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82화 (82/103)

-82-

“가는 거야?”

레스토랑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 무색하게 제르펠은 공작이 찾아오면 급히 자리를 뜬다. 익숙한 패턴이다. 그럼 제르펠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다 오지’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노을이 다 지고 달이 빼꼼 고개를 내밀 때 돌아온다.

“잘 지내고 있으렴. 금방 갔다 오마.”

이거 봐. 똑같은 패턴. 볼을 빵빵하게 불리면서 토라진 티를 내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토라진 티는 연기였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한 초석이었다.

“쳇…… 오늘도 일찍 온다고 하면서 늦게 올 거지?”

난 한쪽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르펠은 어찌할 줄 모르는 미소만 지었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죄책감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난 뒤를 돌아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 선물은 됐고, 같이 있고 싶은데……. 저번 식사 때에만 같이 있고, 요즘에는 얼굴도 보기 힘들잖아…….”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제르펠은 난처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거 같은데?

“주인이랑 연인은 난데…… 다른 사람들보다 공유하는 시간이 적을 수 있어?”

“나도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단다.”

제르펠은 내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물론 그가 바쁜 이유는 후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내가 용건을 말한다면 결사코 반대할 것 같았다. 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이제 됐어! 라며 그의 손을 치웠다.

“혼자서 잘 놀 거야. 늦게 돌아오든지 마음대로 해!”

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고개 돌린 내 얼굴을 꽉 붙잡고 눈을 마주하도록 잡아당겼다. 그의 돌발 행동에 주춤했다. 곧 제르펠의 얼굴이 다가오더니 제 입술을 내 입술에 맞대었다. 아주 짧게.

“다녀오라는 키스는 해 주지 않는 건가.”

“스, 스스로 했잖아!”

난 입술을 손등으로 막으며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났다. 얼굴에 장밋빛 홍조가 생겼다. 말 돌리는 솜씨 보소. 그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귀엽게 애교를 부린다는 것은……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쳇.”

다 눈치를 챘으면서 모르는 척 대꾸했냐? 유쾌한 웃음소리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난 커험, 헛기침했다.

“그럼…… 들어줄 거야?”

한쪽 눈을 살포시 뜨고 제르펠을 곁눈질했다. 너한테도 좋은 거야. 인마.

“말해 보렴.”

그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고 난 칭얼거리면서 그에게 달라붙었다.

“궁 밖으로 나가 봐도 돼? 잠시만 구경하고 돌아올게.”

바로 그의 눈썹이 언짢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살짝. 아주 미세하게 마음에 안 든다며 미간이 구겨졌다. 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위로 올려다보았다.

“궁 밖이라 혼자서는…….”

딱 잘라 말하려는 제르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제르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즘에 자주 외출을 했다지만 그건 제르펠과 함께라는 전제조건 때문이다.

“폴이랑 월도 데려갈게. 정~말 안 떨어질 자신이 있어! 여차하면 내가 힘써도 되는걸. 그니까 전혀 걱정 없어. 내가 비 내리는 거 봤지? 나를 노리는 괴한 따위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슈…….”

“못 믿어??”

반론은 용서하지 않겠다! 눈에 부릅떠 힘을 주고 제르펠을 쳐다보았다. 제르펠이 긴 한숨을 늘어놓았다. 쓴웃음을 지은 그가 말했다.

“괜찮겠나?”

“물론이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잔뜩 담긴 표정에 제르펠의 미간을 꾹꾹 누려 주며 얼굴을 피라고 말했다. 오늘은 그의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옆에 본인이 있으면 곤란하지. 목표를 이룬 나는 헤실거리며 나왔다. 원래라면 베르트 공작을 째려보았겠지만 웃으면서 반겨 주니 베르트 공작이 주춤했다.

“폴, 월 이리로.”

“네.”

“네, 네!”

폴과 월은 빠릿빠릿한 자세로 제르펠의 앞에 똑바로 섰다.

“오늘 슈이렌을 잘 지키도록. 이안, 슈이렌에게 마차를 내주어라. 멀미에 약하니까 마차의 의자는 되도록 푹신한 것으로. 예산은 충분하게 주도록. 슈이렌이 원하는 게 있다면…….”

“아, 알겠으니까. 이만 가 봐야 하지 않아? 공작이 기다린다.”

잔소리하는 그의 말을 내가 끊었다. 제르펠은 내키지 않은 듯 살짝 혀를 찼지만 공작이 뒤에서 그를 기다렸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너라. 부디 조심하고.”

“알았어.”

제르펠은 눈을 가리는 내 머리를 귀로 넘겨준 다음 이마에 입맞춤했다. 제르펠이 걱정된다는 듯이 힐끔 돌아보기도 했지만 난 잘 다녀오라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난 보이지 않자 바로 방으로 달려가서 주머니를 챙겼다. 빵빵해진 주머니를 뿌듯하게 보았다.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계속 돈이 안 될지 고민하는 것보다 먼저 돈으로 전환한 다음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뭘 선물할 건지는 생각했단 말씀. 가격이 좀 나가는 물건이지만…….’

