론 아까 같은 불상사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베었고 떨어지는 창살을 얼른 받았다. 윽……. 무겁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내 행동을 보고 나를 따라 창살을 받아서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조금 전과 같은 와장창 소리가 나는 대신 쿵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소음이 없게 하고 싶었지만 쇠다 보니 바닥과 부딪치면서 울리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한적한 지하실이다 보니 메아리가 울렸고 사람이 내려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명씩 감옥 안에서 구출했다.

모두를 구출하고 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였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몇 명이나 보였다. 다들 나를 간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향해서 기대감에 서린 눈빛으로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때 내 옷깃을 잡아끄는 아이가 있었다. 내 창살 맞은편에서 울고 있던 여자아이였다.

“오빠?”

“응? 무슨 일이야?”

“우리 언니도 구해 줘.”

“……뭐? 언니가 있다고?”

하지만 분명 여기에 있는 자들은 모두 풀어 주었다. 혹시 빠진 사람이 있나 하고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총각, 그 아이의 언니는 사람들에게 끌려갔다네…… 참하고 예쁜 아가씨였지. 바로 상품이 되겠다며…… 경매에 끌려갔지…….”

한 아저씨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매요??”

“그래, 아마 곧 시작되겠지…….”

“혹시 그런 사람이 더 있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 아가씨뿐이네.”

곤란한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솔직히 내 몸 하나는 몰라도 전부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탈출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 한 명까지……. 아이는 계속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간절한 아이의 눈망울에 마음이 약해졌다.

“음…… 일단 여기 지리를 아는 사람 있나요?”

출구를 알아야 나가든 말든 하지. 내 말에 긴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나와 같이 납치당한 사람일 텐데 지리를 알 리가 없었다. 안타까움을 속으로 삼켰다. 난 우선 무릎을 꿇고 아이의 머리를 안심하라고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이 오빠가 언니를 꼭 구해 올게.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자.”

정확한 장소도 모르는데 막무가내로 이곳을 뒤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장 언니를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폴과 월에게 도움을 청해 제르펠을 불러오는 게 훨씬 안전했다. 물론 노예 제도를 허용하는 나라도 있겠지만 난 이때까지 노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제르펠이 그런 제도를 허용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난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기 위해 작게 손뼉을 쳤다.

“자, 혹시 힘에 자신 있다 하는 사람?”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뒤를 지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습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이탈자가 없도록 잘 살펴볼 사람이 필요해요. 전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혹시 지원자 있습니까?”

그러자 번쩍 손을 든 남자가 있었다. 아까 호기롭게 노예 상인에게 소리를 쳤던 남자였다. 그는 우락부락한 남자로 근육질로 단련된 몸을 보면 호락호락하게 당할 상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풀자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하도록 하죠. 그 자식들……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다른 지원자를 물었지만 더는 지원자가 없어 그 남자로 확정되었다. 결의로 불타는 눈빛을 보면 믿을 만한 인물로 보였다. 난 차분하게 사태를 정리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밖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되도록 사람들의 피해는 적게 하자고요.”

그때 떨고 있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출구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죠……?”

그러자 사람들이 불안감에 술렁였다. 내가 손뼉을 치자 다시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되죠. 그냥 일직선으로 달리세요. 제가 앞에서 다 뚫어 드릴게요.”

난 자신만만하게 한 번 더 물방울을 보여 줬다. 내가 쇠도 잘라 낸 것을 보았기에 믿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여러분은 탈출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세요. 남성분들은 아이나 여성분들을 지킬 수 있도록 주변에 서 주시고요. 함부로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을 잡기 시작하자 난 손짓으로 바짝 붙으라는 신호를 주었고 문 앞에서 서서 조용히 하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난 노예 상인이 나왔던 입구의 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주위가 깜깜해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기척도 없었고 별다른 위험은 없는 듯했다.

“그럼, 갑니다?”

모두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문을 열었고 우리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갔다. 얼마쯤 경계하며 걸었을까. 곧 또 다른 문이 있었고 내가 살짝 열어보니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금장식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겁한 난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요……. 잠시 상황을 보고 나가도록 해요.”

문 너머로 경매가 곧 시작한다며 빨리 움직이라는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경매가 시작된다면 아이의 언니가 위험했다. 문 너머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아래로 내려가서 경매가 확정된 노예를 데리고 오라는 말도 들렸다.

즉, 우리 중 경매가 확정된 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언니가 경매로 팔리기 전에 제르펠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어차피 그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문을 열면 있는 힘껏 달리세요. 제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다 해치울 테니까요. 셋 하면 문을 엽니다.”

난 조용히 숫자를 세었고 셋이 되자 문을 열었다.

“달려요!!”

분리 분산하게 사람들이 우두두 달려갔다. 소 떼처럼 앞만 보고 무조건 달렸고 경매를 준비하다가 우리가 탈출한 것을 본 고용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왕좌왕하다가 “마, 막아!”라는 소리가 나왔지만 내가 물을 이용해서 치워 버렸다.

뒤에서 달려오는 고용인들은 남자의 힘에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노, 노예가 탈출했다!! 잡아!!!”

고용인들은 쓰러지는 도중에도 우리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며 소리쳤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막으려고 기를 썼다. 우리는 반대로 나가기 위해 애썼다. 나는 뒤에서 물을 이용해 미끄러지게 하거나 고용인들의 머리에 물 덩이를 만들어 머리를 감싸게 하여 숨을 못 쉬게 하였다. 호흡 곤란으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빠르게 통과했다.

만만치 않은 반항에 그들도 당황했는지 버벅거렸다. 난 눈앞에 있는 벽을 사정없이 부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달리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내 뒤를 따라오는 자들도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내 눈썹이 사정없이 찡그려졌다. 눈앞에 드러난 것은 귀족들의 놀이판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