난 창문으로 그가 탄 마차가 매끄럽게 밖으로 나서는 걸 보았다. 그리고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뒤에 서 있던 폴과 월에게 말했다.

“좋아. 갔다. 우리도 빨리 가자.”

힘찬 발걸음으로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이안이 말했다.

“마차는 어느 것으로 준비할까요?”

“마차?”

“네, 황가의 문장이…….”

“아니! 그냥 평범한 마차로!”

그런 마차를 타면 소란이 일잖아! 이안은 잠시 고심하더니 그럼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사라졌다.

“슈이렌 님, 전하의 선물을 사러 가십니까?”

“어. 이안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물론 주인한테도!”

난 신신당부하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조금 기다리니 멀리서 이안이 팔에 후줄근한 후드를 두른 채로 다가왔다. 저 후드는……? 본 적이 있는 후드였다. 인식 장애 술식이 걸려 있는 후드였다.

“이것을 착용하시면 아무도 슈이렌 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알아. 저번에도 입어 봤어.”

이안은 각자의 몫의 후드를 우리에게 주었다. 이안은 나를 지그시 보다가 월에게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월이 주머니를 받고 안을 보자 주머니 속에는 찬란한 빛을 내는 금화들이 잔뜩 있었다. 용돈이 좀 많은데……?

“대부분 물품은 주머니 안의 돈으로 해결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혹시 돈이 부족하시거나 큰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상황이 오시면 이 수표를 쓰면 됩니다.”

“수표? 백지인데.”

“수표 맞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백지 수표?? 살다 보니 이런 수표도 보게 되네. 수표 끝에는 황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절대 쓸 일이 없다는 건 알겠다. 돈주머니만 써야지. 주인 선물에 이안이 준 돈을 쓰지는 않을 거지만 먹을 것이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수도 있으니 고맙게 받았다. 그리고 이안의 안내를 받아 마부 관으로 갔다.

이안이 마부를 시켜 가져온 마차는 평범했다. 요즘 눈이 부신 마차만 봐서 그런지 눈이 편안했다. 철저하게 내 의견을 반영한 마차였다. 곁으로 봐서는 안에는 부실할 것 같았지만 그 정도야 참으면 됐다.

“평범하고 딱 좋네. 안이 부실해도 좀 참아야지.”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한 이안이 문을 열자 다른 곳이 펼쳐졌다. 난 외부와 내부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어떻게 이 마차에서 저 내부가?? 깜짝 놀라 눈이 잔뜩 커져서 해명을 요구하자, 이안이 말했다.

“잠행하기 위해 썼던 마차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궁 밖으로 나갈 때 쓰는 마차이죠.”

“헤…….”

곁으로만 봤을 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내부였다. 저번 마차와 내부의 차이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딱 좋아. 그럼,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월과 폴은 마부 칸에 타더니 이럇. 소리와 함께 마차를 출발시켰다. 창밖으로 제르펠의 궁이 점점 멀어졌다. 눈으로 빨리 갔다 오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제르펠보다 일찍 도착해서 놀라게 해야지. 난 느긋하게 마차에 널브러졌다. 멀미가 날 것은 확정이었고 좀…… 불편하긴 하지만 자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잠에서 깨면 힘을 좀 써야지.

따뜻한 오후에 하는 외출에 창문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난 스르륵 잠에 빠졌다.

“……일어…….”

의식 저편에서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잠을 방해하는 녀석이 누구야?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비몽사몽간 일어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주변에 건물들이 보였다. 세상 편안하게 잠들었네……. 다시 목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리니 웬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신지? 특출할 것 없는 남성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셨습니까? 수도에 곧 도착합니다.”

“뭐, 뭐야? 누구야?”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남자는 아…… 작은 탄사를 내뱉더니 말했다.

“월입니다.”

나도 모르게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수도에 도착했으니 후드를 썼고 마법이 발동한 모양이다. 폴도 이미 후드를 쓰고 있었다.

“이제 후드를 쓰시지요. 혹여 슈이렌 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 최대한 부르는 것도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입을 쓱 닦았다. 정신 차리자! 볼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쳤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구석에 던져두었던 후드를 벗겨지지 않게 꼼꼼하게 썼다.

“혹시 가려고 한 곳이 있습니까?”

“음…… 우선 돈부터 바꾸자. 그…… 고급스러워 보인 보석은 아니고 받은 것들이 있는데 처분할까 싶어서……. 주인 선물인데 아무래도 내 돈으로 사는 게 좋잖아?”

“아…… 보석 말입니까.”

항상 뒤에서 지켜보았던 월이기에 금방 파악했다.

“제가 한번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래.”

열린 창문 사이로 주머니를 월에게 건네주었다. 월은 주머니 안을 잠시 살피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많이 부족한가?

“이 상태로 건네 드릴 겁니까?”

“뭐, 그렇지……. 그게 전부라서…….”

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월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돈이 얼마 안 나오는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심각한가? 옆에서 말의 끈을 잡는 폴조차 내 주머니를 보더니 얼떨떨하게 웃었다. 월은 주머니를 다시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제법 제빛을 내는 예쁜 보석들이지만 귀족들이 하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에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월은 잠시 고심을 했다.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